▲종교간 대화가 한창이다. 개신교 대표논객으로 참여하고 있는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을 만났다. ⓒ사진=지유석 기자 |
종교간 대화가 한창이다. 지난 2월부터 시작된 종교포럼 <종교를 걱정하는 불교도와 그리스도인의 대화: 경계너머, 지금여기>는 어느 덧 다섯 번의 순서를 소화했다. 개신교 대표논객으로 참여한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에게 종교간 대화는 그다지 낯설지 않다. 그는 이미 한신대 신학대학원생 시절 화계사 학승들과 교류를 나눈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이번 포럼은 새롭고 흥미로운 시도였다. 그러나 예상 외로 그는 포럼이 회를 거듭하면서 신선함이 떨어져간다는 말로 말문을 열었다.
Q : 종교포럼이 7월이면 6회 차로 접어든다. 절반의 일정을 소화했는데, 중간결산을 한다면?
김진호 실장(이하 김) : 이번 포럼은 새로운 시도였고, 따라서 흥미로 왔다. 이제까지 종교간 대화하면 각 종교간 접점을 이야기하는 데 머물렀다. 즉 각자의 종교가 자신들의 고유한 개념을 다른 종교와 호환 가능한 언어로 바꿀 수 있는가에 논의가 모아졌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번 종교포럼은 ‘종교가 걱정거리’라는 문제의식에 천착하고 있다. 종교를 누가 걱정하는가? 바로 시민사회다. 그리고 시민사회도 걱정이 많은데, 종교는 이런 걱정을 어떻게 풀 것인가? 이런 의문에 대한 접점을 찾고, 시민사회적인 문제로 고민하고, 시민사회에 종교가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자리였다. 그래서 세 명의 발제자(김진호 실장, 김근수 <가톨릭 프레스> 발행인, 조성택 화쟁문화아카데미 대표)가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 포럼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사회자가 세 명이라는 점이다. 사회자는 기획자로서 참여했다. 때론 따로 모였고, 때론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형식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지금은 처음에 비해 신선도가 떨어졌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같은 형식으로 아홉 번의 포럼을 진행한다는 게 쉽지 않다. 게다가 지금은 참석자들이 고정되다시피 한 것 같아 보인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사진=지유석 기자 |
Q : 가톨릭의 권위라든지, 개신교의 퇴행현상 등 그동안 포럼이 다룬 주제들은 무척 신선했다고 본다. 포럼의 의미에 너무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는 건 아닌가?
김 : 종교포럼에서 다룬 주제는 나쁘지 않았다. 단, 같은 형식으로 다섯 번을 진행하다보니 형식에 대한 식상함이 느껴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용상으로도 안타까움이 있다. 일정 수준 불가피한 면이기도 한데, 발제를 준비할 때 글에 대해 깊이 고민을 해야 함에도 이런 고민이 덜 된 상태에서 포럼에 임한다는 것이다. 대신 청중들이 듣기에 편해지기는 했다. 서사는 단순하고, 오가는 말 속에 있다 보니 지루함은 덜하다. 아무래도 생각의 깊이가 얕아지는 측면이 있어 보인다.
Q : 그동안 종교포럼이 다룬 주제들은 일정 수준 반향을 일으켰다고 평가한다. 발제자 입장에서 의미를 두는 지점이 있다면?
그때그때마다 아쉬움이 있다. 더 잘하고 싶고, 또 청중들을 복잡한 고민으로 초대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매번 기대만큼 가지는 못했다. 내겐 이번 포럼이 무엇보다 이웃 종교의 고민을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똑같은 주제를 다뤄도 이웃 종교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제도적 성격, 각 종단 성도들의 스타일이나 언어의 차이 때문이 원인이라고 보는데, 이런 점들이 흥미로웠다.
나를 비롯해 김근수 <가톨릭 프레스> 발행인과 조성택 화쟁문화아카데미 대표 등이 각 종단에 비판적인 입장이어서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나 성향에서 차이점도 드러난다. 비판적인 입장임에도 종단은 물론 성향 차이로 인해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 다르기도 하다.
연구자들끼리 가벼운 논쟁이 벌어질 때가 왕왕 있다. 그런데 연구자들끼리의 논쟁은 어렵고, 그래서 대게 피하려한다. 기본적으로 논쟁이 지닌 감정적인 날카로움 때문이다. 때론 이런 걸 피하고자 상찬만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번 포럼의 발제자들은 오래전부터 깊이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서로간의 비판은 쉽게 이뤄졌다. 또 비판할 때도 서로 믿는 면이 있었다. 이웃 종단에 소통이 되고 믿을 수 있는 대화 파트너가 있음을 확인한 것이 이번 포럼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이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사진=지유석 기자 |
Q : 개신교로 시야를 좁혀보자. 지난 3월 발제를 통해 개신교가 ‘증오 종교’로 퇴행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최근 봉은사 역명, 그리고 퀴어 문화축제 같은 쟁점에서 보듯 개신교의 퇴행은 갈수록 심해지는 양상이다.
김 : 우선 개신교계가 보이는 퇴행적 행동들은 기독교 전반을 고립시킬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런 역기능이 순기능을 할 수 있다고도 본다. 동성애 논란 당시 공공연히 한국에서 동성애 담론이 안착하는데 기독교가 큰 힘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럴 개연성은 충분하다. 즉 사람들은 개신교가 비판하는 대상에 훨씬 더 심사숙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냉혹하게 말해서, 개신교가 고립된 성처럼 되가는 상황이라면 위악적 행동을 계속해 나갈 가능성이 높다. 개인으로 봐도, 이리저리 몰리고 위축감을 느끼면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개신교는 계속해서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가장 근원적 배후는 성장의 문제다. 성장이 지체된데 대한 위기의식이 원인이라는 말이다. 성장이 지체되니 성직자들의 취업난은 가중되고 그러다보니 생계도 어려워진다. 몇 년 전처럼 신도들의 충성심이 높지 않은 것도 한 몫 할 것이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따가운 시선이 쏠리면서 개신교인들의 자존감은 위축되기에 이르렀다. 얼마 전만 해도 어디서나 식사 시 성서를 올려놓고 기도하는 모습이 목격됐는데, 지금은 이런 모습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성서를 끼고 다니는 사람도 눈에 잘 띠지 않는다. 목사가 목욕탕 갔을 때 직업에 대한 질문을 받고 선뜻 목사라고 대답 못하는 사람도 많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사진=지유석 기자 |
이 모든 현상들이 성장 지체와 맞물려 있다. 여러 요인들이 뒤섞여 있어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쉽게 판별이 어렵지만, 위축된 자존감은 깊은 자기개혁이나 쇄신을 이뤄내기 보다 아주 임시방편적이고 가시적인 행동을 이끌어낸다.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런 경우 ‘증오의 정치’가 쉽게 작동한다고 지적했다.
개신교계가 성소수자 문제를 다뤘던 방식이 바로 증오의 정치였다. 사실 개신교계가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킬만한 요소를 끄집어냈다기보다 의도적으로 위기를 조장한 경우가 많았다. 이를 테면 TV드라마의 동성애 코드에 과잉반응함으로써 사람들을 성찰적 고민으로 이끌지 않고 ‘저 사람들 왜 이래?’라는 반응을 자아내게 했다는 것이다. 퀴어 퍼레이드 반대 운동을 하면서도 설득력 없는 언어와 누가 봐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과잉 행동 등으로 사람들에게 부정적 인상만 각인시켰다.
동성애 담론이 우리 사회에 잘 정착했다면, 개신교는 또 다른 소수자를 향해 공격성향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다. 즉 우리사회에서 교회가 계속해서 나쁜 얼굴로 나타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현상의 근저엔 성장의 위기가 중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 식대로 말하자면 대형교회 패러다임이 끝나간다는 것이다. 이제 다른 패러다임으로 교회와 사회를 고민해야 할 때가 왔다.
‘작은 교회’가 새로운 개념으로 제시되었는데, 신학교나 신학자가 이 담론에 잘 반응하지 않는다. 비록 몇몇 목사들에게 국한돼 있지만 앞으로 ‘작은 교회’ 담론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본다.
※ 2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