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웅 ACTS대 교수 ⓒ베리타스 DB |
주체사상은 1950-60년대 중국과 소련에 대한 반사대주의적 경향으로부터 형성됐다. 북한은 문화적 사대주의에 관한 문화적 대응으로 ‘주체’라는 정치이념을 고안한 것이다. 이때 주체의 개념은 맑스-레닌주의를 북의 상황에 적절하게 변형시키면서 자주성을 강조한 정치적 이념이다. 1970-80년대에 들어서면서 주체개념은 인간중심의 철학화 과정을 거친다. 철학적 해석학이 적용되면서 주체사상은 기존의 맑스-레닌주의 주체개념을 초월하여 인간의식의 능동적 역할을 강조하는 인본주의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물질과 정신세계의 합치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보다 포괄적인 주체개념으로 발전한다. 주체개념에 정신이 가미되면서 생명체 개념이 함입된 것이다. 즉, 사회역사적 발전의 원동력은 물질만으로 구성된 특정계급의 투쟁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즉, 인민대중의 주체적 의식과정에 기초하여 창조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정치 생명체론이다.
1990년 이후부터 주체사상은 이러한 생명체개념을 중심으로 정치적 차원을 훨씬 넘어 본격적인 종교성을 띠게 된다. 이러한 주체사상이 이미 주민들의 의식 속에 절대 종교성으로 기능하고 있었기 때문에 90년대부터 시작된 “고난의 행군”과 최근 식량난과 핵문제의 위기 속에서도 북조선의 사회정치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어떠한 외부적 위협에도 결코 패배하지 않을 최고의 무기는 핵이 아니라 바로 “필승불패의 주체영성”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사상적 기능성을 더욱 강조한 선군사상, 붉은기 사상, 강성대국론 등이 새롭게 대두되기도 했지만, 이것들도 인간의 종교성과 정치성이 결합되어 나타난 결과들이다.
주체사상의 종교성을 증명할 사례는 또 있다. 2003년 8월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 북한 응원단이 예천에서 응원을 마치고 대구로 돌아갈 때 일이다. 이들을 환영하는 길가 현수막에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악수하는 사진이 들어 있었다. 전날부터 내린 비로 현수막이 젖어 있는 것을 발견한 북한 응원단은 버스에서 뛰어내려 현수막을 떼어냈다. 이들은 “장군님 사진에 어떻게 비를 맞히느냐”고 거세게 항의하며 눈물을 흘렸다. 북한에는 ‘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을 위한 10대 원칙’이 있다. 생활지침이라 할 이 원칙의 3조 6항은 “경애하는 수령의 초상화·동상·출판물을 정중히 모시고 철저히 보위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북한 응원단의 돌발행동은 이 계율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자기 집단 밖의 사람에게까지 계율 준수를 요구한다는 점도 유별나다. 북한에 경수로를 지어주러 간 KEDO(한반도에너지기구) 관계자가 김일성 부자 사진이 있는 노동신문을 깔고 앉았다가 혼이 난 일도 있다. 이렇게 주체는 현대 북한 사회의 공동체 문화를 더욱 결속시키고 있으며 체제붕괴를 미리 차단하는 일종의 내적 방어의 역할 또한 담당하고 있다. 북한은 국제정세의 여론이 악화되어 외부위협이 강해질수록 사상무장을 더욱 강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사례로 미루어볼 때 주체사상은 북한주민에게 종교와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주체사상은 신념 혹은 교리, 사제, 정기적 제례의 실행이라는 종교의 3대 구성 요소를 갖고 있다. 주체사상은 교조(敎祖·김일성)와 후계자(김정일, 김정은), 성지(聖地·만경대 등), 조직(노동당과 군), 교리(敎理)와 계율까지 종교의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는 것이다.
주체사상을 종교로 보는 관점은 학계에도 상당히 퍼져 있다. 이상우 전 한림대 총장은 “주체사상은 유일신적 종교와 맥을 같이하므로 북한은 엄격한 신정(神政)체제”라고 했다. 종교학자 신은희 교수는 “주체사상은 1990년대 이후 북한 주민을 버티게 한 영적(靈的) 힘”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미국 종교전문 사이트 애드히런츠닷컴(www.adherents.com)은 북한의 주체사상(Juche)을 “추종자들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고 다른 종교들을 배척한다는 점에서 사회학적으로 틀림없는 종교”라고 단정했다. 닷컴 측은 ‘신도 수로 본 세계 주요종교’ 현황에서 주체사상을 10위로 표시했다. 신도수가 1900만이므로 기독교·이슬람·힌두교·불교 등 세계 4대 종교와 원시토착종교와 애니미즘 같은 비(非)제도 종교를 제외하면 시크교(2300만) 다음으로 높은 순위다. 유대교(1400만), 바하이교(700만), 자이나교(420만), 신도(神道·400만), 조로아스터교(260만) 같은 유명 종교들보다 신도가 많다(『연합뉴스』, 2007년 5월 8일자).
이에 대해 탈북자 김영준(가명) 씨는 “북한의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사람이 요새는 거의 없다”면서 “식량난 이후 김정일이나 주체사상에 대해 민심이 크게 돌아선 것을 반영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주체사상이 구교(舊敎)라면 선군사상은 신흥종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북한의 현실을 비꼬기도 했다(『연합뉴스』, 2007년 5월 8일자). 하지만, 종교학적으로나 현실상황적으로나 주체사상이 북한을 거대한 종교집단으로 만드는 기본 골격이라 하여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종교집단이 스스로 붕괴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북한전체가 김일성을 교주로 하는 하나의 종교국가로 되었다고 본다면 이러한 종교성의 요인들은 북한이 쉽게 붕괴되지 않는 원인으로도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