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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일 오후 2시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272회 학술발표회에서 연세대 서정민 교수가 발제하고 있다 ⓒ베리타스 |
이명박 정부가 달고 나온 ‘친 기독교 정부’라는 꼬리표는 오히려 대중들 사이에 ‘반 기독교 정서’를 환기시킨 계기가 된 듯 하다. 이런 현상에 결정적 역할을 한 보수 기독교 세력에 대해 연세대 서정민 교수는 “이들 중 다수는 한국현대사에서 그것이 군부독재정권의 경우라고 해도 친 정권적인 성향을 보이는 특성이 강했고, 철저히 자본주의 경향과 연결되어 ‘정경교유착’을 보여온 것이 사실”이라며 한국신학에서부터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7일 새문안교회에서 개최된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272회 학술발표회’에서 서 교수는 ‘한국기독교의 현상(現狀)에 대한 역사적 검토’라는 제목으로 발제하며, 한국신학이 시대의 흐름을 더 이상 뒤쫓기만 할 것이 아니라 ‘예언성’을 회복하여 시대를 주도해 나가기를 요청했다.
그는 기독교의 사회참여 양상을 기준으로 188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한국 근현대사를 총 7시기로 나누며, 특히 1961년-1990년을 주목했다. 이 시기를 ‘소수 진보적 민중신학파의 정치적 저항과 다수 보수적 복음주의파의 정교유착(政敎癒着), 경교유착(經敎癒着)의 기독교시대’라고 이름 붙이며, 진보 기독교세력의 주도로 박정희 정권의 ‘삼선개헌’에 대한 반대투쟁이 일어난 일 등을 ‘예언자적 활동’이라고 명명했다.
“한국기독교 소수의 진보적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전면적인 정치, 사회적 참여와 반대운동을 전개한 것은 1969년 박정희 정권이 집권연장을 위해 무리하게 진행한 ‘삼선개헌’에 대한 반대투쟁부터이다…(중략)…그 후에도 이른바 ‘10•26 사태’를 통한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같은 해 ‘12•12 신 군부 쿠데타’, 1980년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이어 지속적으로 전개된 전두환 정권 하에서의 ‘반정부, 민주화 운동’, 그리고 마침내 1987년 ‘6•10 대회’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도출해내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한국기독교 소수, 진보세력의 사회참여운동은 치열하게 지속되었다.”
특히 그는 이 시기의 보수 기독교에 대해서는 ‘양적 성장에 매진하였다’고 말하며, 기독교가 신도 수 늘리기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사회변혁의 주체로서 나서야 함을 역설했다. 또 변혁을 주도했던 세력에 ‘소수’라는 수식어를 붙임으로, ‘창조적 소수’만으로도 가능한 변혁임을 역설했다.
1961년-1990년이 주목되는 또 한가지 이유는, 이 시기 진보 기독교세력의 활동이 ‘민중신학’이라는 하나의 신학적 체계를 창출했기 때문이다. 서 교수는 “이는 한국기독교가 신학적으로 세계기독교에 기여한 한 측면이 되며, 세계적인 신학들인 남미의 ‘해방신학’, 북미의 ‘흑인신학’ 혹은 ‘여성신학’, 그리고 일본의 ‘브라크신학’ 등과 패러다임을 함께 하는 신학적 ‘예언성’을 발휘하였다”고 평가했다.
왜 ‘신학’이 예언성을 지녀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그는, 신학이 학문으로서 ‘객관적’인 위치에 놓여있음을 말했다. “한국기독교와 한국사회의 관계에 대해 일정한 입장을 객관적으로 견지하며, 그 장단점의 문제를 ‘예언자’적으로 지적하고 통찰해야 할 입장에 있어야 하는 것이 신학이어야 함은 분명하다”며, 지나친 양적 교회성장주의와 물량적 계량에 빠져 있는 한국교회가 신학의 예언성 회복을 통해 안팎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