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출석하면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가정생활도 모범적으로 해야 하는게 정상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은 가정생활을 이웃들에게 모범이 되지 못하게 영위하는 경우가 많아서 믿지 않는 이웃들에게 당혹감을 주기도 하는데요. 이름 뿐인 기독교인이 비기독교인 보다 못한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본 글은 칼럼니스트 에릭 메탁사스(Eric Metaxas)의 최근 칼럼 전문을 번역한 내용입니다. [편집자 주]
당신이나 당신 가족에게 '무종교'보다 더 나쁜 것이 딱 한 가지 있다. 명목상 종교인인 경우다.
에스겔 5장에서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사악해지고 우상숭배를 자행할 뿐만 아니라 바알을 숭배하는 이웃의 이방민족들에게마저 당혹스러운 존재가 된 것에 대해서 애곡한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도 비슷하게 당혹스러운 일을 유발한다. 결혼과 가정의 문제에 관한 한, 국가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국가보다도 더 열악한 경우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기독교인들이다.
첫째, 몇 가지 배경이 있다. <교회조사센터>에 따르면, 2015년에 미국의 결혼율이 1천명 당 6.74명으로 전례 없이 최저로 떨어진데다 앞으로 더 떨어질 전망이다. 이것은 아이들에게 나쁜 소식이다. 왜냐하면 홀부모 가정이나 결혼하지 않은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전국결혼사업협회>의 브래드포드 윌콕스(W. Bradford Wilcox) 이사는 "결혼이 아이들에게 정서적 안정과 안전감을 각자에게 맞게 제공하는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사회과학자들은 결혼감소의 이유에 대해서 수년간 논의를 이어오고 있다. 많은 학자들이 노동계층의 직업이 줄어들면서 근로자들이 아내를 찾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는 현실을 지적한다. 다른 일부의 학자들은 가족구조를 훼손해온 복지정책의 변화에 주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윌콕스와 유타대 가족소비자학과의 니콜라스 월핑거(Nicholas H. Wolfinger) 교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거론한다. 모성성에 대한 문화적 태도에 있어서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표현적 개인주의, 성과 결혼과 부모의식 사이의 상관관계의 약화, 성인이 되며 성적 친밀감을 유지하게 하는 토대로서의 결혼보다 더 중요한 인생사가 있다는 견해 등, 이 모든 것이 결혼감소의 요인으로 작용해왔다.
정말 흥미로운 지점은 여기다. 윌콕스와 월핑거는 로버트 퍼트남(Robert Putnam)의 『혼자서 볼링치기』를 인용하면서 "많은 형태의 세속적, 종교적 시민활동, 즉, 우애결사단체의 회원으로 활동하는 것으로부터 교회출석에 이르기까지의 활동들이 1960년대 이래로 감소해왔다. 시민활동기구들은 전통적으로 미국인들에게 사회적 유대와 도덕적 지침과 재정적 지원과 가족친목을 위한 연결망 등을 제공하면서 결혼규범을 강화하고 가족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그러한 시민활동기구가 역사적으로 가족의 근간이 되었던가?
"종교행사에 참석하는 것과 신앙을 갖는 것 ... 결혼으로부터 물러나 있는 것은 미국 시민사회의 활동, 특히, 종교행사에 참석하는 일로부터 물러나 있는 것과 동반해서 가속화되었다"
사회관련조사를 연구해보면, 지난 40년 이상 동안 교회출석의 빈도수(한 달에 여러 번 가는 경우가 해당됨)가 37퍼센트에서 26퍼센트로 감소했다. 그리고 여기에 충격을 더하는 요인이 하나 더 있다: 무늬뿐인 기독교(교회에 헌신하지 않으면서 기독교 신앙을 표방하는)가 실제로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
한 조사에 따르면,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지 않으면서 보수적인 신앙을 고수하는 것은 가족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정기적으로 출석하면서 신앙을 고수하는 것은 가족상황을 개선시킨다. 이름뿐인 침례교도가 많은 알칸사스 주에 홀부모가 많은 것과 활동적인 몰몬교도들이 많은 유타 주에 홀부모가 적은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출석이 우리의 결혼생활을 향상시키며 우리 자식들을 예의바르게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에 교회에 출석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분의 성체를 나눌 수 있기 때문에 교회에 간다. 경험적으로 볼 때, 신앙인들이 지역교회공동체에 결속되어 있으면 가족생활과 그 안정성에 매우 큰 도움을 받게 된다.
에스겔 시대의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오늘날 이름뿐인 신앙인들은 그들의 믿지 않는 이웃들의 삶의 원칙에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 당시처럼 지금도 그것은 당혹스러운 일이자 비극적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