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 김영주)는 오는 4월16일(토)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아 10일(일)을 ‘세월호 기억주일'로 지켜줄 것을 당부했다. 이에 NCCK는 ‘세월호 기억주일' 예배시 사용할 설교문을 마련했다.
이 가운데 새맘교회 박득훈 목사는 "누가 애도를 끝내라 하는가?"란 제목의 설교에서 "2년 전 애도의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고 권면했다. 아래는 박득훈 목사 설교 전문이다. 편집자 주]
얼마 전 저희 교회에 상(喪)이 있었습니다. 한 교우의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신 겁니다. 군산까지 내려갔습니다. 그 때 잠시 고민했습니다. 장례식장에 노란리본을 달고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괜히 상을 당한 유족들이 불편해하면 하면 어떻게 하나. 요즘은 이렇게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이 쓰이곤 합니다. 아직도 세월호야? 해도 너무하네! 자기들만 힘든가? 그 정도 진상이 밝혀지고 보상받았으면 됐지! 국민생각, 나라생각도 좀 해야지! 이런 말들이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유족이 아닌 제 삼자인 저도 힘든데 유족들은 얼마나 힘이 들까, 생각이 듭니다. 2년이란 세월의 풍화작용이 실로 무섭습니다. 2년 전, 세월호참사의 진실을 반드시 밝혀 안전한 사회를 꼭 만들어가겠다던 우리들의 굳은 각오와 결의가 많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여기엔 집요하게 진실규명노력을 방해해온 지배세력의 사악한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할 것입니다. 그들은 진실을 어둔 바다 속에 감추어두기 위해 온갖 수단을 총동원했습니다. 정치적 수사, 악어의 눈물, 왜곡된 언론플레이, 수박 겉핥기 내지는 꼬리자르기식 수사와 재판, 수사과 기소권 없는 특별조사위원회 허용과 비정상적 운영, 폭력적인 공권력 동원 등 말입니다. 실로 무서운 연합세력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세월호참사 2주기를 맞이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그런 질문을 갖고 오늘 본문을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마치 이렇게 외치시는 것 같았습니다.
"누가 애도를 끝내라 하는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매우 잘못된 방식으로 "주님의 만찬"을 먹는 고린도교회를 엄중하게 책망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죽임 당하심을 참되게 기억하는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기억은 그저 건성이요 형식일 뿐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모습에서 세월호유족들의 고통과 슬픔에서 멀어져 애도를 끝내고 싶어 하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봅니다. 오늘 저는 본문 말씀을 통해 "누가 애도를 끝내라 하는가," 아프게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함께 들을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하여 참된 주의 만찬을 회복하는 한국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참되게 기억하고 선포해야한다
바울은 26절에서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이 말씀에서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여 함께 빵을 먹고 잔을 마시는 행위에 어떤 신앙적 의미가 담겨 있는지 밝혀줍니다. 그건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셨다는 역사의 진실과 그 의의를 공적으로 알리되,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꾸준히 반복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바울은 새삼스럽게 이 뜻을 고린도교회에 상기시켜주는 것일까요?
그들은 이 뜻을 무색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형식적으론 주님의 만찬을 먹었지만 내용상으론 주님의 만찬을 먹은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한 자리에 모여 먹을 때, 상대적으로 부한 자들이 철저히 이기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다른 사람의 처지를 전혀 배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가져온 음식을 자기 거라 생각하고 자기가 다 먹어버리거나 아주 조금만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 결과 어떤 사람은 배가 고픈데 어떤 사람은 술에 취했습니다. 가난해서 음식을 제대로 마련해오지 못한 사람은 먹을 게 별로 없었던 거죠. 반면 상대적으로 부한 사람들은 먹고 마실 게 풍부한 나머지 술에 취할 정도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엄중하게 묻습니다. "그럴 바에는 각자 자기 집에서 먹을 노릇이지 왜 교회까지 음식을 들고 와서 먹느냐?",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거냐?" 바울의 책망은 부자들에게 집중됩니다.
바울은 이런 식으로 주님의 만찬을 먹는다면 그건 전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라고 못 박아 말합니다. 주님의 만찬을 먹는다는 건,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는 것인데, 그들은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런 걸까요? 주님이 왜 그리고 어떻게 죽으셨는가를 깊이 성찰하면 그 답이 분명해집니다. 주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철저히 가난한 자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건만 마구간에서 태어나 보자기에 싸여 말밥통에 누이셨지요. 3년 여간 온 몸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동안 머리 둘 곳도 없이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대부분 갈릴리 출신의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제자로 삼아 그들과 동거 동락하셨습니다. 동시대에 종교적으로 멸시당하고 사회경제적으로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각종 질병을 고쳐주시고, 먹을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셔서 "하나님나라는 가난한 사람들 편"이라는 복음을 온 몸으로 전해주셨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지배연합세력을 엄중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안식일 법을 지배수단으로 삼아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아 억압하는 지배세력을 향해 분노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막 2:27)"고 외치셨지요. 그런가하면 지배세력의 탐욕과 거짓 그리고 야만으로 가득 차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강력히 저항하셨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착취수단으로 전락된 제사용 짐승들을 성전에서 내쫓고 환전상의 돈을 쏟아버리고 상을 엎어버리셨습니다(요 2:13-14). 저항의 목소리를 드높이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요 2:16)",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눅 19:46, 사 56:7, 렘 7:11)
예수님은 지배세력에 너무나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대중들이 그를 따르게 되면 세상이 뒤집어 질 거라는 게 불본 듯 뻔했습니다. 지배세력은 작당하여 심지어 로마총독 빌라도까지 압박하여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몰아 십자가에 처형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죽으심의 역사적 진실입니다.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만찬은 이러한 예수님의 죽임 당하심을 기억하고 선포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고전 11:24-25). 주님의 몸과 피는 주님의 죽임 당하심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빵을 먹을 때, 주님의 잔을 마실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죽임 당하심을 기억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건 주님께서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셔서 그들을 위해 지배세력에 저항하다 죽임 당하셨다는 걸 기억하고 선포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주님의 만찬을 먹는다며 자기 배만 불리고 가난한 사람을 배고프게 내버려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건 얼마나 무서운 범죄행위인지 모릅니다. 바울은 그런 죄 때문에 몸이 약해진 사람, 병든 사람이 많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적지 않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는 궁극적 심판을 면하게 하시려는 징계입니다. 하지만 그 징계의 엄중함을 통해서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고 멸시하는 게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죽임 당하심을 참되게 기억하고 선포하는 길을 결코 잃어선 안 됩니다. 슬프게도 그 길을 잃었다면 즉각 다시 찾아야 합니다. 그건 가난한 사람들과 다시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과 슬픔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우는 것이요 나의 것을 그들과 기꺼이 나누는 것입니다. 내 것은 내 것이니 내 마음대로 처리할 자유가 있다는 세상의 탐욕과 거짓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세월호 유족들의 애도에 다시 동참해야 한다.
이는 세월호참사 2주기를 맞이하는 한국교회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2년 전의 애도를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진실규명이 되지 않아 애도를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세월호참사 유족의 억울함, 슬픔 그리고 고통에 다시 동참하는 것입 니다. 그들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자녀는 비행기 타고 해외로 수학여행을 간 것이 아니라 낡은 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당시 한기총 부회장으로 있던 한 목사로부터 치욕적인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
그뿐 아닙니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조차 박탈당해 왔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대통령직을 비롯해 모든 국가 권력은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위해 사용하라고 국민이 위임해준 것입니다. 국가권력은 종이고 국민이 주인입니다. 그러나 세월호유족과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고자하는 국민들은 주인대접을 받지 못해왔습니다. 세월호침몰과 구조실패에는 국정원을 비롯해 다양한 국가권력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국가권력은 진실규명과정에 어떤 영향도 미쳐서는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국가권력은 집요하게 진실규명과정의 독립성을 방해해왔습니다. 국가권력이 판단한 진실이 진실이니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우겨왔습니다.
국민의 여론에 밀려 수사권·기소권조차 없는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를 마지못해 허용했습니다. 그나마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방해했습니다. 청문회장소로 국회를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정부여당은 자신들의 약속을 저버리고 특조위가 요청한 특검조차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철저한 진실규명과 그에 따른 책임자 처벌, 안전한 사회건설을 위한 대책마련은 세월호유족들의 최소한의 권리입니다. 그 권리가 짓밟힌다면 그들은 정치적으로 매우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도 매우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앞서 모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미움 받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요 15:18). 예수님은 세상의 탐욕, 야만 그리고 거짓에 맞섰습니다(요 8:44). 그러니 세상이 어찌 예수님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월호유족들은 예수님의 길을 따라 세상에 맞서 왔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어찌 그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그들은 눈에 가시 같은 존재들이니까요. 갈수록 세월호유족들의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습니다. 더욱 외로워지고 있습니다. 의지할 분이라곤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조차 원망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기존의 그리스도인들 중에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신음하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억장이 무너집니다. 어떤 분은 "이젠 ‘하나님이 당신을 지켜주실 겁니다'라는 말을 도저히 할 수 없다"면서 눈물을 주르륵 흘리더군요. 아, 이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애도는 주님 다시 오는 날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세월호 2주기는 우리 교회들에게 결단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세월호유족들의 애도에 다시 함께 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만찬을 통해 오늘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누가 애도를 끝내라고 하느냐?" 세월호유족들이 이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로 이렇게 아파하고 있는데, 어떻게 애도를 멈출 수 있겠습니까? 애도를 멈추고 어떻게 감히 주님의 만찬에 계속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면서 주님의 죽임 당하심을 기억하고 그 역사의 진실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애도는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멈출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은 주님 오실 때까지 항상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함께 애도하는 자들에게 하늘의 놀라운 위로가 언제나 함께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