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I. 칭의는 종말론적 유보라기보다는 종말론적 완성을 요구한다
구원받은 자, 곧,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자는 의의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열매의 많고 적음에 따라 하나님의 법정적·선언적 판결이 취소되거나 번복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필자에 의하면 칭의는 김세윤 교수가 피력하는 바 같이 "종말론적 유보"라기보다는 종말론적 완성의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 칭의는 우리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처음 믿을 때 받은 칭의는 성화 과정에서 자칫 죄를 범하더라도 신분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로 씻음을 받고 견지된다. 다윗은 중죄를 범했으나 회개하고 용서받고 칭의를 유지했다. 베드로도 예수를 부인했으나 회개하고 용서 받고 칭의를 유지했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 안에서 처음 믿을 때 받은 칭의는 완성, 재확인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은 알파고(Alpha-Go)처럼 기계적으로 조작된 인간이 아니라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인격적인 존재인 신자가 하나님의 인격적인 현존 앞에 끊임없는 감사와 은혜 누림과 회개와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가운데 이루어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칭의의 열매로서의 선한 행실을 말했고, 칼빈도 성화를 "지속적 칭의"로서 강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인 성경은 여러 곳에서 칭의의 상실 가능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진지하게 받아야 한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6:4-6).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벧전4:17-18).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학자 김세윤 교수의 종말론적 유보론 주장의 동기를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총신대 신약학 고 정훈택 교수, 숭실대 신약학 권연경 교수도 신자의 행위를 최종적인 칭의의 필수적인 요소로 본다.
1.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의 공헌과 문제점
1) 공헌
(1) 칭의가 가진 영적 하나님의 통치 차원 드러냄: 주권의 이전
김세윤 교수는 말한다: "요약컨대, 하나님의 통치권을 가지고 사단의 세력을 멸망시키시고 하나님의 모든 피조세계를 구속하도록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된 메시야 예수는, 속죄제사로써의 죽음과 최후의 심판에서의 중보로 죄와 죽음의 권세를 꺾음으로써 그의 사명을 완성하신다." "그러므로 메시야 예수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롬1:3-4)과 우리의 칭의의 복음(롬1:16-17)은 하나이자 같은 것"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은 피조물인 우리가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통치를 받는 관계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주권의 이전(移轉)'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의지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그의 지적은 종교개혁적 의미에서 칭의론을 단순한 윤리적 변화 아닌 영적 하나님의 통치의 차원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2) 정통교리가 가진 구원론적 안일성을 잘 지적하고 있다
김 교수는 종교개혁적 칭의론이 "칭의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처음 고백할 때 다 이뤄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최후의 심판에서 그저 확인되는 것은 아니"라며 '의로운 삶의 열매가 없는 칭의론'에 대해 경계했다(김은애, "김세윤 교수, '칭의'의 온전한 수확은 종말에 유보돼 있다," 크리스천투데이, 2015.10.17). 김세윤은 오늘날 대부분은 '칭의'를 세례 때 받고 끝나는 것이나 법정적 개념으로만 해석해 '선언'에서 끝나는 것으로 이해해서 한번 구원받으면 무슨 죄를 범해도 구원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전통적 칭의론의 안일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김 교수는 칭의론의 종말론적 유보를 말하고 있다. 종말론적 유보론은 한편으로는 칭의의 법정적이고 일회적인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도외시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적 칭의론은 종말론적 유보를 논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칭의 교리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적 심판에서 우리의 행위에 대하여 계산하고자 하시는 감추어진 하나님(deus absconditus)에 대하여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신약의 여러 구절이 언급하고 있는 종말론적 유보에 대해서 진지하게 문을 열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3) 유보적 칭의론은 종말론적 지평을 노정시킨다
김 교수는 말한다: "칭의는 지금까지의 죄에 대한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의인'이 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진입한 자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최후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완성될 때까지, 계속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서 있어야 함을 포함한다"(김은애, 크리스천투데이, 2015.10.17). 믿는 자로서의 첫 열매를 받은 것이지만, 그 온전한 수확은 종말에 유보돼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예수 믿는 기독인이라도 윤리와 순종이라는 기본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구원 받은 신자들이 항상 경성하고 깨어 있어 다가오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 앞에서 자신을 성찰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종말론적 유보론은 안일한 신앙에서 신자들이 구원은 이미 받아놓은 양 율법을 무시하고 사는 보편구원론 신자뿐만 아니라 정통주의 지도자들과 안일한 신자들에게 도전이 된다. 오늘날 예수 믿고 세례 받은 것, 교회출석하고 십일조 내는 것으로 천국행 티켓을 받아 놓은 것으로 생각하고 세례 받은 것에 적합한 삶,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 신자들의 삶에 대하여는 이러한 종말론적 심판의 경고론은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자들은 진정한 칭의를 받았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2) 문제점
(1) 종말론적 유보 개념은 오해소지가 있다
김 교수는 말한다: "칭의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처음 고백할 때 다 이뤄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최후의 심판에서 그저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의로운 삶의 열매가 없는 칭의론'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 "'칭의'는 '이미 이루어짐-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음'의 구조 속에 있는 것으로서 믿는 자로서의 첫 열매를 받은 것이지만, 그것의 온전한 수확은 종말에 유보돼 있는 것[이다.] 칭의는 사단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통치로 회복되는 것이고, 그것은 최후의 심판 때 완성되는 것(종말론적 유보)"이다(김은애, 크리스천투데이, 2015.10.17).
이러한 칭의의 "종말론적 유보"라는 용어는 종교개혁 전통에 의하면 칭의에 법정적으로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義)가 나의 행위에 의해서 종말에 가서는 흔들릴 수 있다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종교개혁의 전통에서는 진정한 신자들에게 종말론적 심판이란 종말론적 유보라고 하기 보다는 종말론적 완성이라고 말한다. 종말 심판 때의 구원은 처음 믿을 때 이미 얻은 칭의가 성화를 통하여 내용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며 종말 때 완성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 얻은 칭의의 의는 나의 행위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종말의 심판 때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존엄한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행위는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최종의 심판 때 어느 누구나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 앞에 견딜 수 없다. 이때 우리의 벌거벗은 몸을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입혀주신다. 그래서 루터는 심판의 날에 우리의 모든 행위를 심판하시는 숨어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계시하시는 하나님(deus revelatus)으로 도피한다고 말했다.
(2) 칭의와 성화는 병행체가 아니라 성화가 칭의의 결실인 관계이다
김 교수는 바울에게 있어 칭의는 '성화'에 선행하는 개념이 아니라고 본다. 그는 "바울은 성화를 칭의와 병행어로 썼다"면서 "인간을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인'의 관점으로 보면 칭의가 되는 것이고, '오염된 세상 속에서 더렵혀진 존재'라는 관점으로 보면 성화가 되는 것"이라며 "그러므로 성화도 '이미'와 '아직'의 구조 속에 있다"(김진영, "김세윤 교수, 칭의는 '성화'와 병행어이자 윤리와 통합체," 크리스천투데이, 2016.04.18)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칭의와 성화를 병행체로 보아 양자의 대등관계를 말하나 성화는 칭의의 결실이다. 칭의와 성화는 분리될 수 없으나 성화에서 칭의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칭의에서 성화가 나오기 때문이다. 칭의는 나의 의로운 행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온다. 칭의에 의하여 옛 사람은 새 사람이 되고 그 성품이 바뀌고 성화를 향한 존재가 된다. 그리하여 새 사람은 윤리적으로 성화된 존재가 된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전통에 의하면 칭의는 성화의 과정에서 다시 확인되는 것이지 칭의가 증가되는 것이 아니며, 최종 심판에서도 칭의가 새롭게 최종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화 과정에서 확인된 칭의가 성취되며 재확인되는 것이다. 종말의 심판 때에 주어지는 칭의는 처음 믿을 때 전가된 예수 그리스도의 의다. 나의 의가 의가 아니라 믿을 때 받은 그리스도의 의이다.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행위의 의는 그리스도의 의 안에 감추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처럼 최종의 심판을 항상 직면하면서 나의 모든 행위의 의(교회의 직분, 세례 받음, 헌금 액수, 신앙 년조, 나의 선행, 교회 봉사 실적, 나의 사회적 직위 등)를 의지하는 안일한 신앙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의만을 의지하는 종말론적 신앙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종말론적 신앙을 가진 자는 반드시 칭의에 상응하는 성화의 열매를 맺는다. 니고데모는 경건한 종교인이었으나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 진정한 중생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게 되었다.
(3) 칭의와 성화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이 명료하지 않다
칭의는 믿음에서 오고 이 믿음은 성령의 역사에서 비롯되며, 성화 역시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데 이것 역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김 교수의 문장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라는 말은 나오나 성령의 숨어 계시는 역사는 언급되고 있지 않아 보인다. "칭의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순종'으로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그의 문장에 성령의 역사가 전제되고 있다고 본다. 성령의 역사가 그의 칭의론에 명료히 부각되었으면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