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박일준 박사를 만났습니다. 활발한 연구 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는 현대 신학의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지점에서 학계의 주요 논의를 한국적 상황과 맥락에 맞게 소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요. 요즘 그의 주된 관심사인 '트랜스 휴머니즘'을 놓고 이야기 꽃을 피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에 따르면, 트랜스 휴머니즘이 그저 단순한 용어가 아니라 근대 주체 이론을 비판하는 철학적 개념이었는데요. 박일준 박사가 전해주는 트랜스 휴머니즘의 이야기는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아주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먼저 박일준 박사에게 트랜스 휴머니즘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들어보았습니다. [편집자 주] - 대담자 박일준 박사(감신대, 조직신학), 장효진 객원기자(연세대 종교철학 박사과정생)
Q: 박사님은 신학계 일선에서 학문적 연구와 강의뿐만 아니라 실천적 활동들로도 매우 바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독자들에게 최근 근황을 말씀해주십시오.
박: 우선 연구재단에서 진행하는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 중에 있습니다. 특히 작년부터 한미 협력 사업으로 '토착화 신학의 관점에서 자연과 종교에 대한 이해' 문제를 연구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지난 4월에 미국 학회에 참석을 하기도 했구요. 연구 외에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술지 작업 등으로 분주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구와 카레'라는 이름의 연구자들 모임이 있어요. 대학의 종말 시대 우리 모임의 연구자들은 새로운 시민 강좌를 열기도 하고 다양한 글쓰기, 책 출간 등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Q: 대학 종말의 시대에 관해 부연 설명을 한다면?
박: 2-3년 전 연세신문에 연세대 졸업 후 취업한 학생들의 과반수가 비정규직이라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어요. 최근에는 서울대도 취업박람회를 개최한다고 하는데 그건 서울대 학생들도 취업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잘 안되면 대학을 올 이유가 하나 더 없어지는 것이지요. 이로 인해 학생 수는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고요. 이미 취업이 안 되는 인문대학은 학생 수 감소가 현실이 되어버렸지요. 이런 와중에 대학에 적을 둘 수 없는 대다수의 학자들은 소통의 공간으로 시민강좌를 열고 있는 것이고요.
Q: 인문학 시민 강좌도 수강생들이 그리 많지는 않아요.
박: 그렇지요. 그래서 시민 강좌도 강사들의 유명세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해요. 또 꼭 다수의 시민 강좌가 인문학의 질적 발전을 보증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일단 많은 학자들이 시민강좌들을 통해서 대학의 울타리를 벗어났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철학이 대학 강단을 벗어나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춰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처음 시민강좌를 여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제가 보기에 2-3명의 수강생들부터 시작하지요. 그래서 처음의 수강생을 놓치지 않고 10명 20으로 수강생 수를 늘려 가곤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경제적 수입의 측면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시민강좌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더욱 풍요로운 삶의 의미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시민강좌를 성장시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학자들 개인의 역량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Q: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이 질문에 꼬리를 하나만 물어 질문하자면 박사님의 말씀이 자본주의의 논리로 들리기도 합니다. 역량 있는 학자들만 살아남을 수 있고 그것이 당연하다는 뉘앙스가 있는 것 같은데요.
박: 자본주의일 수도 있고, 진화론일 수도 있지요.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내용들은 대중의 판단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한 면에서 학자들도 살아남으려고 노력해야 하고요. 시민강좌를 여는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관점에 서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물론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기에 현실적 문제들이 있기는 하지만요.
Q: 진화론을 말씀하시니깐 우리의 주제인 트랜스 휴머니즘을 이야기하기 더 쉬워진 것 같습니다. 신학과 종교철학을 공부하고 있는 후배의 입장에서 박일준 박사님은 트랜스 휴머니즘이라는 개념을 대표하는 학자로 생각되는데 그러한 평판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박: 사실 그런 평가는 그동안 신학계가 이 개념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한 학자의 사상만 깊숙이 연구하거나 그 추종자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좋아하지만 화이트헤드주의자는 아닙니다. 그저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우리 현실에 맞게 읽어내려 노력하고 있지요. 화이트헤드 전문가들은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서구 개인주의를 토대로 한 관계론 철학으로 소개합니다. 이러한 관계론은 모든 관계의 기반에 개인의 이기심이 놓여 있음을 전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관계론은 각 개인을 더욱 평등하게 세워줄 수 없습니다. 대학에서 교수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그러한 관계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그러한 관계론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화이트헤드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그의 사상이 결국은 사물철학이라는 것입니다. 화이트헤드의 사물철학은 서구의 휴머니즘을 넘어섭니다. 이렇게 서구의 휴머니즘을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트랜스 휴머니즘, 혹은 포스트 휴머니즘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철학적 사조와 연결되지 않은 기존의 트랜스 휴머니즘은 조롱조로 길가메쉬 프로젝트(영생하기 프로젝트)라고 불려지기도 하지요. 하지만 현대에는 이러한 사물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트랜스 휴머니즘의 연구가 활발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트랜스 휴머니즘이 신학계에는 아주 큰 도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신학 이론들이 사물철학에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트랜스 휴머니즘 사상과 신학을 조우시키기 위해서는 부분들의 수정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서구 중심의 신학이 완전히 바뀌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트랜스 휴머니즘은 신학계에 아주 큰 도전이 될 수도 있지요.
Q: 화이트헤드 철학이 바탕에 놓인 트랜스 휴머니즘 철학은 아직 독자들에게는 낯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독자들께 조금 더 알기 쉽게 트랜스 휴머니즘을 소개해 주신다면?
박: '트랜스'는 횡단한다와 초월한다는 의미가 있는데 따라서 트랜스 휴머니즘은 휴머니즘을 횡단하거나 초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뒷말이 휴머니즘이라는 것입니다. 포스트 휴머니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탈-휴머니즘입니다. 근대 주체를 넘어선다는 것이 트랜스 휴머니즘의 철학적 의미입니다. 지금 우리가 트랜스 휴머니즘을 살아가고 있다는 간단한 증거가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지요. 일정도 그렇고요. 이것은 이미 핸드폰이라는 사물과 인간이 연계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핸드폰만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네트워크로 서로 연계되어 있습니다. 페이스북이 잘 보여주지요. 이미 우리는 여러 네트워크에 접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근대 주체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화이트헤드의 '단순정위 오류'라는 개념이 있어요. 이 개념을 통해 화이트헤드는 이미 오래 전에 어떤 사물이나 존재는 한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 동시에 다중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기존의 서구 사상은 한 곳에 한 사물이 위치한다는 신념하에 개인윤리를 발전시켰습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이 경계가 느슨해지고 애매해지고 중첩되어진 것이지요.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삶은 이미 트랜스 휴머니즘의 세계에 진입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트랜스 휴머니즘의 세계를 정말 잘 보여주는 것은 인공지능인데 이 새로운 사회에서 우리는 새로운 문제들에 직면했습니다. 가령 주식시장에서 인공지능이 벌어들인 수입에 소득세는 누구에게 부과해야하는 것인지, 혹은 자동화된 자동차가 사고를 냈다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 것인지 등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상상 속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대 주체사상을 가능하게 했던 개신교 신학이 인위적으로가 아니라 그냥 이렇게 바뀌어 버린 현실을 잘 못 쫓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Q: 휴머니즘을 넘어서는 것이 트랜스 휴머니즘, 혹은 사물철학이라면 트랜스 휴머니즘이 말하는 인간은 무엇입니까?
박: 그 대답은 아마 없을 것 같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쩌면 "인간이란 없다"가 대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대답은 인간이 실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이 하나의 개념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자주 이 사실을 잊곤 합니다. 자크 데리다가 'Margins of Philosophy'에서 헤겔과 후설, 하이데거의 휴머니즘 비판에 선구적 역할을 하는 것이 페미니즘과 제국에 맞섰던 민족주의 운동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 상관없을 것 같은 비판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질문이 바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입니다. 즉 제국주의의 인간 개념에서는 흑인 노예들이 포함되지 않았고, 기존 남성중심 사회에서는 여성이 인간의 개념에 포함되지 않았지요. 그래서 민족주의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은 그 인간의 개념을 넓히자는 운동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언제까지나 휴머니즘의 논의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더 이상 인간 개념 자체가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주체나 자아는 고정되어 단순정위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네트워크의 패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시대에서는 근대 주체로서의 인간 개념을 대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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