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29 "종교관계 주장의 근거는 인간"

정재현의 신앙성찰

제3부 종교에서 인간으로!

1. 다름과의 만남, 우상파괴를 위하여: 파니카(1)

jungjaehyun
(Photo : ⓒ베리타스 DB)
▲정재현 연세대 교수(종교철학)

우리는 시작에서 종교에 관한 문제를 살피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을 되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를 토대로 인간이 스스로를 새겨내는 인간관과 세계관으로 엮어지는 시대정신에 따라 종교간 관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아울러 이런 전제로부터 종교간 관계를 엮어내는 마땅한 길을 논하는 논리적 근거와 역사적 배경을 추려낼 수 있었습니다. 근거와 배경에 따라 다양한 주장들이 나타났는데 크게 세 갈래로 추려지는 구체적인 주장들을 담은 논문들을 여러 편 읽었습니다.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로 분류되는 갈래들은 그러한 만큼이나 팽팽한 긴장을 이루었습니다. 배타주의와 포괄주의가 논리적으로 대조적이라면, 배타주의와 다원주의는 현실적으로 가장 큰 대립을 보여줍니다. 그런가하면 포괄주의는 보기 나름으로 배타주의나 다원주의라는 혐의를 받기 쉬운 중간지대에 걸쳐 있는 것임도 확인했습니다. 이처럼 서로 양립불가할 정도로 다르면서 또 걸치기도 하는 입장들은 나름대로 인간관과 세계관의 다양성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만큼이나 각각 타당성을 지니기도 하지만 또한 동시에 문제를 지니기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 입장의 취지와 향방을 살폈거니와 한계에 대한 비판도 곁들이면서 훑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논리적 근거가 점차로 현실에 다가가면서 타당성이 더욱 증가하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다르고 작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져가는 현실은 분명히 해방을 향한 역사의 진전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소박한 역사낙관주의만 경계한다면 세속사를 통해 인간해방을 이루어 가시는 하느님의 섭리로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주장된 서구 그리스도교의 다원주의가 앞선 입장들보다 더욱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미 거듭 비판했듯이 서구 그리스도교에서는 다원성에 대한 진지한 주목에도 불구하고 일원성에 대한 향수가 본능적이기라도 하듯이 줄기차게 깔리거나 집요하게 쏠려 왔고 이로부터 만들어진 함정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그러한 한계를 넘어서고 그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을 길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앞의 논의들과 애써 구별하여 별도로 제3부를 시작하면서 종교관계를 넘어서, 또는 종교의 포장을 벗기고 종교 안으로 들어가서, 좀 더 본격적으로 인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그것이 바로 각 입장의 한계를 넘어서는 길이고 함정을 건너뛰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하면서 논의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배타주의와 포괄주의, 그리고 다원주의는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는 그토록 대립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관통하는 공통 전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특정한 이름을 갖는 종교들이 서로 별개의 것으로 확연하게 구별될 뿐 아니라 분리된다고 간주하는 태도입니다. 말하자면 하나의 이름이 하나의 종교를 가리키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러한 하나의 종교에 속하는 종교인도 전적으로, 혹은 상당한 정도로, 그 종교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말하자면 한 이름의 종교 뿐 아니라 한 이름의 종교인도 하나의 자기동일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입니다. 이런 전제들은 다원주의에서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동일성의 이념은 이토록 집요했었습니다. 다원주의도, 특히 서구 그리스도교에서는,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인양 그토록 줄기차게 동일성을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일성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유구한 세월 동안 동일성이 그렇게 옹립되기는 했었습니다. 심지어 신이어서 동일성인가, 혹은 동일성이어서 신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동일성은 신의 존재와 본질로 모셔져왔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음과 같은 물음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토록 소중하여 옹립되어 왔던 동일성이라면 차라리 이것이 옳은 것이 아닌가요? 혹 문제가 있더라도 이 틀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요? 도대체 동일성에 무엇이 문제인가요?

앞서 이런 문제를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우리 논의의 정점에서 결판을 내야 할 때에 이르렀습니다. 이 일에 도움이 될까 하여 라이문도 파니카(Raimundo Panikkar)의 책 한 권을 읽으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동일성의 문제를 몸으로, 삶으로, 믿음에서 겪어낸 사람으로서 파니카는 주목할 만한 통찰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 자체가 바로 이런 문제를 두고 실험한 것으로 읽혀지기 때문입니다. 실험이라고 하여 작위적이거나 조작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삶을 걸고 하는 씨름이었습니다. 그런 것이었음을 우리는 그의 통찰을 통해서 충분히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가 평생 이 문제를 붙들고서 여러 권의 책을 썼지만 여기서는 『종교간 대화』(The Intra-religious Dialogue)라는 제목의 책을 읽으려고 합니다. 본격적으로 살피기 전에 제목을 음미해봅시다. '종교간 대화,' 어찌 보면 무색무취한 제목 같습니다. 그러나 종교'간'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관계에 본격적으로 초점을 맞추자는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파니카는 다른 종교들과 구별될 수 있는 개별적인 종교들이 일단 각각 '하나의 종교'로서 먼저 존재하고 부차적으로 서로 다른 종교들이 만나 형성하게 되는 관계를 가리키는 종래의 관계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관계 또는 사이로서의 '간'이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하게 하고 또 종교를 엮어낸다는 깊은 통찰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관계는 물론 종교관계도 이러한 차원에서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스위들러도 종교간 대화를 강조하면서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안했지만 이들 둘이서 어떤 것들을 공유하고 어느 지점에서 갈라지는지도 살펴볼만 합니다. 스위들러는 종교들이 여전히 각각 별개로서 우선 존재하고 부차적으로 관계를 가진다는 틀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스위들러에게서는 서구의 실체주의 잔재가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서로 다르니 파니카를 단순히 다원주의, 특히 서구그리스도교를 배경으로 하는 다원주의로부터 별도로 떼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그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파니카는 종교간 관계유형의 몇 가지 입장들에 대한 간략한 비판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앞선 논의와 다소 중복되는 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인문학적 성찰은 내용이 비슷하게 보인다고 하여 같은 이야기라고 두루뭉술하게 도매금으로 매도하는 무식한 용기를 허락할 수는 없기에 폐부를 찌르는 그의 비판을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몇 가지 입장들에 대한 그의 비판이 모두 인간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하고 이를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합시다. 먼저 배타주의에 대한 파니카의 비판은 종교 자체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인간으로 파고 들어가는 예리함을 시작부터 보여줍니다:

우리가 도대체 누구이길래 절대자를 규정한단 말인가? ... 이러한 입장이 타인에 대한 편협, 교만, 경멸이라는 명백한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 이와 같은 주장은 진리를 단순히 논리적인 개념으로 파악해버릴 뿐 아니라 인식론적 천박함을 벗어날 수 없다는 내적인 약점도 지니고 있다. ... 비록 우리가 신이 어떤 배타적인 하나의 언어로 말씀하신다고 가정할 수는 있지만 사실 모든 것은 그 신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의존하고 있기에 우리의 해석이 유일하게 올바른 해석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결코 알 수 없다. (라이문도 파니카, 『종교간의 대화』, 김승철 옮김 [서광사, 2002], 20; 이하 (파니카, 면수)로 표기)

여기서 핵심은 '인식론적 천박함'일 것입니다. 자고로 인간이 절대자를 규정할 수 있다는 착각, 그리고 그것도 자기의 이해와 해석을 거친 규정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편협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그런 착각이 일어나는 이유는 앎이라는 행위를 인간이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의식을 갖지 못해서 자신의 앎에 바탕을 둔 믿음이 신의 있음 그대로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천박함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다른 생각과 믿음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데까지 나아가니 결국 자기를 절대화하는 폭력적 편협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신의 있음에 대해 인간의 앎이라는 것이 엄연히 작동하고 있다는 주제파악이 결여되어 있으니 자기의 알량한 앎과 믿음을 신의 있음 자체로 둔갑시키게 되고 바로 이 때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명분이 바로 신의 계시였다는 공공연한 비밀을 새삼스레 폭로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서 신의 계시라는 걸림돌을 이용하여 타자를 비난하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것은 위선이 될 뿐이다. 이 때 신적인 계시는 우리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걸림돌도 아니다. (파니카 21)

인간이 신의 계시를 내세워 벌여온 폭력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입니다. 사실 이는 단순히 '위선' 정도에 머무르지 않았었으니 이 정도의 비판은 사실 지나치게 점잖은 것이 아닌가합니다. 신의 계시는 인간의 종교적 욕구를 거슬러 신의 뜻을 따르도록 인도하는 데에 그 의미가 있을 터이나, 자기의 앎을 신의 있음과 동일시해버리는 '인식론적 천박함'은 사실상 자기복제이기 때문에 '신의 계시'가 그에게 전혀 걸림돌이 될 이유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익숙함에 의한 평안을 누리게 될 터인즉 이를 은총으로 새기는 관습은 이미 예정된 수순입니다. 말하자면 타자를 배제하는 배타주의에서는 이처럼 자기복제와 자기확인의 굴레를 맴도니 이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포괄주의에 대해서 파니카는 뭐라고 비판했을까요? 포괄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은 이제 진부해져버렸습니다. 이를 간파한 파니카는 그런 입장을 취하는 인간이 구체적으로 행하는 태도와 자세에 대해 예리하게 비판합니다. 그는 "포괄주의적 입장은 본질적인 내용보다는 실존적이거나 형식적인 성격을 지닌 보편주의자가 되려는 경향을 갖"(파니카 22)기 때문에 바로 그 보편성을 위해서 '마음의 형식'(forma mentis)에 초점을 맞추게 되니 관대함이 두드러져 보인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로 다음과 같은 문제를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입장도 교만이라는 위험성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관점과 관대한 자세를 가질 수 있는 특권이 우리에게만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파니카 22). 절묘한 분석입니다. 너그럽게도 관대를 표방하기는 하는데 그러한 관대가 자기에게서만 가능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관대의 대상이기만 해야 한다는 우월적인 교만을 자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파니카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세밀하게 분석합니다:

만일 우리가 포괄주의 모델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는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 역시 우리 나름대로 이해한 또 하나의 진리일 뿐이다. 왜냐하면 다양한 모든 세계관을 나름대로 배열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쥔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렇게 될 때 우리가 갖고 있는 신념, 개념, 이데올로기, 직관은, 우리가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지 간에, 그것을 형식화하는 바로 그 순간 탁월한 상부체계가 된다. (파니카 23)

자기가 지니고 있는 것이 기준이 되어 우열을 가르고 가늠하니 관대라는 포장 안에 지휘통제권을 거머쥐는 특권의 교만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역시 포괄주의의 주장보다도 이러한 주장을 내세우는 인간에게서 벌어지는 현실에 주목하는 더욱 근본적인 비판이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파니카는 각 종교가 자체적 완결성을 갖고 있어 서로 무관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로 서로를 평가하지 않고 관대하게 서로 존중한다는 '평행주의'(parallelism)에 대해서도 다룹니다. '복수주의'라고도 부르는 '평행주의'는 여러 종교들이 나름대로 개별적 타당성을 가지고 공존한다는 것을 인정하되(이 점에서 평행주의는 배타주의, 포괄주의와 구별됩니다) '대화'의 가치는 없다고 보는 입장입니다(이 점에서 평행주의는 '통일적 다원주의'에 반대합니다). 종교 관계에서 절충주의(eclecticism)나 혼합주의(syncretism)로 빠질 가능성을 우려하면서 태동한 평행주의에 대해서 그는 언뜻 주장하는 대로 따라가면 "우리 자신은 간단히 완전한 인간적-종교적 성숙성을 갖추었다는 달콤한 소리를 듣게 되지만 한편으로 어떤 종류의 개종도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배반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인류 가족을 빈틈없는 칸막이로 나누어버린다"(파니카 24)고 비판합니다. 더욱이 "이 입장은 세계 안의 서로 다른 종교적-인간적 전통이 대개는 서로 교차하며 영향을 미침으로써 더욱 풍성해짐에 따라 출현했다는 역사적인 경험과 어긋난다"(파니카 25)는 비판으로써 평행주의는 현실적으로도 옹호될 수 없다고 평가합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다원주의에 대해서는 옥석을 가리듯 안으로 들어가 구별하고 경계 짓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이 글에서 앞의 2부와 나누어 별도로 3부를 편성하는 이유를 명백하게 드러내 주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파니카는 이 대목에서 아주 단호하게 서구 그리스도교의 일원적 다원주의가 말하는 합의, 보편, 통일성에 대한 기획을 비판합니다. 이런 점에서 맥그래스도 열심히 비판했던 내용을 파니카도 그대로 공유합니다.

종교간의 대화는 상대방을 제압한다든지 서로 완전한 합의에 이르거나 어떤 우주적-보편적 종교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 다원주의는 서로 아무런 관계도 맺고 있지 않은 복수주의와 단일적 통일 모두를 거부한다. 다원주의는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이 현재적인 모습 그대로 인정되어야 하며 나아가 인간의 획일화된 상황이라는 이상을 위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암시하고 있다. (파니카 37)

파니카는 앞의 관계유형을 포함해 평행주의까지를 모두 문제 삼고 이를 넘어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성을 진지하게 주목하는 다원주의를 개진하고자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의, 보편, 통일을 기획하는 서구 그리스도교의 다원주의에 대해서는 어떤 다른 입장에 대해서보다도 더욱 명백하게 거부합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는 앞서 살폈던 복음주의자 맥그래스의 비판과 상당 부분을 공유합니다. 그러나 그는 배타주의로 빠지지 않고 오히려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과 종교를 구성하는 근본적 다양성에 대한 정직한 성찰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한 개체 인간도 무수한 다름의 얽힘이요 한 이름의 종교도 역시 그러하다는 통찰을 엮어내고 이를 토대로 인간관계와 종교관계를 다시 논의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다원주의라는 말에 대한 오염과 오해가 극심한 현실에서 파나카의 입장에 대해서는 이와는 다른 표현을 쓰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입니다. 다원주의라고 하면 그저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는 속어와 같은 것으로 매도해버리는 천박한 곡해가 만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입장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어떤 이름이 보다 적절할까요?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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