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관용," "다양성," "포용성" 등을 문화적 덕목으로 숭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처럼 상대주의적인 개념이 널리 퍼지게 되면 훨씬 더 중요한 가치, 즉, 진리가 무시당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빌라도도 질문했지만, "진리가 무엇인가?"
예수가 진리이다. 아니라면, C.S. 루이스가 말한 대로, 그분은 거짓말쟁이거나 미치광이거나 "지옥의 마귀"이다.
그리스도는 관용적이면서도 불관용적이었다; 완전히 배타적이면서도 전적으로 포용적이었다.
그분은 모호하지 않은 용어로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14:6).
이 말씀을 분석해보자.
<길>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다소 도드라지게 "나나 부처나 모하메드나 가네쉬(힌두교 신)나 L. 론 허바드(사이언톨로지교 창시자) 이외에 아버지께로 나아올 자가 없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점을 주목하라.
완전히 배타적이다.
빌립보서2장10-11절은 우리에게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라고 확신시킨다.
'모든' 무릎이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무신론자, 모든 불가지론자, 모든 회교도, 모든 유대인; 모든 불교신자, 모든 힌두교신자, 모든 사이언톨로지교 신도; 그리고 죽었거나 살았거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이것도 약속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태복음11:28-29).
로마서10장13절은 훨씬 더 직접적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전적으로 포용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분명히 선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와,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구원으로 나아가는 유일무이한 길이다.
<진리>
진리에 관해 핵심적인 요소는 우리가 그것을 믿기로 선택하든 하지 않든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진리를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진리이시다. 그분은 성육신한 진리이시다. 해 아래 모든 만물의 구현체이자 원천이며 그분이 주장한 대로 모든 진리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C.S. 루이스만이 할 수 있는 말처럼, 예수는 자신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든지, 아니면, 거짓말쟁이이거나 미치광이이거나, 혹은, 더 나쁘게는, "지옥의 마귀"이다.
루이스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이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자주 하는 정말 어리석은 말을 누구든 하지 않도록 예방하려고 한다. 그들은 '나는 예수를 위대한 도덕 선생으로는 인정하지만 그분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들 다닌다. 그런 말은 우리가 정말로 하지 말아야 한다. 그저 사람이면서 예수처럼 말하고 다닌다면 그 사람은 위대한 도덕 선생일 수가 없다. 그는 미치광이-자신을 물에 데친 계란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같은-이거나, 아니면 지옥의 마귀일 것이다. 당신은 선택해야만 한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지금도 그러한지, 아니면 광인인지, 혹은, 더 나쁜 경우인지를 말이다. 당신은 그분을 바보로 간주하고 말을 막거나 침을 뱉거나 마귀라며 죽일 수 있다. 아니면, 그분의 발아래 엎드려서 그분을 주님이자 하나님으로 부를 수 있다. 하지만 그럴싸하게 그분을 위대한 선생이라고 부르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하지는 말자. 그분은 우리에게 그렇게 평가될 분이 아니시다. 그럴 의도를 갖고 계시지도 않았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8:32).
<생명>
영생. 이것은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그분 안에서 갖는 영광스러운 소망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3:16).
"이것이 영생이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17: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6:23).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3장36절은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을 보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유한한 우리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모든 인간들, 이제껏 태어난 인간들뿐만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인간들까지도 창조하셨고 사랑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우리 어머니의 자궁 안에 지으셨고 우리의 머리카락도 다 세셨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는 독생자만 계셨다. 우리는 아들이신 그분,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 포도나무에 접 붙여져 입적될 때에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요한복음15:5 참조).
하나님에 의해 입적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다.
사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우리를 양자로 받아주실 것을 요청해야 한다. 우리는 그저 그분을 믿기만 해서는 안 된다. "마귀조차도 그것을 믿기"(야고보서2:19)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을 주님이자 구세주로도 모셔야만 한다. 우리는 참되신 한 분 하나님이신 예수를 우리의 유일한 하나님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1:12).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많다"라는 다원주의적 개념은 거짓의 아비가 퍼뜨린 교활한 거짓말이다.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마태복음7:13)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가 "좁은 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성경은 둘 중의 하나이다: 우리의 일상생활과 상관없는 느슨한 철학과 독창적인 이야기로 가득 찬 고대 문헌이거나, 스스로 언명하고 있듯이 오류가 없으며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인 말씀이다. 이외에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
만일 성경이 전자라면 나는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린도전서15:32).
만일 성경이 후자이고 나의 온 마음과 영혼과 정신과 힘을 다해 그 사실을 믿는다면, 그리스도가 배타적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그분의 명백한 예고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현명한 태도이다.
영원은 대단히 긴 시간이기 때문이다.
기사출처:
http://www.christianpost.com/news/jesus-taught-you-can-get-to-heaven-through-buddha-muhammad-ganesh-or-l-ron-hubbard-not-really-169526/#CrtGWre7dvtJTfmZ.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