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정국에서 진행된 국회 청문회와 관련된 보도를 접하면서 대통령을 포함하여 우리나라의 엘리트 집단이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이나 능력이 얄팍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도덕적 능력은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반면에 자기중심적 논리는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들의 발언을 되짚어보면, 자신의 직무에 대한 책임의식은 권력을 휘두르는 측면에서만 발휘됐고 동료의식도 일천했으며 자신의 발언의 파장에 대한 심려도 거의 없었다. 그들은 거의 생존본능과 공격본능(이것도 생존본능의 일부로서)에 일차적으로 매몰된 인상을 주었다. 국민들은 그들이 거짓말을 해대며 그저 청문회 현장의 순간만 모면하려고 부리는 수를 읽어버렸다. 국가 위기 사태 앞에서 그들이 늘어놓는 변명과 책임전가에 국민들은 이제 식상할 지경이다. 아니, 이질감까지 느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영삼 정부시절 무기 로비스트와의 야릇한(?) 관계에 대해 공개고백을 한 당시의 국방장관은 용기 있는 인물일까라는 의문을 가져본다. 적어도 제기된 의혹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진실을 밝혔으니 작금의 청문회 인사들과 대비되는 점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그 당시 국민들은 그 진실고백에 대해서 어처구니없어 하는 표정을 내비쳤다. 아마도 잘못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보다 그가 국방정책과 관련하여 저지른 과오가 더 중차대했기 때문에 그런 표정을 짓게 되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오늘날 비리 혐의를 받고 있는 정치인, 경제인, 관료, 의사, 교수들에 대해서 우리가 허탈감을 느끼는 것도 그들이 자신들의 과오의 중차대함을 마찬가지로 생각조차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불가역적으로 중차대한 과오가 저질러지지 않았는가? 국정이 마비되는 사태가 초래됐다. 그런데도 이 사태 앞에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국가나 사회의 미래보다 자신들이 살아날 길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 길을 자기들만이 알고 있는 듯 행동하지만 국민들은 이미 그들이 생존본능에 매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도덕적 능력이 허약해지는 것도 모른 채 자기중심적 논리만 개발하고 책임과 공동체의 연대의식도 내팽개치는 그들의 근시안적 반응들을 애처롭게 본다. 물론, 자기가 '죽게 될' 길을 선택한 그 국방장관의 결정도 결국 '경솔한' 것으로 판명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문제의 핵심은 그들이 저지른 과오의 중차대함이 그러한 반응들조차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는 점이다.
어쨌든, 개인적 차원에서 보자면, 인간이란 존재가 매우 복합적이어서 위기 상황에서는 생존본능에 충실하기도 하지만, 공개석상에서 위증을 했더라도 이후에 후회하며 자신의 발언을 번복할 수도 있고, 진실을 고백했더라도 동일한 과오를 또 저지를 수가 있다. 현재 드러난 외형적인 반응으로 한 인간의 진실성을 재단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국정마비가 어떤 파장을 끼치는 사태인지를 조금만 생각이라도 한다면, 너무 자기만 살 길을 천연덕스럽게 추구할 일이 아니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 자꾸 변명만 하려고 하면, 그것은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은 또 다른 변명을 찾아야 하는 생활로 이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폴 부르제가 말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청문회 인사들의 행태가 그들이 사는 대로 생각한 결과라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서 자신들의 삶의 방식이 자신의 미래뿐만 아니라 주변 이웃들에게도 피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으면 좋겠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한1서1:8). 자신의 살 길을 도모하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는 일을 반복하면서 살면 그의 삶 속에는 진리가 있을 자리가 없게 된다. 그리고 진리에 토대를 두지 않은 생각은 자기 혼자만의 살 길에 몰두하게 만든다. 그것의 결국은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세상 근심을 구성하고 사회적, 영적 사망을 초래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린도후서7:10). 하지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에 대하여 "근심"하면서 살면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미래뿐만 아니라 사회도 살리는 길이다.
다윗이 이러한 삶의 표본이다. 그는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난 뒤 나단 선지자의 꾸중을 듣고서 즉시 그 죄과를 인정한다. 그는 절대왕권을 가졌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진리를 생각하며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변명하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고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비록 그 죄의 결과로 자식이 죽고 자신의 첩들이 백주에 강간당하는 치욕을 겪기는 했지만, 결국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사도행전13:22)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굳건한 사회적, 영적 토대 위에서 살아가게 하였다. 이처럼 지배 엘리트라면 적어도 자신의 도덕적, 영적 지침으로서의 진리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사회와 국가의 미래를 자신의 살 길보다 우선할 수 있게 된다. 변명과 거짓말이 순간의 난관을 모면하게 하는 방책일지는 몰라도 그것들이 삶의 방식일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도 생존본능으로 경쟁하는 원시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