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편 1-11절, 이사야 42장 1-4절, 마가복음 1장 9-13절
[소명: 삶의 의미]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김아무개입니다. 김아무개가 당신입니까? 아니요! 김아무개는 저의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 질문에 초대교회 교인들은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다가와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삼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으며, 40대 중반의 남성이고, 두 아이의 아빠이며, 한 여인의 남편입니다. 국어교사가 되기 위해 대학을 다니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알기 위해 20대 후반 뒤늦은 나이에 다시 신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 진리의 말씀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이번 설교의 주제를 놓고 고심하며 제 삶을 다시 한 번 반추하게 되었습니다. "왜 나는 목사가 되었는가?" "왜 수많은 직업 중에 하필이면 목사인가?" "무엇이 나를 이 길로 이끌었는가?" 이 질문은 저를 고등학교 2학년, 꿈 많던 시절로 이끌었습니다.
새벽기도와 금요철야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교생활에 열심을 내던 저는, 어느 날 문득 "하나님이 계신가?"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내게 한 번도 나타나지 않으시나? 꼭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 하는가?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사는 데는 별 문제가 없지 않을까?
하나님과 단판을 내야겠다고 생각한 저는 매일 새벽과 저녁에 단 한 가지의 내용으로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한번만이라도 내게 나타나 보시오." 예레미야 33장 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는 말씀이 거짓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한번 정도는 응답할 것이라고 저는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렇게 1년이 가도록 매일 새벽과 저녁에 부르짖었건만, 하나님은 한 번도 제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음성조차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정신분석학의 아버지 프로이트에 의하면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꿈에 나타난다고 하는데 꿈에서조차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가을 밤! 그날도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늘 하던 대로 교회를 찾았습니다.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같은 내용의 기도를 하던 중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이제 다시는 교회도 가지 않고 하나님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하게 또 다른 한 가지 생각이 저의 가슴을 파고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사는 삶! 그 삶이 네게 정녕 더 낫단 말이냐?" 이 질문은 저를 때렸습니다. "예수의 삶이 내 자신에게 그렇게 하찮은 것이었던가?" 그 순간, 저는 새로운 결단과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계신지 계시지 않는지는 잘 모르겠다. 저 하늘 먼 곳에 천국이 없어도 상관치 않겠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예수께서 내게 보여준 사랑, 최소한 그것만큼은 배신하지 말자!" 종교체험이라고나 할까요? 그 때의 다짐이 저를 목사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가복음은 그 무렵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셔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요단 강 속에서 요한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매우 짧은 한 구절이지만 저는 이런 한 구절 한 구절이 그냥 넘어가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나이는 아마도 20대 후반 아니면 갓 서른에 도달한 때였습니다. 30대 초반의 청년은 어떤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길래 갈릴리의 나사렛으로부터 저 남쪽 유다지방에 있는 요단강까지 세례요한을 찾아간 것일까요? 갈릴리의 나사렛은 구약성경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그래서 별 볼일 없는 작은 시골 동네인데, 이 촌 동네 청년의 가슴에는 어떤 열정이, 또 어떤 하나님의 꿈이 들어 있던 것일까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를 나사렛에 두고 이 먼 곳까지 요한을 찾아 간 것일까요? 이틀 동안(약 35시간) 걸어서 요단강으로 가면서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나사렛으로부터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도시 세포리스가 있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가 로마에게 잘 보이려고 거대한 로마식 도시를 매우 화려하게 재건하였고, 그 주변의 갈릴리 사람들은 이 도시의 건설에 강제로 동원되었습니다. 목수였던 아버지를 두었던 예수 또한 이 도시 건설에 참여했을지도 모릅니다. 식민지 시절 자기 땅에 원수의 나라를 위해 도시를 건설해야 하는 청년의 가슴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요?
[요단강 속으로]
여기 앉아 계신 여러분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된 데는 각각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모태신앙이라든지, 병이 나았다든지, 교회 나와서 가슴 벅찬 감동을 받았다든지 어떠한 소중한 기억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이러한 종교체험은 인생을 사는 동안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기준이 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되고, 좌절과 낙담의 상황을 극복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기억과 감격은 망망대해나 끝없는 사막에서 길을 알려주는 별처럼 우리 인생의 규범이 됩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그 감격과 기억은 시들해지고, 저 멀리 고고하게 떠있는 별을 응시하던 나의 눈은 어느새 땅 아래로 내려오게 됩니다. 직장 상사에 시달리고, 애들 챙기고, 집안 대소사에 참여하고, 먹고 사는 걱정과 염려를 하다보면, 예수에게서 발견한 고귀한 진리와 사랑과 비전은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와 그의 나라는 내 안중에서 사라지고, 현실에 대한 처세에만 골몰합니다. 오랜 세월 그러다 보면 종교 생활은 하나의 취미 생활로 전락하고, 참 구도의 길은 멀어지며, 현실 너머를 가리키며 손짓하던 여러분의 별도 사라집니다.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냥 교회 다니는 사람(church-goer)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회 주교였던 존 엘브리지 하인스는 설교를 시작할 때 늘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우리가 당신께 아무런 뜻도 없는 일들을 습관처럼 행할 때, 우리를 용서하소서."
모든 신앙이 처음의 싱싱함을 잃고 시들어져 갈 때, 먼저 회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 맞대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으로 나의 삶을 꿰뚫어 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내 삶의 핸들을 틀어야 합니다. 신앙을 시들게 했던 현실의 문제를 과감하게 내려놓고, 하나님께 자신을 던져야 합니다.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요단강으로 온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원문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세례 받으시는 장면은 앞서 나온 다른 사람들이 세례 받는 것과 다릅니다. 다른 모든 유대 사람과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은 요단강에서(εν, 5절) 세례를 받지만, 예수님은 요단 강 속에서(εις, 9절) 세례를 받습니다. 즉 예수님만이 물속으로 깊이 온 몸 전체를 담그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죄를 모두 말하지만(5절) 말로만 떠들고 자신의 몸 전체를 씻는 것이 아니지만, 예수께서는 아무 말 없이 온 몸을 내어 놓고 있습니다(9절).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은 이제 예수를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하나의 표본이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은 세례를 주신 일이 없지만, 온 교회는 요한의 세례를 자신들의 중요한 예식으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모든 사람은 세례를 받으며, 세례를 통해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교리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티끌만한 죄도 없는 분이시지만(히브리서 4:15),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완전히 자신의 생을 드립니다. 그가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에게 내려 왔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한 인간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모든 고집과 생각과 욕심을 내려놓고 물 속 깊이 잠겨 모든 죄악을 씻어내고, 이전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날 때, 하늘이 열리게 되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서야 땅과 하늘이 화해하고 성령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8장 11-12절에 보면 비둘기는 노아에게 감람나무의 새 잎사귀를 따다 줌으로써 온 세계가 하나님의 물로 씻음 받고 즉 물세례를 받고 새롭게 창조되었음을 알려 주는 새로 등장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세례로 말미암아 세 세계가 열릴 것임을 암시합니다. 또한 비둘기는 당시 편지를 전해주는 우체부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온전히 드릴 때에만 하늘의 소식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하늘로부터 예수님의 가슴에 울린 두 마디의 소리는 모두 구약성경에 있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2편 7절에 나오는 말로 유대 임금을 임명하는 대관식 때 낭송했던 구절입니다. 새로운 왕이 임명되면 주변의 다른 나라 왕들은 경험이 없는 이 왕이 등극한 틈을 노려 침략을 하거나 모반을 꾸미곤 했습니다. 그런데 시편에서 하나님은 그런 군왕들을 비웃으시며 하나님이 세운 통치자에게 도전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의 세례는 세상의 평화를 가져오는 참된 왕의 등극이며 그 뒤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명확하게 보여 줍니다. 마가복음 1장 1절에 대해 설교할 때 말씀드렸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베시파시아누스 황제의 등극과 대조를 이루며 누가 진정한 왕이고 평화를 가져오는 분인지 마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말씀은 이사야 42장 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자신의 종을 통하여 새로운 일을 하시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신을 통하여 능력을 받고, 그의 임무는 이방에, 즉, 모든 민족들 가운데 공의를 알리고 공의를 온 땅에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공의는 세상의 법과 완전히 다릅니다. 외치지도 아니하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아니하고 거리에서 선포하는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며 진실로 정의를 행하고, 쇠락하거나 절망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그의 공의는 흑암의 세계에서 신음하던 모든 이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주고, 모든 이방인들의 빛이 됩니다. 마가복음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분이셨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들린 소리는 예수님의 가슴을 울리게 만듭니다. "너는 내 마음에 드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 때문에 내가 참 기쁘다." 하나님은 오늘 세례를 주는 요한이 아니라 세례를 받는 예수께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남의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합니다. 세례를 주는 자리, 여러 사람에게 칭찬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몰려오고, 인기가 많고, 멋지게 연설을 하고 가르치는 그런 자리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께서는 묵묵히 나아와 요한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온 몸이 물속에 잠겼을 때 예수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자신을 담그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을 것이고, 그렇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겸손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하나님께 헌신합니다. 그래서 오늘 하늘에서 들린 이 소리,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소리는 십자가 죽음의 장면에서 적국의 장교인 로마 백부장의 입을 통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말로 다시 한 번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원수의 장교가 고백하고 증언하게 만든 예수의 겸손과 헌신은 세례를 받을 때부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단 한 점의 흐트러짐 없이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소명과 유혹]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뒤 곧바로 사십일 동안 홀로 단식하셨다는 사실은 공관 복음서가 모두 증언하는 바입니다. 주님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죄를 용서받은 다음에도 늘 깨어 단식하고 기도하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몸소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례로 우리 마음에서 몰아냈던 더러운 영이 나태하고 흐리멍덩해져 있는 우리에게 되돌아와 영적으로 메말라 있는 우리 상태를 알아채고는 더 악한 일곱 영으로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마지막 상태는 처음보다 더 나빠질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확인을 받았을 때 인간은 자존감이 넘치게 될 것이지만, 자칫하면 그것이 교만과 독선으로 빠질 수 있기에 성령은 예수를 광야로 내 보내셨던 것입니다. 노자의 도덕경 13장에는 "사랑을 받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늘 놀란듯이 하라! 큰 환란을 내 몸처럼 귀하게 여겨라!"(寵辱若驚, 貴大患若身!)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체험을 깊이 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삶에서 기적을 체험한 사람일수록 더욱 더 입조심 몸조심을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목회운영위원회의 헌신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목회운영위원은 우리 교회의 일상적인 모든 운영을 하는 가장 핵심적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도회 대표가 있고, 각부서장들이 있습니다. 당회원과 목회자, 그리고 제직회장, 권사회 대표가 함께 합니다. 이 분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인 생명사랑교회를 위해 선택한 이들입니다. 목회운영위원들이 오늘 예수님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온전히 자기를 드리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한다면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동시에 목회운영위원들은 신도들을 대표하고, 부서원들을 대표하고, 교회를 대표해서 광야의 시험도 이겨내야 합니다. 절대로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섬김의 직분입니다. 그것이 자랑이 되거나, 계급적 특권이 되는 순간 교회는 길을 잃게 됩니다.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하나님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인간이 빠질 수 있는 가장 큰 세 가지 유혹을 모두 물리칩니다. 경제적 곤궁에 빠졌을 때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 문제를 해결하려는 유혹, 거짓과 악에 무릎을 꿇고서라도 남을 지배하고픈 권력의 욕구,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자신을 드높이고자 하는 명예욕 모두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물리치십니다. 목회운영위원들도 모두 이 세 가지 유혹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도록 스스로 신앙 훈련에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신앙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공생애를 위한 준비를 마치신 예수님께 이제 천사들이 나아와 수종을 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들짐승들과 함께 지냈다고 합니다. 이 구절은 태초에 아담이 다른 짐승들과 함께 지내며 이름을 붙여 주었던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생각 중에 하나는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모든 들짐승들은 사람을 따랐고 천사들은 사람들에게 수종들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에게 이런 현상이 다시 일어나는 것은(시 91:11-13, 사 11:6-7) 예수께서는 이제 불순종한 첫 아담과 달리 새로운 아담(고전 15:45), 새로운 인류로서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평화의 세상을 만들어 가시는 분이심을 마가는 선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생명사랑교회이고, 우리들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지만, 새롭게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라 새로운 인류가 되어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사랑이 넘치고, 생명을 살려 모두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역할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라면 하나님이 공의를 세상에 펼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절대 쇠하지 않으며 낙담해서는 안 됩니다. 야훼의 종인 우리들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는 이들입니다. 생명을 살립니다. 좌절한 사람을 일으킵니다. 아픈 사람을 고쳐줍니다. 원기를 북돋게 하고, 희망을 불어넣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는 공식적으로 이 일을 하시겠다고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요단강까지 와서 세례요한을 찾으셨던 것입니다. 저는 이 일을 하겠다고 파주 촌에서부터 신학의 길로 접어들고 이 상계동에 온 것이고, 여러분들도 이 일을 하겠다고 여기에 모여 든 것입니다. 이 모두는 저 하늘에 계시지 않고 이 땅으로 내려오신 하나님, 인간과 친구가 되고자 하셨던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으로 오셨지만 그는 하늘에서 났고, 하늘에 속한 분으로 사셨습니다. 우리 또한 세례를 통하여 원래 그러했던 하늘의 사람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서 사는 동안 늘 유혹을 받고 작은 실수도 반복하겠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께서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라 부르는 사람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를 본받아 세례 받을 때의 첫 마음을 잃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어린 양과 사자들이 뛰놀고,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서로 해치거나 상함이 없는 평화의 세상을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늘문을 여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 내리시는 은총에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스승이시며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참된 진리의 길로 이끄시니 또한 감사합니다. 물 속 깊이 몸을 담그시며 자신의 모든 욕망과 교만을 내려놓으시고 온전히 하늘만을 바라보셨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 또한 하늘의 음성에 늘 귀 기울이는 신실한 자들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 만난 그 체험 잊지 않게 하시고, 땅에 살아도 하늘 백성임을 기억하게 하시고, 세상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받은 일군임을 자각하게 하소서. 세상의 풍랑이 거세더라도 뭇 나라와 민족을 다스리시는 참된 왕이신 하나님께 의지하여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올곧게 자신의 길을 가게 하소서. 목회운영위원들을 세우셨으니 충성된 종이 되게 하시고, 섬김으로 본을 보이게 하소서. 성령께서 주시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온전히 하나님만을 섬기고 당신만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삶으로 드리는 이 찬양을 받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