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2편 1-5절, 마태복음 5장 1-12절
[산상설교: 예수의 정신]
올해 우리교회의 표어는 "예수의 사랑, 거듭난 생명"입니다. 표어가 지향하는 정신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거듭나는 생명들이 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알고자 매주일 예수님의 행적을 뒤따라가며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고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시작하셨고, 하나님 나라 운동은 복음 선포와 가르침, 귀신축출과 병자의 치유, 그리고 함께 나누는 밥상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마태복음서 5-7장은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산상설교'라고 불러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렇게 알려진 매우 유명한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서 저자는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예수님의 설교들을 모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예수님을 통해서 생긴 새로운 공동체가 지켜야 할 법을 제시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왔듯이, 예수께서도 산에 오르셔서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는 새로운 가르침! 새로 생긴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지켜야 할 법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산상설교의 말씀은 반드시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이 말씀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예수의 제자로 살게 되었습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톨스토이, 간디, 마틴 루터 킹 목사, 본 회퍼 목사 등 수많은 사람들이 산상설교를 읽고 삶의 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쟁이는 싫지만 예수는 좋다"라고 했던 간디는 산상설교만 있으면 다른 것이 없어도 그리스도교는 설 수 있다고 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산상설교의 말씀들을 이 사회 속에서 문자 그대로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독립협회를 조직했던 월남 이상재 선생은 1902년 수구파들이 조작한 개혁당 사건으로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감방 벽 틈에 끼어 있던 마태복음의 5장과 산상수훈을 접하고서, 그 후 성경과 그리스도교 서적을 전부 탐독한 후 54세의 나이에 그리스도교 신자가 됩니다.
[팔복의 말씀: 정말 복인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부분은 산상설교의 첫 말씀으로 여덟 가지 복 있는 사람에 대해 나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에는 "가난한 사람," "지금 굶주리는 사람," "슬피 우는 사람," "예수님 때문에 박해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을 읽다보면 정말 이런 사람들이 복이 있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슬피 우는 사람, 예수님 때문에 또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당하는 사람이 복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들이 복이 있고 행복하다고 하신 이유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고 위로를 받고 배부를 것이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비록 현실은 불행하지만 예수님의 사역과 함께 밝은 미래가 동트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전한 갈릴리의 가버나움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종교 모든 면에서 낙후된 시골지방이었고, 로마와 헤롯의 지배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들의 착취로 인해 가난과 설움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곳을 찾아가셔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시면서 희망을 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팔복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 더 관심이 있는지, 또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누리게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더 많이 소유하고, 힘을 숭배하고, 권력과 지식과 명예로 자신을 높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 복되고 하늘의 은총을 누리는 사람들이 따로 있다고 선언합니다.
고대에는 전쟁을 통해서 땅을 서로 빼앗는 일들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그래서 힘센 장군, 적을 무찌르고 강한 사람들만이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다릅니다. 온유한 사람, 즉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험한 세상을 살다보면 착한 마음, 자비로운 마음을 유지하기 쉽지 않습니다. 착하고 순진한 사람을 속여 등 처먹는 나쁜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약삭빠르게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면 남에게 피해가 되는 일도 서슴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다보면 자비로운 마음을 갖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험한 세상이 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오늘 자비로운 사람을 하나님께서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대에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고 불린 사람들은 대부분 왕족이었습니다. 고귀한 신분을 타고 나거나, 전쟁에서 승리하여 자신의 왕국을 세운 사람들, 가장 높은 자리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신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전쟁이 아닌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세상에서는 가진 것이 많고, 경쟁력 있고, 강한 사람이 땅을 차지하고, 배를 두드리며 만족하게 살며, 다른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고, 명예를 얻고 신의 아들딸처럼 행복을 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내 이야기를 들으러 온 너희 가난한 사람들, 그래서 온전히 하나님께만 모든 것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너희들, 슬프고 힘없는 처지에 있어서, 없는 것 가지고 서로 자비를 베풀며 하루의 평화를 추구하며, 옳은 세상을 간절히 바라는 너희들이 복이 있다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를 차지해야 하는가?]
여러분! 삼성그룹의 회장님이나 롯데그룹의 회장님들이 복이 있을까요? 아니면 지금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이 더 복이 있을까요? 아마 여러분들은 나도 대기업의 사장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대기업의 회장들이 복이 있을 것 같지만, 경영 승계 문제로 가족이 불화하고, 대기업을 유지하고 더 성장시키기 위해 자비를 베풀기보다는 경쟁에 뛰어들어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참된 평안과 평화를 찾기 어렵습니다. 도리어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은 물 한 컵, 밥 한 술에도 배부르고 감사가 넘칩니다. 재벌들은 이웃의 아픔에, 불의한 사회에 대해 슬퍼할 줄 모릅니다. 그저 자기 배를 불리는 것에만 신경을 씁니다. 결국 하나님을 외면합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자기 왕국은 세웠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를 체험할 수는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곧 신입니다. 자본이 곧 하나님이고, 돈을 잘 벌게 해 주는 사람이나 아이템이 인기가 치솟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돈의 노예가 되어 돈을 위해 살게 됩니다. 지금은 구속되어 있는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 SDS의 상장으로 2014년에 이미 주식자산가치가 6조원을 넘었습니다.
우리가 언론에서 워낙 큰 숫자의 돈이 언급되기 때문에 그것이 실제로 와 닿지 않습니다. 1조라는 돈은 얼마나 큰돈일까요? 만약에 예수님이 태어나셔서 그 때부터 매일 백만원씩을 쓰신다고 가정해 봅시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까지 살아계신다고 가정하고 2000년 동안 매일 백만 원을 써도 1조가 되지 않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개인의 노력을 통해서 2000년 동안 매일 백만 원을 써도 다 쓸 수 없는 돈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6조라는 돈은 그야말로 상상할 수 없는 돈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재벌들이 그것도 모자라 국민들의 세금을 또 불법으로 강탈하려고 하고, 국가를 운영하는 정부와 짜고 혜택을 누리려고 합니다. 왜일까요? 돈을 하나님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오늘 팔복의 말씀은 한편으로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오늘 팔복의 말씀은 행복한 이유를 전부 하나님과 연결해서 찾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이 세상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 이 세상이 주는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가 진정한 행복의 원천이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읽은 시편의 말씀에서 인간은 단순히 물질적이고 권력만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양심을 지닌 인간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게 되었을 때, 결코 편한 삶을 누릴 수 없음을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신음으로 뼈가 녹아내리고, 마음이 짓눌리고, 혀가 말라버리는 고통이 있습니다.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고 살 수가 없습니다. 감옥에 가지 않아도 죄책감으로 인해 괴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 털어 놓아 모든 것을 용서 받고, 피해자에게 잘못을 빌고, 보상을 해주어 모든 문제가 깔끔하게 풀렸을 때에야 인간은 안심을 하게 되고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
왜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의 첫 마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는지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번역된 말의 원어는 해석하기가 쉽지 않은 말입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영으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누가복음은 그냥 "가난한 사람"인데 마태는 이것을 바꾸었습니다. "영"이라는 말과 "가난"을 붙여 놓아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해 놓았습니다.
우선 여기에서 영이 하나님의 영은 아닙니다. 8절에 마음이 깨끗한 사람도 영이 깨끗한 사람으로 번역되어야 마땅하기에 이것은 인간의 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성경에 여기에만 등장하고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 문서에 두 번 등장합니다. 그 문서에는 전쟁이라는 극단의 상황에 처한 이들이 자신의 처지를 가리켜 휘청거리는 이들, 의기소침한 마음, 벙어리들, 떨리는 무릎, 꺾인 목덜미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전쟁의 상황에서 무엇을 어찌할 지 모르고 매우 불안하고 힘들고 겁에 질린 상황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 영으로 가난한 사람이 완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전쟁을 일으킨 저 사악한 사람들을 소멸시킬 것이라고 말합니다.
영으로 가난하다는 것을 중국어 성경은 '허심(虛心)'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마음을 비운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 마음을 비워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모든 삶을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도 있습니다. 가진 사람은 돈이 많아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생각이 거기에 집중되지만, 없는 사람들은 돈이 없기에 돈을 갖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찰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돈! 돈! 돈!" 하고 있습니다. 즉 마음을 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게 만든 것입니다.
잠언 30장 7절에서 9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께 두 가지 간청을 드리니,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저에게서 멀리하여 주시고,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주십시오. 제가 배가 불러서, 주님을 부인하면서, '주가 누구냐'고 말하지 않게 하시고, 제가 가난해서, 도둑질을 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거나, 하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잠언의 말씀처럼 배가 부르면 누구나가 주님을 부인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악착같이 돈을 모으려고 하고 온통 돈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을 같기도 쉽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조차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하나님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무엇으로 우리 마음을 채울 것인가?]
초등학교 교사가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 주었습니다.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적으라고 했지요. 우주인이 되고 싶다고 적은 학생도 있었고, 배우가 되고 싶다는 학생도 있고, 가수나 과학자도 있었죠. 교사가 숙제를 검사하다가, "행복"이라고 적은 종이를 발견했습니다. 교사는 그 아이에게 "얘야! 숙제를 잘못 이해한 것 같구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학생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인생을 잘못 이해하신 것 같군요."
언제인가부터 이 사회는 행복이나 성공의 정의가 모호해지기 시작했고, 돈이 곧 성공인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권력과 부에 대한 욕망 때문에 우리는 무한경쟁에서 남들을 제치고 승리하기 위해 많은 일을 빨리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하루 종일 밤늦도록 일하면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말이지요.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행복의 정의에 노출됩니다. 큰 평수의 아파트에 사는 것, 좋은 차를 소유하는 것, 명문대에 입학하는 것,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 거기에서 승진하는 것, 결국 돈을 많이 소유하는 것 등으로 성공과 행복을 측정합니다. 이런 방식의 성공과 행복이 교회에도 스며들어서, 목사도 대형교회에서 목회를 해야 성공하고, 그래서 사례비를 많이 받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언론에 나와 유명인사가 되어야 성공하고 행복한 것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 것이 행복입니까? 그런 것이 복을 받은 것입니까? 우리는 성공과 행복이 우리에게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시 정의해야 합니다.
무엇이 우리의 행복을 좌우합니까? 행복과 성공은 집의 크기가 아니라 마음의 크기에 달려 있습니다. 쾌락보다 감사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려면 무엇을 소유하거나 무엇을 하는 것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더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저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고,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무척이나 행복할 것 같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에서, 여러분의 얼굴에서, 여러분과 함께 생명사랑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예수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우리가 가끔 집에서 급히 나올 때 깜박하기 쉬운 것들이 있습니다. 차 키라든가 지갑이라든가 휴대폰이지요. 깜박하고 가지고 나오지 않아서 다시 집으로 달려가 서랍이나 책상을 뒤지다 정신을 차려보면 바지 주머니나 심지어 손에 들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행복도 그것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찾아 사방을 뒤지지만 사실은 행복은 사실 우리 곁에 이미 있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의 하나님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비난을 들을 때 왜 우리는 행복할까요? 왜 기뻐하고 즐거울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지금 겪는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일이라면 기꺼이 함께 할 마음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 마음을 무엇으로 채우고 있는지 정말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2016년 2월 9일 오전 6시 50분 독일 뮌헨에서 남동쪽으로 60킬로미터 떨어진 바트 아이블링 인근 단선 철로에서 시속 100킬로미터의 속도로 마주 달리던 통근열차가 정면으로 충돌했고, 이 사고로 기관사 4명, 승객 7명 등 11명이 숨지고, 85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독일 최악의 열차사고였는데, 이 사고는 열차 신호 제어 담당자가 모바일 게임에 빠져서 신호를 제때에 보내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2016년 3월 9일, 여섯 살 신원영 군 사망 사건을 수사하던 수원지검 평택지청은 계모와 친부를 구속합니다. 계모는 원영 군에게 하루 한 끼밖에 주지 않았고, 상습적으로 폭행했으며, 팬티에 설사를 했다는 이유로 살균 세제를 온몸에 붓고 발가벗겨 찬물을 끼얹고 나서 영하의 날씨에 화장실에 아이를 방치했다가 결국 아이가 목숨을 잃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계모는 모바일 게임에 빠져 있었습니다. 게임을 하다 보니 게임 캐릭터가 필요했고, 이 돈을 구하려고 생각하던 차에 원영 군의 친모에게 송금하는 양육비가 떠올랐습니다. 계모는 원영 군을 직접 키우겠다고 데리고 왔고, 원영 군에게는 하루 한 끼도 아까워하면서 게임의 캐릭터를 키우는 데에는 4천만 원이나 되는 큰돈을 아낌없이 썼습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우리들 마음은 지금 무엇으로 채워져 있나요? 마태복음서는 누가복음의 축복선언문을 여덟 가지로 확대하면서 우리들에게 윤리적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웃과 형제자매의 어려움을 보고 공감하며 슬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어야 한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음을 깨끗이 하고 평화를 일구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보편적 공의에 목말라 하여 의를 위하여 박해도 감당할 용기를 지녀야 한다.
마태복음서를 쓴 사람들은 높은 윤리적 이상을 보여주고 그런 삶의 모습을 통해 하늘나라를 차지한 사람들이 어때야 하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여러분 또한 하늘나라를 차지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마음에 세상의 것이 가득 들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온전히 하나님만을 향하여 자신의 모든 욕심과 왜곡된 세상적 가치는 내어 버려야 합니다. 그럴 때만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욕망은 무한하고 삶은 유한한데 돈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는 결국 여러분의 삶을 지옥처럼 만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족할 줄 알고 참된 평화를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해 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들이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 또한 가진 것이 많지 않지만 주님으로 인하여 기쁘고 즐거워합니다. 세상의 많은 유혹과 잘못된 가치관들 때문에 흔들리는 우리 마음에 오셔서 참된 안식과 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언제나 주님만을 바라보며 당신의 뜻을 이루는 것에 전념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