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2장 1-11절, 요한복음 3장 1-12절
[교회 다니는 저마다의 이유]
미국 여론조사기관인 퓨리서치센터(The Pew Research Center)가 2010년에 230여 개국의 나라를 대상으로 실시한 '종교와 대중들의 삶'에 대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세계인구의 32% 정도인 약 22억 명이 기독교인으로 나타났습니다. 기독교는 천주교, 동방정교회, 개신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계 여행을 하다가 누군가를 만난다면 3명 중 한명은 기독교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기독교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들을 심층적으로 조사해보면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와 기독교를 자신의 종교로 갖게 된 경위는 천차만별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들어오던 구한말에 전주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인 레이놀즈와 마펫 선교사 등에 의해 선교가 활발하게 진행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반외세 감정이 고조되었던 동학농민항쟁으로 1895년 초에 선교사들은 선교 중단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선교사들에게 '희망의 빛' 같이 교회를 찾아 나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1년 전에 세례를 받기로 약속했던 장사꾼인데, 주일이 장날과 겹치지 않는 한 매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백리가 넘는 길을 걸어 예배에 참석하는 열성에 선교사들은 감동했고, 그래서 그를 "밝고 특별한 별"(a bright and special star)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별은 오래 빛나질 못했습니다. 선교사 레이놀즈는 "The Christian Observer"(1895, 10월 증언)에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그러나 그 빛도 오래가지 못하고 희미하게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몇 주간 잘 나오더니 한 번은 우리한테 와서 10달러를 달라고 했습니다. 주일예배를 빠지지 않고 나온 대가를 계산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 장사꾼은 예배에 참석한 데 대한 대가로 일당을 계산해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선교사들은 이 장사꾼의 요구에 기가 막혔겠지만, 한국의 선교 초기에 교회를 찾아 온 사람들 중에는 이처럼 대가를 바라고 나오는 교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특히 1894년부터 1895년, 동학농민항쟁과 청일전쟁이라는 난리 가운데 교회가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을 수 있는 '치외법권'적 성역인 것이 드러나면서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교회로 들어오는 교인들이 늘어났고, 예배나 설교보다 교회에서 나누어주는 물질에만 관심이 있었던 이들을 가리켜 선교사들은 "쌀교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감리교 신학대학의 이덕주 교수님이 쓰신 『한국교회 처음이야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만 오늘날 한국의 많은 교인들은 저마다 어떠한 이유로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일까요? 제 자신을 돌아보면 저 또한 처음 교회에 다녔을 때는 쌀교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예배의 본질이나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갈급함보다도 그저 교회 선생님이 좋고, 형 누나들이 좋아서 다녔던 것 같습니다. 신학을 전공하고 목사가 되어서는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는 유치한 신앙에서 벗어났지만(고전13:11), 저는 오늘날 967만 명이나 되는 한국 개신교 교인들이 정말 그리스도교의 참된 진리를 찾고, 그 진리대로 살기 위해 교회에 다니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을까봐 다니는 사람도 있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과 오래도록 친교를 나누면서 친분이 쌓였기 때문에 다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쌀교인처럼 교회를 통해 장사도 하고, 제 이익을 챙기려는 목적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선거철이 되면 대형교회를 돌아다니는 정치인들이 많아지는데 그런 사람들이 대체로 그렇습니다. 삶의 어려움을 겪다가 기적적인 체험을 통해 문제가 해결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도움이라고 믿고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교회 밥이 맛있어서, 찬양대의 찬양이 아름다워서,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들어줄만 해서, 아니면 친구 따라 왔다가 그냥 눌러 앉은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죽어 본 것은 아니지만,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말을 확신하고, 이 세상에서는 보잘 것 없어도 저 세상에서는 더 좋은 곳에 살고 싶어서 나오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아니 어떤 교인은 예수 믿고 하나님 믿으면 이 세상에서 물질적인 축복을 받는다고 하기에 교회를 열심히 다닐 것입니다.
주일에 쉬거나, 놀러가지 않고 교회를 나오기 때문에 비종교인의 눈으로 보면 모두 교인처럼 보이고, 또 자신들 스스로도 교회에 다니니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참된 신앙을 갖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정말 이런 것들뿐인가 하고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에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바리새파였고, 유대 사람의 지도자였습니다. 여기서 지도자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원어로는 "다스리는 자"(archon, ruler)를 가리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니고데모"였습니다. 이 이름은 기원전 63년 로마와 유대의 전쟁 때, 당시 유대의 지배자였던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에게 보낸 사자의 이름과 동일합니다. 후에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로마 포위군에게 항복을 교섭한 고리온이라는 사람이 니고데모의 아들이었다고 나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여기 등장한 니고데모라는 이름이 심상치 않습니다.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니고데모는 분명히 부자였고(39절),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부른 것(3:10)으로 보아 율법학자이며, 어쩌면 산헤드린의 한 회원이었을 것입니다. 산헤드린은 신약시대까지 예루살렘에 있었던 유대인들의 최고 의회인 의결기관으로, 국가의 내무행정을 담당하며 사법권과 재판권을 행사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표징을 보고 예수님이 일개 목수가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며, 충분히 랍비라는 존칭을 받을 만한 분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찾아옵니다.
그런데 실제로 또 역사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니고데모와 예수의 사회적 지위는 하늘과 땅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사람의 눈에 볼 때 예수는 이방인의 땅 갈릴리 지역 출신입니다. 그것도 구약성서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시골동네 나사렛의 평범한 일용직 노동자 목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일 뿐만 아니라, 최고의회의 회원이고, 부자이며, 남부러울 것이 전혀 없는 성공한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인 율법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에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권력과 부를 모두 소유하고 있어 아쉬울 것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루살렘에 올라온 한 시골 청년을 만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판소리 소설 중에 춘향전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소설의 주제를 춘향의 애절하고 지조 높은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잘 따져보면 은퇴한 관기의 딸인 춘향이가 과거급제를 한 이몽룡을 만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설정입니다. 춘향이는 신분 상승을 위해 이몽룡을 기다릴 수 있지만 과거급제를 해서 앞길이 탁 트인 선비가 이팔청춘 뭣 모르던 시절 만났던 여인을, 그것도 은퇴한 기생의 딸을 다시 찾아오는 일은 현실에서는 단 한 건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소설의 주제는 춘향이를 향한 이몽룡의 사랑이라고 해야 하고, 소설 제목도 이몽룡전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사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춘향이를 찾아온 선비의 이름이 "꿈에서나 본 용," 몽룡(夢龍)인 것입니다.
그런데 꿈같은 일이 지금 요한복음서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율법학자인 니고데모는 지금 예수를 랍비라고 부르고 있고, 일개 목수 청년 예수는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에게 거듭남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 발 더 깊은 믿음으로]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읽은 부분의 바로 앞부분 2장 말미에 보면 두 종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내쫓아 내는 것을 보고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즉 예루살렘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면서 이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는 사람이라면 그에 따른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한 부류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벌인 표징들을 보고 들뜬 마음으로 곧바로 별 생각과 고민 없이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둘 모두에게 자신의 몸을 의탁하지 않습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의 믿음이란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기 때문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바로 알고 그분을 믿는 것에 이르지 못하고 표징을 구하는 이들이나, 예수님의 겉모양만 보고 거기에 감정적으로 대응해서 예수의 이름을 남발하는 이들 모두 요한복음서 저자가 보기에는 참된 신앙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선 니고데모는 이런 사람들과는 신앙의 수준이 다릅니다. 지금 니고데모는 자신이 위험해 질 수도 있는데 예수를 찾아갑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전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성전인 예루살렘을 모독하고 파괴하는 행동들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한 과격한 청년의 돌발행동은 자칫하면 폭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그것은 로마군의 끔직한 진압과 많은 이들의 죽음을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전의 제사장들은 성전경비대를 시켜 예수를 감옥에 쳐 넣으려고 했을 것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니고데모는 이런 예수를 찾아갑니다. 예수의 행동을 보고 더 깊은 성찰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이고 한 나라와 민족 공동체를 책임져야 하는 지도자로서 훨씬 더 깊은 고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지금 예루살렘이 진정 하나님의 집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 로마 지배 하에서 계속 위협당하는 하나님의 율법은 어떻게 준수할 수 있겠는가? 다가올 미래에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회복시켜 주실 것인가? 지금 니고데모는 자신의 존재를 걸고, 책임 있는 지도자로 민족과 역사와 하나님 앞에서 진정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어떻게 만들고 추구해야 할지를 고민하면서 예수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문제나 해결하려고 무당을 찾듯이 예수님께 가는 사람들, 표적을 보고 흥분해서 믿는 사람들 하고는 다릅니다. 더 귀한 가치와 더 깊은 깨달음, 더 높은 이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위험도 무릅쓰고 과감하게 모험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우리가 함께 읽은 구약성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또 한 명의 위대한 신앙인을 만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아버지와 출생지와 고향을 떠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큰 민족이 되게 하는 것과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큰 민족이 되려면 아들이 있어야 하는데, 그 아들을 얻는 데에도 25년이 걸렸습니다. 그것도 100세가 되어서 얻은 아들입니다. 이삭을 얻을 때 사라의 나이는 90이었는데,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들의 예언의 말을 듣고 사라는 피식 웃고 말았지만 정말 아들을 얻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때 아브라함은 100세이고 사라는 90세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100세에 얻은 아들을 바치라고 아브라함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을 따라 3일 길을 걸을 수 있었고, 번제에 쓸 장작을 질 만큼 성장했으니 아마 이삭의 나이는 최소한 중고등학생의 나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창 성장하면서 생기가 가득할 나이, 꽃으로 보자면 이제 막 봉오리가 피려고 하는 나이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지금 이런 자식을 바쳐야 합니다.
만약 이삭이 불효자였고, 하도 속을 썩여서 "차라리 없는 게 낫다"라고 생각을 해도 자기 자식을 잡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현대를 열었던 신앙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 이야기를 다양하게 풀어가면서 참된 신앙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였다면 과연 그 이후에 아브라함의 인생은 어떠했을까요? 아들이기에 차마 죽이지 못하고 만약 칼을 거두었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명령이라면서 자기 아들을 죽이는 아버지를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도 사랑하고, 아들 이삭도 사랑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이 전부였고, 또 이삭 또한 아브라함에게는 전부입니다. 제가 아브라함이라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엄청난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믿지만 존재 상실로부터 발생하는 절망과 불안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지금 하나님에 의해서 거부되는 것 같은 상황이 펼쳐지고, 그 약속을 믿었던 아브라함의 백년이 넘는 인생이 송두리째 날아가려고 합니다. 이삭을 잡느니 내가 죽겠다고 자살을 선택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있습니다.
오늘 창세기의 이야기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말해 줍니다. 한낱 행위로 단번에 드러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감정의 휘둘림이 아닙니다. 머리로 이해하고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 전체가 걸린 문제이고,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거듭난다는 것]
다시 니고데모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고데모는 이 말을 육적인 언어로 생각합니다. 오해이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설명해 주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고, 성령은 바람처럼 불고 싶은 대로 분다. 성령의 활동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신비의 영역이다. 영적인 거듭남은 육적인 것으로는 이룰 수 없다.
오늘 니고데모의 이야기에서 과연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깨달았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혹시 오늘 성경을 읽으신 여러분은 이 이야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으셨나요?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머리로가 아니라 몸으로 느끼신 분 계신가요? 만약 깨달은 분이 있다면 그 분의 행실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45-52절에 보면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를 붙잡아서 곤경에 빠뜨리려고 할 때, 그를 변호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또 19장39-40절을 보면 니고데모는 엄청난 양의 몰약에 침향 섞은 향료를 가져와서 예수의 시신을 안치하는데 함께 합니다. 이런 구절로 보아 분명 니고데모는 뭔가 다른 선택을 하였고, 이런 행위 모두가 자신의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심지어 위협이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가지고 담대히 해 나갑니다. 자신들의 동료가 전부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상황에서 합리적인 언설로 예수를 변호하고, 예수를 3년간이나 따르던 제자들마저 도망가고 아무도 없던 장례자리에 나타난 니고데모야말로 어쩌면 진정한 제자가 아니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는 오늘 복음서의 비유처럼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몇 가지 것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거듭나는 일은 육적인 것이 아니기에 단순히 육적인 행위나 생각, 그리고 감정으로는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걸지 않고는 영적 거듭남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이전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인데, 계속 해서 이전 사람의 모습, 이전 생각, 이전의 믿음을 붙들고 있어서는 영적으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저는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영적인 회심과 거듭남에 도달한 이를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성숙은커녕 지성적인 회심이나 도덕적 회심에도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숱하게 많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무엇이 자기의 고집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아 왔고, 자신의 신념을 하나님의 뜻인 양 생각하고 그밖에 다른 관점에 대해서는 전부 무시하는 독선적이고 교만한 사람들을 또 숱하게 보아 왔습니다. 아직 지성적인 회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동시에 자신이 아는 대로 살고 믿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도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저도 부족한 사람이라서 믿는 대로 사는 사람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지만, 내 생애동안 정말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할 만한 사람을 몇 명이나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렇게 살 수 있을 지 늘 떨리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절대 절망하거나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아서 불고 싶은 대로 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따라 인간의 생각을 뛰어 넘어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참 교인을 희망하며]
1885년 미 감리회 소속인 아펜젤러 목사가 시작한 인천 내리교회(당시 제물포 교회)에는 1892년 존스(G. H. Jones, 조원시) 목사가 후임으로 부임합니다. 부임 직후부터 존스 목사는 강화 지역 선교를 시작하고자 하였으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굴욕적인 강화도조약으로 인해 외세에 민감했던 강화 지역민들의 반대로 강화 남문에서 쫓겨나는 등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 내리교회 초기 전도인이었던 김기범, 이명숙의 제안으로 계(契)를 조직하고 곗날을 주일로 하여 교회로 끌어들입니다. 선교사는 곗돈과 계모임에만 관심이 있는 곗꾼교인들을 대상으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곗꾼 가운데 한 명이 돈을 챙겨 도망치는 일이 생겼습니다. 계가 깨지자 곗꾼교인들은 교회 출입을 끊었고 교회 평판도 나빠졌습니다. 존스 선교사는 인천 선교의 문이 아예 닫히지 않는가 싶어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렇게 낙담하고 있는데 두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혹시 교회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러 온 게 아닌가 했더니만 "우리가 계속 교회에 나와도 되겠습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곗군 교인으로 시작은 했지만 말씀을 듣다 보니 그 말씀이 너무 좋아서 계속 나오고 싶습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이승환'이라는 분이었고 신앙인이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그의 신앙이 성장하자 선교사가 세례를 권했는데,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세례를 받아야지요. 그러나 세례 받기 전에 제가 해결해야 될 문제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술집을 하는데 이것을 정리하고 세례를 받겠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 어머님이 강화도에 살아 계신데 이 좋은 복음을 나보다 어머님이 먼저 세례를 받은 다음에 제가 세례 받겠습니다."
그래서 주막을 정리하고 고향인 강화로 돌아간 이승환은 농사를 지으면서 늙으신 어머니를 전도했고, 존스 목사를 초청해서 어머니에게 세례를 받게 합니다. 그러나 고향의 김초시 양반가문에서 서양 오랑캐가 우리 땅을 밟으면 쫓아가서 그 집을 불태우겠다고 반발하자, 이승환은 어머니를 업고 선교사가 타고 왔던 배로 와서 세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이승환 씨의 자택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강화 교산교회의 시작이었고, 강화에 최초의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었습니다.
이 나라 이 땅이 어렵고 힘든 시절 그리스도교는 조선 민중들의 안식처였고, 그래서 때로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고 또 먹고 살기 위해 교인이 되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쌀교인," "곗꾼교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복음으로 삶이 변하고 새 생명을 얻어 거듭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바로 우리들에게 신앙을 전수해 준 믿음의 선배들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올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참된 믿음이 무엇이며,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더 깊이 생각하고 실천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깨달음과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을 여러분의 일상의 삶에서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참된 신앙을 허락해 주소서. 어릴 때 가졌던 유치한 생각과 고집은 내어버리고 이제 더 큰 것과 고귀한 것과 공동체와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는 성숙한 신앙이 되게 하소서.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 같은 성령의 역사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게 하시고, 늘 열린 마음으로 당신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들은 대로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여기에 들어가시면 설교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SoulLoveCommunity/UkVO/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