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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설교]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한문덕 목사 (생명사랑교회)

스가랴 9장 9-10절, 누가복음 19장 34-44절

[종려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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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 김진한 기자)
▲한문덕 생명사랑교회 목사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12:1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유월절 명절을 지키려 예루살렘으로 온 순례자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의 일행을 환영한 것으로 나오는데 바로 여기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선포하는 것과 동시에 승리를 이끈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행위입니다. 즉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승리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순례자들이 외칠 때도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명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본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

그러나 여러분이 다 아시는 대로 예수님은 왕이 된 것도 아니고, 온 세상이 그를 따른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일주일도 채 못 되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합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을 한편으로 고난주일이라고 부르고, 오늘부터 7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근거로 해서 종려주일이라고 부르지만 다른 복음서에는 종려나무 가지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마태와 마가복음서는 많은 사람들이 들에서 잎이 많은 생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에서는 나무 가지와 관련해서는 어떤 내용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주로 갈릴리와 그 주변에서 활약하시다가 사역의 후반기에 예루살렘으로 가신 예수님의 여정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해서는 4복음서가 모두 증언하고 있는데 각 복음서마다 그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 다릅니다. 특히 누가복음서는 다른 공관복음서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복음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나귀 타고 가시는 예수님의 앞뒤에서 환호하고 외쳤는데, 누가복음서에는 제자들만 외칩니다. 외치는 내용도 다릅니다. 누가는 마가와 마태복음서에 있는 다윗의 자손이라든가 다윗의 나라라는 말을 빼고,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이라는 말을 첨가합니다. 또 마태와 마가복음서에는 잎은 무성하였으나 열매가 없었던 무화과나무를 꾸짖는 내용이 있지만 누가에서는 그 말씀 대신 예루살렘을 보시고 예수님이 우셨다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무엇보다 평화!]

누가는 과연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누가는 다윗과 관련된 내용을 삭제합니다. 마가복음서는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라고 외치고, 마태복음서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라고 사람들이 외치지만 누가는 이 둘 모두를 말하지 않습니다. 유대 백성들에게 다윗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 사람일까요? 다윗은 우선 블레셋이라고 하는 강력한 외적의 침입을 막아냈던 장수였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이야기(삼상 17장)를 우리는 알고 있고, 다윗이 전쟁에서 이기고 오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인데,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다!"(삼상 18:7)라는 백성들의 칭송어린 말을 기억합니다. 다윗은 또 유대의 역사 속에서 가장 영토를 넓혔던 임금으로 기억됩니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다윗의 계약인데, 하나님은 노아나 아브라함과의 계약과 달리 다윗의 자손으로 하여금 영원히 왕국을 이어가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삼하 7장 12-16절, 겔 37장 24~26절, 시편 132편). 예수님 시절 많은 사람들은 다윗의 후손에게서 메시아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였고, 그 메시아는 다윗처럼 전쟁에서 승리하고, 가장 영토를 넓히어 민족적 자부심을 다시 일깨워 줄 분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마태복음서와 마가복음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면서 다윗을 언급했을 때, 그들 마음속에는 바로 이런 기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그 옛날 출애굽을 기리는 유월절 명절이니 더욱더 이런 기대가 고조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서는 이 말을 빼고 대신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라는 말을 첨가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은 다윗 같은 민족주의적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이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진정한 제자라면 다윗왕을 외치기보다 평화를 외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에서 예수를 따르던 많은 무리들 중에는 비록 다윗으로 표방되는 민족주의자들이 있었지만, 제자들만의 무리가 외칠 때는 더 보편적인 온 세상의 평화를 말해야 한다고 지금 누가는 주장합니다.

여기서 하늘이란 저 공중의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은 보편성의 상징입니다. 어느 곳에서 보아도 같은 하늘이 보이기 때문이지요. 즉 "하늘에는 평화"라는 말은 온 세상에 모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평화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의 무리가 외쳤던 이 한 마디가 바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천사들이 찬송한 노랫말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들과 하늘군대가 나타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우리는 누가복음서의 예수님 탄생 이야기에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칙령 때문에 유랑생활을 해야 하는 예수님의 부모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고대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전쟁이었습니다. 로마황제가 전쟁을 일으켜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고 호적을 새롭게 등록하여 인구를 조사하고 세금을 매기는 일 때문에 식민지 백성들은 자신의 터전을 잃고 유랑합니다. 여기에 민족주의자들이 들고 일어나면 또 전쟁이 생기고 그러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일반 백성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가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 엄청난 난민들의 문제는 바로 시리아 내전 때문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 중 한 명이었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좋은 전쟁 또는 나쁜 평화란 없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전쟁은 인류를 괴롭히는 최대의 질병"이라고 했고, 위대한 인문학자인 에라스무스는 "전쟁은 짐승을 위한 것이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으며,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인류가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 전쟁이 인류를 끝낼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로 손꼽히는 소포클레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쟁은 그 수행에 있어서 악한 사람을 학살하는 일은 없고, 언제나 선량한 사람만을 학살한다." 그렇습니다. 전쟁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는 전쟁을 막을 수 없었고, 그 결과 예루살렘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모두 파괴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셨던 것입니다. 우시면서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나요?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세상의 평화를 외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바리새파 사람 몇이 예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저는 "돌들이 소리 지른다"는 이 말이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는 당연히 평화를 소리 높여 외쳐야 한다는 강조법입니다.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마저 외칠 테니까요! 그러나 한편 저는 이 말이 이렇게 들립니다. 너희가 평화를 외치지 않고 평화를 만들어 내지 못하면 돌들이 소리를 내며 날아다닐 것이다. 즉 폭력이 난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돌들이 소리 지르며 날아다니기 전에, 총탄과 폭탄들이 소리를 내며 떨어지기 전에 평화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오는 것은 스가랴의 예언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스가랴서의 말씀은 새로운 왕에 대한 노래입니다. 그 왕은 온 세계를 공의로 다스리고 구원을 베풀 왕인데, 그는 온순하여 나귀 곧 나귀 새끼를 타고 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가 할 일은 병거와 군마와 활을 없애고 꺾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는데 그 평화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라 예언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평화로 가득한 세상에 대한 노래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평화는 온순함 즉 겸손함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평화를 크게 내적인 평화와 외적인 평화로 나눈다면 내적인 평화는 겸손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바울 사도께서 말씀하셨듯이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겨야"(빌 2:3) 합니다. 겸손한 마음만이 완전한 내적 평화에 이르게 합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면 싸울 일도 없고, 화가 날 일도 없고, 서운할 일도 없습니다. 남을 낫게 여기면 그 사람의 장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하는 것이 있고,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남을 낫게 여겨 그 사람의 장점을 잘 깨닫고 그로부터 배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모든 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한 예수님의 마음을 닮으라고 했고, 자신이 직접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최고의 지성이자, 로마 시민이었지만 언제나 사랑을 생각하며 평생을 주님을 위한 헌신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어느 무명의 순례자가 쓴 『순례자의 길』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만약 당신의 자기절제 능력이 없다면, 낙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이 열심히 기도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기도하게 되면, 그 기도가 당신을 구원할 것이다."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긴다고 자기를 비하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부족함들을 보고 한탄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상대에서 배우고, 하나님께 간구하여 자기를 구원하는 계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배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평화를 잃게 됩니다.

일본의 '하루야마 시게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글을 쓰는 작가인데, 건강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30년 동안 책을 쓰면서 건강의 6가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사람이 건강하려면 이 여섯 가지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피곤하지 않게 하라! 둘째는 적절한 잠을 자라! 셋째는 식욕을 절제하라! 넷째는 화를 내지 말라! 다섯째는 두뇌를 계속적으로 사용하라! 여섯째는 적당한 운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후에 이 사람은 『뇌내혁명((腦內革命)』이라는 책을 쓰면서 정말 인간에게서 필요한 것 여섯 가지에 한 가지를 더 첨가했는데, 그것은 '마음의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의 평화가 건강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55%로 보았습니다. 다른 모든 것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화"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내적인 평화를 이룬다고 바로 외적인 평화가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외적인 평화를 이루기 위해선 공의가 필요합니다. 시편 85편 10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 진정한 평화는 정의와 하나님의 공의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공의로운 왕이 아니면 구원을 베풀 수 없고 정의 없는 평화는 거짓입니다.

집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앞에서 가족이 침묵하면 가정은 평화로울지 모르지만 그것은 거짓 평화입니다. 재벌 자본가들의 횡포 앞에서 힘없는 노동자가 침묵하면 사회가 평화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거짓 평화입니다. 국민을 개돼지로 여기는 안하무인의 정치권력 앞에서 국민이 침묵하면 국가가 평화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 또한 거짓 평화입니다. 권위주의적인 성직자가 제 맘대로 교회를 좌지우지할 때 신자들이 침묵하면 교회가 평화롭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거짓 평화입니다. 총칼을 앞세우고, 미사일과 핵폭탄을 가지고 위협하는 강대국의 횡포 앞에서 약소국이 가만히 있는 것은 세계의 평화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거짓 평화입니다. 늑대가 어린 양을 잡아먹고 있는데, 어린 양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평화를 누리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 눈감는 것은 강자를 편드는 것이며, 폭력에 굴복하고 마는 비겁함일 뿐입니다. 이럴 때 평화를 누리는 사람은 가진 자, 힘 있는 자, 폭력을 사용하는 자들뿐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이들과 맞서 싸울 때 오히려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를 위해서 때론 갈등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평화를 이루자고 이들과 똑같은 폭력의 방식으로 싸우는 것은 폭력의 악순환을 낳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지혜로워야 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악에게 맞서 싸우다가 자신이 악마를 닮아 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우리 생명사랑교회에 담임목사로 취임하자마자 비폭력대화에 대해서 6주에 걸쳐 특강을 하였는데, 여러분도 스스로 평화롭게 소통하는 법, 내 안의 평화를 만드는 법, 갈등을 다루는 법들에 대해서 공부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행복하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지, 지속적인 평화를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해야 하고, 무엇을 배워야 할지 모든 구성원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2남신도가 꾸준히 독서모임을 하고 있는데, 최근 3여신도도 그리고 1남신도도 신도회별로 독서 모임이나 성서 모임을 꾸린 것은 참 잘한 일입니다. 서로 모여서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진정으로 생명사랑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어떻게 서로 행복하게 평화롭게 살 수 있을지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새롭게 시작한 생명사랑 제자교육 두 번째 시간에 각자의 신앙여정을 함께 나누었는데, 서로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이해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요 며칠 동안 교회 내부를 새롭게 단장하느라 여러분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교회가 4년 만에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더욱 산뜻한 환경에서 예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가 한 마음으로 서로 노력한다면 우리 공동체가 더욱 더 좋은 공동체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부터 고난주간에 들어갑니다. 왜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했나요? 교리문답하듯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 교리적 대답 이전에 예수님께 폭력을 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세력들에 대해서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죄 없는 사람들을 누가 괴롭히는가? 어떻게 해야 선한 사람들이 정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누리고 살 수 있을까? 예수님을 두 번 다시 못 박는 일이 없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지금 전 세계는 자국의 이익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정의롭지 못한 세계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브렉시트가 그러하고,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보이는 행태가 그러합니다. 강대국이 자국의 이익만을 취하려고 할 때, 강대국 틈바구니에 끼여 있는 우리나라는 매우 위험한 상황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 민족은 지금 촛불시민혁명을 통해 사회의 올바른 기준들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완전히 평화로운 시위로 그렇게 하였고, 민주적인 국민들의 힘으로 만들어 낸 매우 소중한 경험입니다. 자부심을 가질 만하고, 세계에 내 놓을 만한 일을 한 것입니다. 아직도 거짓 뉴스에 속아서 우왕좌왕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이럴수록 더 합리적이고 넉넉한 마음으로, 올바른 눈으로 좌우분별을 잘해야 합니다. 자유로운 개인의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고 전쟁 없는 평화로운 사회를 위해서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도록 애써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더 노력해야 합니다. 한 달 후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다음 대통령으로 누가 될지 모르지만 저는 다음 정권은 반드시 역사에 정의를 세우고, 남북의 화해와 경제민주화 그리고 탈핵과 우리 자연환경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자 시민으로 대통령을 뽑을 기준들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려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진정 평화로운 사회, 민주주의 사회는 우리의 노력 없이는 이룰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평화를 외치는 제자들을 막은 바리새파에게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외칠 것이라고 강력하게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평화가 모든 생명체들의 생명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좀 더 좋은 사회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는 사회입니다. 우리나라가 더 좋은 국가가 되려면 우리 모두가 생명, 평화, 정의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드렸던 평화를 위한 기도로 설교를 마칠까 합니다. 이 기도는 성 프란치스코만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가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아시시의 언덕은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당신께서 창조하신 언제나 한 곳에 머무는 피조물들이

형형색색의 빛깔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 여간 아름답지 않습니다.

갖가지 눈이 시리도록 뚜렷한 빛깔의 꽃들이 저마다

색채의 향연을 벌이는 그 언덕을 주여,

내가 그저 온몸에 피멍처럼

그 꽃물을 들이며 굴러 보고 싶습니다.

길 위에 구르는 돌 하나, 길 가에 피어 있는 들꽃 하나에도

당신의 마음 씀씀이가 깃들어 있는 줄

왜 이전엔 미처 몰랐을까요?

당신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또 다른 형제들을 도륙하는

저 추악한 전쟁을 겪고서야

당신의 겸손과 인간의 방자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일생에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게 하시고

당신의 안배로 살이 썩어 가고 있는

문둥이들의 종이 되게 하소서.

주여 비록 사람인 내가 알지 못하나

저들의 고통 속에 담겨 있는 당신의 온전한 사랑을 알게 하소서.

또한 그것을 남은 삶의 신념으로 삼게 하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당신의 자식인 저들이 당신의 이름을 팔아 이룩한

이 땅에서의 찬연한 부귀가 헛된 것임을 내 이제 알았으니

비록 누더기에 맨발이라도 화려한 것을 찾지 않게 하소서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음에 감사하게 하소서.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당신을 외면하는 불쌍한 저들을

오 주여, 긍휼히 여기옵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진정 나를 평화의 도구로 온전히 써 주소서!

맨발로 이 세상을 순례함을 영광으로 알게 하소서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갈라진 발바닥에서 흘러내린 피가

당신의 육신을 적셔 줍니다.

그것이 진정 영광임을 평생 잊지 않게 하소서

때때로 안락에 젖어 살고 싶을 때에

더 가혹하게 채찍질하시어

예정되지 않은 그 때에

당신의 나라로 불려감을 진정 감사하게 하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지붕 위 몇 되지도 않는 씨앗들로 하루를 연명하면서도

하늘로 휭 하니 날면서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는

저 종달새처럼 주여,

평생을 가난하게, 다툼 없이 살아갈 수 있게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평화를 위하여 애쓰는 마음을 허락하소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당신의 자녀가 된다는 말씀을 명심하게 하소서. 정의롭지 못한 세상 때문에, 생명을 경시하는 못된 마음 때문에 상처를 입고 고통을 당하는 이들을 위해 함께 나서는 믿음의 군사들이 되게 하소서. 우리는 평화의 씨앗을 뿌리고 사랑으로 물을 주는 하나님 나라의 정원사입니다. 주여 우리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여기에 들어가시면 설교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SoulLoveCommunity/UkVO/304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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