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37장 4-9절, 요한복음 20장 19-29절
[부활에 대한 하나의 해석]
오늘은 우리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이란 과연 무엇인가? 한국의 평범한 교인들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 예수님처럼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들어가면 부활에 대해서는 생각할 것이 정말 많습니다. 부활절의 진실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예수님의 부활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다양한 물음들이 떠오르지만 성서조차도 부활에 대해서 일관되게 설명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부활한 우리가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고전 15장 35-58절 참조),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도마에게,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손에 난 못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 주십니다. 그러나 같은 요한복음서에서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요한 20장 14절), 누가복음서에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누가 24장 16절). 한편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제자들이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는데 예수께서 그 자리에 홀연히 나타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도 이렇게 양면이 모두 있습니다. 성서가 둘 다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편을 주장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빈 무덤 이야기도 서로 다르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들도 서로 증언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서도 믿음에 이르지 못하고 여전히 의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마태 28장 17절), 도마처럼 보고서야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편 현대처럼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서 영원히 산다는 것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인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도 믿는다고 말하지만 정말로 믿어지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약 영원히 산다고 할 때 몇 살의 내가 영원히 사는 것일까요? 젊은 나일까요? 아니면 늙은 나일까요? 영원히 살면 과연 좋을까요? 혹시 지겹지는 않을까요? 차라리 죽음이 진정한 의미에서 안식 아닐까요? 부활 그 자체가 무엇인가를 파고들면 들수록 미궁에 빠지고 맙니다. 언젠가 오후 특강 시간에 그리스도교에서 말하고자 했던 부활신앙이 무엇인지 몇 시간에 걸쳐 다루고 싶습니다만, 오늘은 부활이 지니는 다양한 의미 중에 한두 가지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두 개의 옛 이야기]
한 인디언이 둥지 밖으로 떨어져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독수리 알을 주웠습니다. 인디언은 사방을 둘러보지만 독수리 둥지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보통 독수리는 둥지를 나무 꼭대기에 틀기 때문이지요. 이 알을 보호해야겠다고 생각한 인디언은 독수리 알을 닭장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 알이 부화했습니다.
이 이후의 이야기는 제가 말을 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잘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예상하시는 대로, 새끼 독수리는 늙을 때까지 닭처럼 지냅니다. 죽을 때가 가까웠을 무렵, 머리 위 저 높은 곳에서 힘차고 당당하게 비행하는 한 마리 새를 봅니다. 닭들 속에서 자란 독수리는 감탄하여 묻습니다. "저게 뭐지?" 곁에 있던 닭이 말합니다. "이보게 친구, 저게 독수리라네. 하지만 행여나 자네도 저렇게 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게. 저것 보게! 태양을 향해 거침없이 곧장 날아오르는 모습을. 자네나 나나 우리는 일개의 닭일 뿐일세!"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본래 누구였는지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모두 자신이 독수리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신들이 저 태양을 향해 곧장 거침없이 날 수 있던 이들이었다는 것을! 땅바닥을 쳐다보며 한 톨의 모이를 더 먹으려고 아웅다웅하는 불쌍한 존재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요한복음서의 예수님은 분명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14장 12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 또한 참된 인간이요! 참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깨닫게 됩니다. 제자들은 바로 부활 사건을 통하여 자신의 근원을 발견하였습니다.
부활절을 맞이하는 생명사랑 가족 여러분! 쩨쩨한 인간이 되지 마십시오. 두려움에 떨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우리 곁에 계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확실하게 믿으십시오! 살려고 발버둥 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정말 목숨을 내놓았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도리어 삽니다. 성령을 받은 여러분이 용서하면 누구든지 그 사람의 죄가 사해질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용서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분노의 감정에 자기를 맡기지 마십시오. 우리는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 위대한 인격이 될 수 있습니다. 훨씬 더 여유롭고 넉넉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작은 일에 성을 내고, 별 것 아닌 것에 상처 받는 사람이 아니라 이 땅을 몸소 걸으셨던 하나님, 즉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돈 한 푼에 품위를 잃지 마십시오. 비굴하게 살지 마십시오. 권력에 아부하지 말고, 그 어느 것도 우상으로 섬기지 마십시오. 정의를 행하고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주님께서 주시는 내적 평안을 굳게 붙잡아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죽음을 극복하고 승리하신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어떤 수도원의 수사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한 채 갈등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불같은 성격은 욕설과 말다툼으로 이어지기 일쑤였습니다. 그 수도원 밖 외딴집에 한 늙은 수도사가 홀로 살고 있었는데, 수도원의 수사들이 월례 모임에서 혹시 그 늙은 수도사가 이 수도원 수사들의 화합에 도움이 될 만한 어떤 조언을 해 줄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수도원의 가장 연장자인 수사를 그 수도사를 방문하는 사람으로 선정했습니다. 늙은 수사는 나이가 많이 들어 기억력에 약간 문제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 수사라면 적어도 은자의 말을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전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늙은 수사는 혼자 지내는 그 수도사를 만나 수도원 내의 불화와 알력에 관해 모두 털어 놓았습니다. 그 수도사는 길게 기른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그대는 아무 설명 없이 내 말을 딱 한 번만 동료들에게 전하십시오.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은 그 메시지를 받아들일 것이오." 늙은 수사가 받은 메시지는 이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서로에게서 메시아를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늙은 수사는 수도원으로 돌아가서 모든 수사를 한자리에 모아 놓고, 수도사가 수도원에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아무 설명 없이 딱 한 번만 발설하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숨을 한번 깊게 들이쉬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들 중 한 사람이 메시아랍니다!"
그 이후로는 모든 불화와 알력이 사라졌고, 수사들은 서로 화합하며 잘 지냈다고 합니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에 대하여]
오늘 도마는 제자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지만 믿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자기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보고, 그의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팔일이 지난 후 제자들이 다시 집에 모였을 때, 예수님이 다시 오셨습니다. 역시나 문이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은 홀연히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신 뒤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서야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도마는 합리주의자였고, 상식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실증적인 것 외에는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자기가 직접 경험한 것만을 인정하고 지식으로 삼으려는 확실성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자세는 맹목적으로 무작정 믿는 것보다는 바람직하고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가장 큰 잘못은 바로 자기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에 대해서는 과감한 모험을 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믿음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고 믿는 것은 말만 믿는다고 했지 아는 것에 불과합니다. 믿음이란 아는 것을 넘어섭니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은 중요하지만 믿어야만 알게 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도마는 알았어야 했습니다. 믿음을 자신의 이성과 경험 내에 가두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에 이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여러분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여러분에게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여러분 눈에는 그저 평범한 교인으로만 보이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보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사람의 얼굴이지만 거기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을 때, 눈에 보이는 것은 상대의 장점과 단점이지만 그 모든 것을 들어서 선한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 수 있을 때, 그래서 선과 악을 넘어서는 저편에서 서로 만날 수 있을 때, 그 때 부활의 믿음은 가능한 것입니다.
[잔인한 사월과 부활의 계절]
매년 부활절은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 거의 4월에 있게 됩니다. 사월은 따뜻한 봄의 계절이요, 긴긴 추위를 뚫고 새롭게 모든 생물이 소생하는 부활의 계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4월은 피로 물들고, 커다란 슬픔이 가득한 계절입니다.
제주 4.3 사건, 민주주의의 열망을 꽃피우기 위해 거리에서 목숨을 내 놓아야 했던 4.19 혁명, 그리고 오늘 세월호 참사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역사는 여전히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더군다나 지난 대선에서 석연치 않았던 점들이 조금씩 드러나고, 아직도 실질적 민주주의는 요원하며, 강대국과 저 북한의 갈등과 긴장 속에서 평화가 위협받고 있는 이 때, 부활을 노래하기란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영광스런 날이고, 승리의 아침입니다. 죽음이 모든 것을 살라먹고 집어 삼켜 영원히 어둠에 갇혀 있을 것 같았지만 예수님은 모든 죽음과 한계와 악의 세력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절망과 고통 가운데 남겨 두지 않으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느냐 못 알아보느냐는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부활하신 분과 함께 생기를 얻어 생명의 삶, 부활의 삶을 사느냐, 여전히 무덤 속 마른 뼈들의 삶을 사느냐 또한 우리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지금 사방에서 하나님의 생기(生氣)가 불어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가대가 설교에 이어 부를 찬양 가사를 읽어 드리는 것으로 설교를 마칠까 합니다. 윤민석 씨가 만든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라는 노래를 유신애 씨가 새로 고쳐 작곡한 것입니다. 성가대는 앞으로 나와서 서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읽고 나서 성가대가 노래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노래를 마치면 여러분께서는 침묵으로 오늘 설교를 묵상하며 부활의 참 뜻을 마음에 새기시면 좋겠습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어둠이 깊고 캄캄할수록, 빛은 더욱 선명하게 보이지.
아무리 작은 촛불이라도, 결코 숨겨지지 않는 법.
어떠한 바람이 불어와도, 누구도 꺼뜨릴 수 없는 불.
사랑과 진실이 눈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는 날까지,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 여기에 들어가시면 설교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SoulLoveCommunity/UkVO/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