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에서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교계와 학계 명사들을 모시고 종교개혁의 정신을 되새겨보는 기획 릴레이 인터뷰를 진행한다. 종교개혁의 정신에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을 거울처럼 대면해보면 어떤 교회상이 도출될까? 그리고 그 교회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도전과 과제는 무엇일까. 가능하다면 도전에 응전하고 과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으려 시도했다.
두번째 인터뷰는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와 진행했다. 송 목사는 교회에 축적된 비본질적인 것들을 걷어내는 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이자 오늘날 우리가 교회 현장에서 실천해야 할 과제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개인적 차원에서는 개인의 신앙이 더욱 성숙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교회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닌 '교회의 제자들'을 양산하면서 집단의 힘은 강해졌지만 개인의 힘은 오히려 약화된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인터뷰는 5월 10일 오전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의 집무실에서 진행되었다. 기사는 <1부: 종교개혁 정신 앞에서의 교회>와 <2부: 신 앞에 선 신자의 신앙> 두 부분으로 나누어 게재한다.
<1부: 종교개혁 정신 앞에서의 교회>
기자: 개신교회 목회자로서, 종교개혁 정신 중 특별히 목회현장에 적용하기 위해 애쓰는 부분이 있는지요.
송태근: 500년 전 마틴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문앞에 95개조항을 붙이며 질의했던 사건은, 사실 기존 가톨릭교회의 조직이나 형식에 문제제기를 하며 조직을 뒤엎으려는 접근이 아니었고 오히려 단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소극적인 촉발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축적된 비본질적인 것들을 걷어내자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개혁이라고 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들 역시 마지막엔 결국 예수만 남도록 끊임없이 개혁해야 하고, 저도 그러기위해 노력합니다.
기자: 끊임없는 개혁은 이상적입니다. 하지만 미래가 불투명한 현대인들의 삶이 참 고단하여 부단한 개혁이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송태근: 삶의 문제와의 괴리는 심각한 문제고, 한국교회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거의 바닥을 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의식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오늘날 한국교회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진단한 내용을 보면 크게 세가지인데, 첫째가 이원론적 삶입니다. 교회 안에서와 교회 밖에서의 언어, 삶, 믿음이 다른 것이죠. 이 같은 극단적 이분법적 사고는 고대의 이단 영지주의 발상에서 나온건데 오늘날 교회가 이 같은 사고를 허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 진단은 직분론의 타락입니다. 교회 안에 매관매직이 있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죠. 직분을 받으면서 적지 않은 돈을 헌금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버린 문화는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성스러운 직분을 돈으로 매매하는 것인데, 이게 비단 종교개혁 시대의 일만이 아닌거죠. 어쩌다가 교회가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되었나, 세번째 진단이 강단의 타락입니다. 강단에 '신학함'이 사라졌어요. 한국교회가 텍스트에 집착하는 모습이 있지만 저는 그 집착 자체 보다는 텍스트에 집착하는 방향, 텍스트를 해석해내는 방향성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 세가지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가장 좋은 방법은 교회가 사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은과 금의 위력을 내려놓고 예수께서 걸으셨던 행보처럼 사회적 약자나 사회의 그늘을 향하고자 하는 고뇌하고 씨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기자: 강단에 신학함이 사라졌다고 하셨어요. 어떤 것이 지금 강단을 점령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송태근: 기복주의와 샤머니즘, 그리고 잘못된 은사주의입니다. 이런 것들이 강단을 망가뜨리고 있다고 봅니다.
기자: 복을 빈다는 것이 그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자기 중심적으로만 복을 빌다보니까 이웃과 나눔을 실천할 여지라던가 하나님께서 일하실 여지 등을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이 문제 아닐까요. 만약 교회 공동체, 국가와 세계 공동체를 위해 기도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발판도 될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지금까지 교회를 성장시키고 지켜온 우리 신앙의 행위들이 이제 보다 성숙해져야 할 시점에 있는 것 같습니다.
송태근: 한국교회가 그동안 그리스도의 제자보다는 '교회의 제자'들을 양산하면서 교회주의에 빠져있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교회중심주의, 교회만능주의같이 말이죠. 이런 문화에서 성과 속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면서 교회 안에서의 일은 모든 것이 거룩하고 밖에서의 모든 일들은 세속적일 뿐이다 라는 관점이 양산됩니다. 바울도 골로새서에서 영지주의적 사고를 경계하며 부모 공경을 언급했습니다. 당시는 부모를 모시는 일까지도 육의 일이라고 등한시했거든요. 그 같은 이분법적 사고의 패턴을 이제는 교회가 무너뜨리고, 교회주의도 무너뜨려야 겠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으로 모든 것을 끌어들이려고 하기보다는 우리가 교회가 되어서 세상속으로 나가야겠고, 우리가 머무는 삶의 현장 곳곳이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주권이 임하는 곳이 되는 그러한 세상을 만들어가야되겠죠.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려면 저를 포함한 목회자들이 좀 더 바른 신학과 성경에 근거하여 선포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기자: 기존의 극단적인 이론원적 시각 수정, 강단에서의 바른 신학함에 기초한 선포, 이런 문제들을 말하면서 목회자들의 역량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한국의 신학교 교육체계는 혁신이 절실한 수준입니다. 일부 교단 신학대들은 졸업장을 너무도 쉽게 내주어 자격없는 목사 양산에 일조하기도 하고요. 또 성실히 공부하여 졸업했다 하더라도 짧은 몇 년의 시간동안 배운 것으로는 부족해 현장에서 고독해하고 방황하는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대형교회가 이러한 문제들에 한국교회에 대한 공동체적 책임감을 가지고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없는가요.
송태근: 교회는 마땅히 책임감을 가져야 하고 그것이 존재해야 할 사명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목회자 수준 문제는 사실 간단한 문제가 아니고 또 대형교회도 책임이 있지만 교회가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 저는 학교의 신학교의 입학제도부터 손을 봐야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총신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지만 일단 학생들이 불과 몇십분의 면접을 보고 데이터에 기초하여 합격여부가 결정되는데, 문제는 합격한 그 순간부터 이 사람들이 바로 전도사라는 직분을 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검증된 사람들을 입학시켜 교회에서 제대로 된 직분자가 사역하게 하고 또 그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며 한국교회 공동체 일꾼으로 키우는 것, 이것은 교단 신학교들이 중지를 모아서 고민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편 교단 신학교에는 신학생들이 어마어마하게 모이고 재수, 삼수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세시대에도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신학교에 지원했다고 해요. 그런데 그들이 몰려드는 목적은 뭐였을까요.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어느날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발코니에 앉았는데 그 때 마침 각국에서 보내온 헌금 주머니들이 도착했어요. 그것을 보고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이제 사도들의 '은과 금이 없어도' 시대는 지나갔네." 이에 아퀴나스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은과 금은 있지만 '일어나 걸으라'고 한 예수의 능력은 잃어버렸습니다." 오늘날 신학생과 목회자들도 양심적으로 자성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세에 교회는 국왕임명권 보장받고 국가는 교회에 부를 제공해주는 이런 공생관계가 오늘 시대에야 똑같지 있진 않지만, 문전성시를 이루는 신학생들이 진정으로 자기를 비워내는 삶과 예수의 십자가의 삶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삶의 결단인지를 끊임없이 되물어야 하지요.
기자: 삼일교회에는 목회자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대외적으로 운영하고 있지요.
송태근: 목회자 재교육 문제는 저도 오랜시간 마음에 희망처럼 품고 있는 꿈 중 하나입니다. 제가 부교역자 시절 대형교회에 있었는데 4년동안 거짓말하지 않고 정말 너무 바빠서 책 한자 읽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목사들이 신학교 떠나면 공부할 여건이나 시간, 재교육의 기회등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이라는 것이 신학과 역사와 문학이 모아져서 성령의 감동에 의해 텍스트가 된 것이죠. 그런데 단 몇 년의 신학교육 과정으로 이 성서 텍스트를 주해하는 역량을 갖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실제로 많은 목회자들이 주해를 잘 못합니다. 이것에 대해 고민하다가 2년 전에 오르도토메오라는 아카데미를 2년 전 설립했습니다.
오르도토메오는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이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멸하며"라는 말을 했는데 여기서 '분별'이라는 말의 헬라어가 오르도토메오예요. 이 용어는 전쟁 진입을 위해 길을 똑바로 닦는다는 로마군인들이 쓰는 공병용 단어를 바울이 채용한 것입니다. 길을 닦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이예요, 잘못 닦으면 그 길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다 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런 맥락에서 목회라는 것이 목회자들의 엄중한 책무인데, 그런데 목회자가 텍스트 자체를 주해 못하고 해석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인 거지요. 그래서 이 아카데미를 설립해서 최고의 신학대 교수님들을 모시고 학기제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백석대 신약학 교수께서 공동서신을 원전으로 강독하시는데 반응이 매우 좋습니다. 교회와 교단을 떠나서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지만 학기별로 30-40명 규모로 운영합니다. 밖에서 볼때는 낭비스럽게 보일 수 있으나 이 같은 프로그램들이 한국교회 밑거름이 될거라 믿습니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