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3편 6-18절, 누가복음 6장 27-36절
[원수 사랑이 가능할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신약성서의 말씀은 마태복음서의 산상설교와 매우 유사합니다. 누가복음서에서는 산이 아니라 평지에서 이 말씀을 하셨기에 평지설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산상 설교이든, 평지 설교이든 오늘 본문 말씀의 핵심은 "원수사랑"입니다.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 주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한쪽 뺨을 치면 다른 쪽 뺨을 돌려대며,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 속옷도 내어주고,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빌려간 사람에게 되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이런 삶이 가능할까요? 저는 이렇게 사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렇게 살다간 어쩌면 바보취급을 당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인들 사이에서도 막상 미움이 싹트면 화해하기는커녕 둘 다 교회를 떠나 버리는 일을 숱하게 보아 왔습니다. 만약에 이것이 현실이라면 예수님의 이 설교는 도저히 실현불가능한 것일까요? 만약 불가능하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불가능한 것이니 아예 포기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실천해 보려고 애써야 할까요?
마태복음서나 누가복음서가 모두 이런 놀라운 사랑의 실천을 말하는 이유는 첫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세상 사람들과 달리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닮아 진정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로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자기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만 똑같이 잘 해주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더 높은 단계의 사랑,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체험했던 그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인간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인간이 어떠한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즉, 첫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생활, 즉,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헌금하는 종교생활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삼은 것이 아니라, 더욱 놀라운 사랑의 실천, 즉, 세상의 윤리를 뛰어넘은 도덕적 탁월성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삼았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께 찬양과 예배를 드리고, 주일을 거룩한 주님의 날로 지키고, 성경을 공부하고, 헌금을 하고 교회 활동에 시간을 내어 봉사하고 전도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지고, 심지어 자신의 욕망 충족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착각하는 왜곡된 신앙을 지닌 많은 이들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허공의 메아리나 울리는 꽹과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한편 교회가 욕망의 수단이 되거나, 자기보존과 성장만을 위한 하나의 제도나 체제로 타락하거나, 교인들이 거룩한 체 하며, 경건을 가장하여 자신들이 매우 신실한 그리스도인양 뽐낼 때,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닮으려는 이들은 교회에서조차 많은 상처를 입고, 외롭고, 쓸쓸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자녀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창조적 자유는 온데간데없고, 진리의 말씀 또한 들리지 않으며, 기쁨을 동반한 봉사 대신 마지못해 실행하는 나약한 의무만 남게 됩니다. 이런 교회는 점차 시들어지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아닌 돈을 섬기고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우상 숭배에 물들게 되고, 소수의 권력과 불의한 돈으로 운영되는 악마적 공동체가 됩니다.
[한 신학생의 기도]
최근에 우리 교단의 목사를 키워내는 한신대 신학대학원 채플 시간에 한 신학생이 드린 기도를 읽게 되었습니다. 내용이 너무 절실하고, 오늘날 한국 교회와 목사후보생들의 삶의 단면을 정확하게 그려 내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후보생으로서 교회에서 겪는 일들과 고민들이 기도에 오롯이 들어가 있고,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볼 내용들이기에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다소 길지만 소개하려고 합니다. (기도하신 분에게 설교에 인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고, 사생활 보호를 위해 실명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주님, 우리를 조금 더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우리는 이른 사람은 19살부터 자신이 자란 공동체에서 떠나, 다른 곳에서 사역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목회적 돌봄을 충분히 받지 못했고, 충분히 공감 받지 못했고, 충분히 격려 받지 못했습니다. 한창 성장해야할 20대에, 낯선 곳에서 눈치를 보면서, 이미 완성된 그리스도인인 척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내면의 어떤 부분은 여전히 어린 아이인 채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성장했고 어느 단계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지 관심 가져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학교로, 사역지로 동분서주하는 동안 점점 탈진해갔습니다. 몸과 맘이 상하는데도 잘 해야 한다는 당위에 매달렸습니다. 아이들과 교인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우리가 얼마나 지쳐있는지 물어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지워진 여러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지 못했다면서 스스로 비난했습니다. 사실 그 모든 일을 다 잘 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인데도 말입니다. 완전한 이상을 그려놓고는 우리가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며 자기비하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멈추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아버지 제발 도와주소서. 교회가 좋아서 이 자리에 왔는데, 우리는 더 이상 교회에서 자기 자신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 가는 것이 싫어지고 돌아오고 나면 쓰러지곤 합니다. 교회에 가는 날이면 불안합니다. 누군가에게 평가받을까 봐, 실수를 하게 될까 봐 불안합니다. 우리는 기가 죽어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니까, 어두운 면에는 눈을 감은 채, 유쾌하고 유능한 체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러고 나면 지쳐 눕습니다. 내가 아닌 사람으로 사는 것은 힘에 부칩니다. 주일에 돌아올 때면 막막합니다. 목사가 되고나면 이제 순전히 당위로만 교회에서 일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음이 상할 때면 자존감이 땅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어떻게 예수님의 정의와 행복을 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너그럽게 보시고 나를 건져 주십시오.
주님, 우리는 진정한 자신으로 살고 싶습니다. 가식 없이 대화하고 참된 친교를 누리고 싶습니다. 해야 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것, 즐거워하는 것으로 동료들과 교인들을 돕고 싶습니다. 또한 공동체로부터 지지받고 싶습니다. 내적인 성장을 위해서 용기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자존감을 갖고 살고 싶습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당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삶으로써 대학원의 모두가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대견한 딸과 아들이 되는 것이 우리 소망인 줄을 하나님께선 아십니다.
그러니 주님, 신학교가, 나아가서는 목사들의 조직인 노회가 따뜻한 교회가 되게 해주십시오. 더 이상 다른 사람인 척하지 않아도 되고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안전한 곳이 되도록 해주십시오. 우리의 봉사에서 강제를 벗겨주시고 자신의 의지와 은사대로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오직 스스로 원한 사랑의 실천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기쁨을 충분히 누리게 해주십시오. 우리에게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예배를 허락해주십시오. 학생이나 사역자가 아니라 그저 그리스도인으로 주님과 만나고 싶습니다. 우리의 아픈 곳을 위로해주며, 우리가 누구인지 다시 새길 수 있고, 참 그리스도인은 어떤 행복을 누리며 사는지 알려주는 말씀을 듣게 해주십시오. 주님 우리의 영적 성장을 응원하는 공동체를 주십시오. 주님을 따르는 길에 함께 갈 동무와 이끌어줄 길잡이를 보내주소서. 우리는 영적 지도가 필요합니다. 주님, 소속의 긍지를 구합니다. 한신대 대학원생이며 우리교단 교역자인 것이 자랑스러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럴 수 있도록 품위와 생존을 보장해주십시오. 교역자들이 참 자신으로 살고 그 삶이 정말 행복할 때 비로소 교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길이 진리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 나를 건져주시는 분이십니다. 부디, 지체하지 마십시오.
이 모든 말씀 우리 한명 한명을 따뜻한 눈빛으로 격려해 주시는 하나님께, 사랑이 많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바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소망이 맞는지 겸손히 아룁니다. 아멘.
[참된 신앙 공동체를 향하여]
저는 오늘 이 기도의 내용을 여러분과 함께 고민해 보고 싶습니다. 이 분처럼 우리는 모두 어느 공동체에 속하든지 그 속에서 참된 자기의 삶을 누리고 싶은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사회에 적응하면서 적당한 가면을 쓰게 됩니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때론 감춰야 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때론 굴욕도 참아야 하고, 힘들고 지쳤을 때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의연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거꾸로 생각해 봐 세상이 달라 보일거야』라는 책에 나오는 중학교 2학년의 시를 하나 읽어 드리겠습니다. 시의 제목은 "덫"입니다.
"덫"
나는 만화도 게임도 하지 말아야 하는 사람이고
나는 항상 조용히 수업을 들어야 하는 학생이고
나는 교복을 줄이지 않고 단정히 입어야 하는 모범생이고
남들에게 당하는 비교도 없어야 하는 1등이고
나는 다른 집 장남보다 훨씬 뛰어나야 하는 장녀이고
나는 항상 동생들에게 '모범'이라는 것을 보여야 하는 첫째이고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동생에게 양보할 줄 알아야 하는 언니이다.
나는 언제쯤 이런 덫으로부터 풀려서
나답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 사회가 강요하는 덫에 걸려들어서 정말 자기다운 모습으로 참된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현대인들은 진정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자신의 삶을 충분히 나누고 진정한 자기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공동체를 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이 신학생이 기도한 대로, 중학교 2학년의 바람대로 따뜻하고,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며 다른 사람인 척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곳이 될 수 있을까요? 억지로 봉사하는 곳이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의지와 은사대로 섬기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본인이 원하는 사랑의 실천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기쁨을 충분히 누리는 우리 공동체, 모든 직분을 떠나서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주님과 만날 수 있고, 서로 아픈 곳을 위로해 주며, 우리의 정체성을 되새기며, 영적 성장을 위해 서로 응원하는 공동체가 바로 "우리 생명사랑교회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으로 품위를 지키며, 자신의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고, 교역자들이 거짓된 위선자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보이는 목회를 하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 인생과 하나님]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의 말씀은 이런 질문과 고민을 해결해 줄 실마리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과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첫째로는 우리 인생이 유한하고, 우리 자신은 창조자가 아닌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풀과 같고, 피고 지는 들꽃 같아, 바람 한 번 지나가면 곧 시들어, 그 있던 자리마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한낱 티끌에 불과한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제 잘났다 자랑한다고 해도 도토리 키재기이며, 화려하고 멋있고 위대해 보인다 하여도 영원하신 하나님에 비하면 한순간의 꿈인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비난할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고, 그저 그렇게 짧은 인생 서로 의지하고 기대고 솔직하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며 살아도 괜찮습니다. 우리 인생이 이렇게 짧고 보잘 것 없는 것이기에 오히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채근담(菜根譚)』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저 하늘과 땅은 영원토록 있지만, 이 내 몸은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고, 인생이란 다만 백년에 불과한 데다, 하루하루는 쉬이 지나가 버리니, 다행히 그 사이에 태어난 이들은 삶의 즐거움을 몰라서도 안 되고, 또 삶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서도 안 된다."(天地有萬古, 此身不再得. 人生只百年, 此日最易過. 幸生其間者 不可不知有生之樂, 亦不可不懷虛生之憂. 『菜根譚』 107장)
이렇게 자신의 존재의 미약함을 제대로 안 사람은 동시에 하나님의 위대함과 섭리와 놀라운 사랑을 간구하고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삶이 유지된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공동체가 사랑이 넘치는 참된 신앙 공동체가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올해 초부터 제게 여기저기에서 다양한 주제의 강의를 하도록 하셨습니다. 서양철학사 30주 강의와 같이 제가 미리 계획한 정기적인 것도 있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저를 불렀고, 저는 주님의 뜻으로 알고, 가서 복음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제가 했던 강의 제목들을 잠깐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기독교 교육," "역사적 예수와 누가복음의 잃은 아들의 비유," "교회의 사명과 섬김 - 바람직한 목회자 청빙을 위하여," "니체와 중용," "철학과 신학의 만남" 등입니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저마다 다른 특색을 지닌 이들을 만나게 되지만, 제가 신학과 종교철학을 공부한 목사이기 때문에, 강의하는 내용과 참여자들과 함께 토론하고 생각해 보는 것은 대동소이합니다. 그것을 간단하게 요약해 보라고 한다면, "오늘날 세계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떠한 삶을 사는가?" 하는 물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실 저를 부르는 곳은 이미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이들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진지하게 이런 내용을 가지고 함께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공지능 바둑프로그램인 알파고가 세계 최강 바둑기사인 커제 9단을 압도적으로 이기는 모습에서 보는 것과 같이 첨단과학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이때에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오히려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 종교에 전혀 관심이 없고, 도리어 강압적인 전도를 경멸하며 진리의 말씀에 귀를 닫아버린 현대인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그저 유대인들의 역사책이거나,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이야기들의 모음 정도로 생각하고, 평생에 걸쳐 한번 들춰보지도 않을뿐더러, 교인들을 딴 세상 사람처럼 여기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들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들을 가르쳐 지키게 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는 삶으로 보여주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복음의 소식을 들으려 하는 이의 상황과 수준에 맞게 잘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교회 저 교회에 강의를 다녀보면 한국의 평범한 많은 교인들이 이 두 가지에서 모두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고,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 바로 알지도 못하고 살지도 않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올바르고 진실하게 전하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두 가지가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중요한 첫째 계명이 바로 하나님 사랑이고(마태 22:37), 우리는 그 명령에 따라 우리들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시편 말씀에 의하면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사랑이 그지없으십니다. 두고두고 꾸짖는 일은 하지 않으십니다. 즉, 뒤끝이 없으신 분이시기에 화를 끝까지 품지 않으십니다. 공의를 세우시고, 억눌린 모든 사람의 권리를 변호하시고, 부모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 늘 우리를 그렇게 생각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참된 신앙공동체를 만들고 세워 나가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고, 당신의 나라를 일굴 공동체를 만드시는데 우리가 제멋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려고 하니 문제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오늘 임직을 받으시는 두 분 장로님과 다섯 분의 권사님, 그리고 명예 권사로 추대 받으시는 세 분의 집사님! 여러분들이 언제나 기억하셔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주님이 모든 것을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사용하시기에 우리는 종종 우리가 한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겠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임직 받으시는 분만이 아니라 우리 생명사랑 가족들 모두는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만을 경외하십시오. 주님 외에 두려워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경외할 때만이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는 주님의 사랑을 맛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만이 참된 사랑의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참된 생명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불가능의 가능성]
원수를 사랑하는 일! 나를 저주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일, 무엇이든 베풀고 되돌려 받지 않아도 전혀 서운하지 않고,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면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나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고 주님의 법도를 기억하여 따를 때 이 모든 것은 가능합니다.
1924년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하려다가 두 번 실패하고 두 명의 대원을 잃은 산악인들이 런던의 한 회관에서 에베레스트 산의 사진을 배경으로 하고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때 한 대원이 뒤를 돌아 그 사진을 보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에베레스트야, 네가 지금까지 두 번이나 우리를 정복했지만 앞으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곤 청중을 향해 돌아서서 이렇게 계속 외쳤습니다. "왜냐하면, 너는 더 이상 자랄 수 없지만 우리는 계속 자라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우리도 이 사람들처럼 외쳐 봅시다. "우리 인생은 풀과 같고 피고 지는 들꽃 같아 바람 한 번 지나가면 곧 시들지만, 주님을 경외하면 우리는 영원에서 영원까지 자랄 것이다." 우리 안에 오롯이 담긴 하나님의 형상은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뜻에 따를 때 더욱 자라게 될 것이고, 그러면 언젠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롭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 한 걸음 더 나아갑시다. 주님께 나아갈수록 우리는 더 자라납니다. 우리가 주님만큼 자랄 그날이 오면 동서로부터 세상 사람들이 우리 공동체로 몰려 올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우리가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을 진지하게 실천하도록 힘과 용기를 주십시오. 우리의 목숨과 뜻과 정성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해 주십시오. 주님을 사랑함으로 누리는 은총으로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게 하시고, 그 사랑의 연습으로 원수도 사랑하는 자리에 이르게 하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오니, 주님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여 주시고, 우리가 주님 곁을 떠나지 않게 하소서. 언제나 우리에게 사랑과 은총을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 여기에 들어가시면 설교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SoulLoveCommunity/UkVO/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