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본지 자문위원인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지난해 9월 [수유너머R]에서 진행한 요한복음 강해 세 번째 원고입니다. 본 글은 김경재 교수의 숨밭 아카이브에 실린 글입니다. 이번 강해에서 김 교수는 요한복음 3장에서의 니고데모와 예수와의 대화에서 중생의 의미를 문화 신학적 관점에서 분석했습니다.- 편집자주
오늘의 주제: 중생(重生), 인격도야의 수행인가 진리에 의한 거듭남인가?
-요한복음서 3장 1-16절, 니고데모와 예수와의 대화-
[1] 들어가는 말
① <니고데모와의 대화>라고 일컫는 이 설화(요3:1-15)는 불과 16절 분량의 짧은대화체로 구성되어 있으나, 요한복음서 기자(혹은 공동체 )가 파악한 그리스도교 복음의 본질을 유대교 및 헬라철학과 차별화 하면서 드러내는 중요한 설화이다.
② 대화는 니고데모라는 유대인 랍비와 예수 랍비와의 대화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복음서 기자는 두사람 개인간의 대화가 아니라, 유대교 신자들과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변증하는 것이다.(3:2절, 11절에 '우리는' 이라는 집단인격체 언어표현참고)
③ <하늘의 일, 땅의 일 / 하늘로 올라간자, 하늘로서 내려온자>등 당시 헬라적 영지주의 종교의 <위/아래, 빛/ 어두움>의 이원론적 구도를 차용하여 말하지만, 구원은 사후에 천계에로 올라가는 영혼의 상승행위를 통해 이뤄지지 않고, <지금-여기> 이미 와있는 <하나님의나라>를 볼수 있는 마음의 눈(심안)과 영혼의 속눈(영안)이 열려졌느냐 아니냐로 결판난다. 요한복음서에서 구원개념은 매우 <현재이고, 종말은 현재적 종말론>이다.
[2] 강해
① 요3: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바리새인(pharisee)이란 이스라엘 종교사의 유대교 시대에 철저한 율법준수를 주장하는 경건한 유대인들의 집단. 세속화나 헬레니즘문화에로의 동화를 저항하면서 철저한 야훼신앙을 견지하려는 집단적 학파 운동. 유대인 민중의 도덕과 종교의 지도자로서 존경을 받는 무리들. 그들의 지나친 율법주의가 위선적임을 예수가 비판함.
◈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산헤드린sanhedrin, 공의회 회원) 지체높은 신분임을 암시.
② 요3:2.<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밤은 실질적 방문시간대 이면서도 상징적이다. 밤은 어둠이고 은폐이며 인간실존이 무명(無明) 상태에 있음을 암시한다. 니고데모의 사회적 지위, 바리새파인으로서 종교적 경건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과 관계없이, 아니 그런 것들로 인해 더욱더 <밝음의 빛>으로부터 인간의 본래성은 치장되거나 무장되어 진리로부터 격리될 수 있다.
◈ '랍비'(Rabbi)는 유대교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율법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선생을 의미한다. 유대교 지도층 사이에 퍼져있는 예수에 대한 의심(혹세무민하는 이단종파 우두머리)을 씻고 무명(無名)의 예수를 인정한다.
◈ 인정의 근거는 니고데모가 면밀하게 조사하고 직접 목도한 <예수가 행한 표적들>에 근거한 판단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란 이스라엘의 모세나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보내신이들이라는 신념을 전제한다. 세상의 평범한 기준으로는 언제나 초자연적 기사이적, 기이한 초능력이 종교성의 진위판단과 그 영험성의 실증물로서 평가된다. 예수와 요한 복음서는 그것을 비판하고 넘어설 것을 요청한다.
③요3:3.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핵심 단어는 <거듭난다> 가 그것이다. 초자연적 기사이적같은 '표적'을 보고 종교에 입문하거나 관심하는 것은 아무의미가 없다는 비판임과 동시에, 그리스도교에서 핵심은 <네가 중생했는가? 거듭났는가? 새사람이 되었는가?>가 여부가 본질적인 것이다.
◈ 거듭난자는 어떤 결과를, 혹은 변화를 나타내는가? 요한복음에 의하면 거듭난자는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는 자>가 된다. 여기에서 <본다>(eidenai/ eidos) 단어는 그리스적 사유전통에서는 <본질직관>을 의미하고, 히브리적 사유전통에서는 <경험하는 앎>을 의미한다. 요한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유대묵시적 종교전통에서의 기대처럼 <의인들이 들어갈 미래의 왕국>이 나라이라기 보다는 <지금 여기에 이미와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재를 경험하는 앎>으로서 <현재화, 내면화, 실존화>하고 있다.
④ 요3:4-5.<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수 없느니라>
◈ 거듭나는 일, 중생이 얼마나 어렵고 불가능한 일인가를 니고데모는 생물학적 의미에서어머니 모태로부터 다시나는 것이 불가능함으로 강조한다. 니고데모의 이 어리석은 듯한 되물음은 우리가 니고데모를 어느정도 인물로서 평가하는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적어도 유대교 최고 지성인을 모독하지 않는다면, 니고데모의 역질문은 '진지한 인간성 개조의 어려움을 경험한 절규'로서 이해함이 마땅하다. 불가식으로 비유하자면, 사람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이미 부처라는 앎은 <본각>(本覺)이지만, 실제로 수행정진을 통해 참 깨달음에 이른(始覺) 사람은 현실적으로 얼마나 될가?
◈ 요한 복음은 예수의 입을 빌려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비의를 <물과 성령으로 다시나는 종교>라고 갈파하는 것이다. <물로 다시난다>는 상징은 종교일반의 입문의례로서 <세례, 혹은 정화의식>을 말한다. <물로서 행하는 진지한 종교의례>가치는 무시되지 않지만, 불완전하고 준비단계요 참다운 중생은 <성령으로 다시남>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 물로서 행하는 의식은 상징의 종합이다. 물은 <上善若水)라고 하듯이 더러움을 씻음, 만물을 육성함, 낮아짐과 평화의 덕성, 혼돈의 해체를 통한 재탄생을 상징한다.
성령으로, 성령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거듭난다는 말은 인간적 종교수행, 도덕적 노력, 철학적 자기성찰을 넘어서는 <진리자체의 빛과 생명의 능력>을 직증하고 경험하면서 <생래적 혈육적 인간성이 일단 철저히 부정되고 새로워짐>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자력구원>과 <타력구원>인가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적합하지 않다. 불가에서 말하는 <참 깨달음>도 <주체-객체>이분법을 넘어선 자리요, 기독교의 <거듭남>의 체험 또한 그렇다.
⑤요3: 6-8.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 '육으로 난 것은 육,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는 말은 플라톤 철학에서 말하는 영육이원론을 말할혀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적사고에서는 육과 영은 인간을 구성하는 실체적 구성소(實體的 構成素)가 아니라 <육적인 원리가 지배하는 총체적 인간>과 <영적인 원리가 지배하는 총체적 인간>을 의미한다. 전자는 생리적 탐욕, 자기집착, 자기과시, 타인지배, 허영과 명예욕에 따라 사는 삶이다. 후자는 자유로움, 진선미 사랑, 자비와 사랑, 배려와 기쁨등이 충만한 존재방식이다. 육(肉,sark)의 본질은 분열과 허무인데 반하여, 영(靈, pneuma)의 본질은 통일과 충만이다.
◈ <성령으로 난 사람>의 특징은 <바람이 임으로 부는 현상>으로 비유하였다. 바람의 특징을 자유로움, 예견불가능, 제어불가능으로 파악한 고대인들의 삶의 경험에 기초한다. 히브리적 사유체계에서 '영'(pneuma)는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방식(存在方式,Seinsweise Gottes/ Mode of God)으로서 궁극적 실재의 내재적 초월성(內在的 超越性)을 의미한다.
⑥요3:9-13. <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 니고데모는 지성과 이성과 도덕의 차원에 머물고 있는 인간을 대표한다. 그의 실존은 진지하고 성실 할수 있으나 <진정한 자유와 초탈의 영적 차원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칸트가 말하는 <이성의 한계안에 있는 종교>를 주장하는 한, 기독교는 <한갖 고상한 윤리적 도덕종교, 산상수훈에서 종교적 천재의 말씀>을 듣는 종교에 머문다. 오늘 성경은 그것은 아무리 진지해도 <땅의 일>이라고 한다. <하늘의 일>이란 감성, 도덕성, 지성을 그 안에 내포하면서도 그차원들을 초월한 <생명의 자기초월 갈망>이 <위로부터 오는 신적 은총의 빛과 능력>에 통전되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 켄 윌버(Ken Wilber)의 홀라키적 온우주론에서 말하는 '존재의 대원환'(Great Nest of Being)에 따르면, 물질(물리학)-생명(생물학)-마음(심리학)-영혼(신학)-신령계(신비학)-절대우주심(진여자성, 프뉴마, 一者)로 존재의 차원이 구별체험되는데, 상위수준은 하위수준을 감싸고(envelopes) 내포하지만(enfold), 아래차원에 머무는 한 그 상위차원을 이해하지 못한다. 요한 복음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pneuma) 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⑦요3:14-16.<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 니고데모와 예수와의 대화가 결론에 이르는 형국을 나타낸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육으로 난 상태>의 실존에서 <영으로 난 상태>에로의 자기초월의 가능성이 당시 신플라톤적 영향을 받았던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가 제시하는 '신비한 지식'(靈知)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을 부정하고 육체로 인간가운데 오신 '로고스 화신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의 진정한 만남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을 그는 '예수를 믿음'이라고 표현한다. 맏음은 예수에 관한 기독교적 교리의 수락이 아니라, 그 생명과의 '실존적 遭遇'(encounter)를 말한다.
◈ 예수가 그 메시야적 임무를 명실공히 담당하기 위해서는 그가 가르치는 '교훈들과 표적들'로서는 않되고 <죽음을 통과한 생명의 고양(高揚)>이 요청되기 때문에, 모세와의 유비에서 처럼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한다.
◈ 유명한 요한복음 3:16절을 마틴 루터는 <복음의 축소형 구절>이라고 말한다. 이 한구절의 선언을 통하여, 초대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는 세상현실에 대한 모든 형태의 비관적 염세주의적 세계관, 몰역사적이거나 탈역사적 구원관, 그리고 심지어 인간의 육체성이나 물질을 폄훼하는 이교적 사상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근본태도를 그리스도교는 "성육신적 영성"( the incarnational spirituality)이라고 부른다. 성육신적 영성을 결여하거나 부정하는 기독교는 엄밀하게 말하면 이교적이고 반기독교적 이다.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신 세상성>을 부정하며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을 무효화 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