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서 7장 8-14절, 마가복음서 3장 1-6절
[인간의 길과 목회]
우리교단의 목사후보생들을 교육하는 한신대학교 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에서 발간하는 『세계와 선교』라는 잡지가 있습니다. 작고 얇은 책이지만 목회자에게 필요한 최근 신학의 연구방향이라든가, 세계 교회의 동향, 목회정보와 자료, 해외 선교 현장 정보, 학교소식 등을 다양하게 제공합니다. 이번 6월 1일에 발행한 227호에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며 한국교회의 개혁방안과 미래에 대한 글들을 비롯해 여러 좋은 글이 많이 실렸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두 분의 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하나는 한신대 철학과 장일조 명예교수님의 짧은 글이었는데, 제목이 이렇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의 길-" 2쪽 밖에 안 되는 글인데 철학과 선생님다운 글입니다. 앞부분을 조금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신과 인간과 자연이 변증법적으로 통일된 전일적 세계체제에서, 정신적 신과 물질적 자연의 대우주적 양극에, 정신적 영혼과 물질적 육체의 소우주적 양극으로 통일된 인간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어렵지요? 계속 이런 문체로 글을 쓰시는데, 사실 핵심은 간단합니다. 인간이란 육체적 안락을 추구하는 동물적인 몸과 고귀한 이상을 추구하는 정신을 함께 가진 존재인데, 인간이 가야할 참된 길은 이기적이고 육체만을 만족시키려는 물질적 탐욕을 비워내어 오직 하늘의 뜻을 따라 온 생명을 살리는 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길이 동서고금의 모든 고전과 경전들이 가르치는 길이며, 인간의 운명을 위한 궁극적 진리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제 관심을 끈 또 하나는 군산성광교회에서 오래도록 사역하신 양태윤 원로목사님의 "내가 다시 목회를 하다면"이라는 글이었습니다. 양 목사님은 은퇴하셨지만, 건강하고 열정이 남아 있는 터라, 목회하고 싶은 소원이 계속 꿈틀거리는데 만약 다시 목회를 할 수 있다면 세 가지를 꼭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첫째는 '성직주의'의 탈피입니다. 우리교회가 지향하는 평신도 중심의 사역과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모범삼아 모든 인사권, 경제권, 행정권을 평신도에게 위탁하고, 형식과 의전과 규모와 숫자와 행사 등의 외적 목회 대신 오직 복음의 본질로 돌아간 목회를 하고 싶으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제자도'에 충실한 목회입니다. 한국교회는 양적 성장에 놀랄만한 진일보를 이뤄냈지만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의 형성에는 실패했다는 자성과 함께, 목사는 많지만 참된 목자는 찾기 어렵고, 교인은 많은데, 진정한 신자가 없다 하시면서, 예언자 예레미야의 탄식처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는(예레미야 5:1) 절박한 인물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영성의 목회자'가 되는 목회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는 무언가를 열심히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목사들이 너무 많다고 탄식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다시 목회를 한다면 인간이 지녀야 하는 기본적인 도리뿐만 아니라 말과 행실이 일치하고, 정직하고, 온전하며, 겸손함으로 참고 견디는 영성 충만한 목회자이고 싶다는 것입니다.
사실 양 목사님의 세 가지 목회는 하나로 관통됩니다. 교회라는 제도와 조직을 유지 발전 성장시키기 위한 목회를 할 것인가 아니면 먼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는가 입니다. 사실 목사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장일조 교수님의 말대로 참된 인간의 길을 걷는다면, 아마 행복한 목회가 되고, 모든 생명체가 자라듯, 그가 목회하는 교회 또한 건강하게 성장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교회활동을 하는 것 사이에 큰 괴리가 있고 심지어 반대되는 것 같이 보이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예언자 스가랴의 선포]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성서의 말씀도 비슷한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예언자는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에 돌아와 살고 있는 유대 사람들 가운데서 활동했습니다. 스가랴라는 이름은 "야훼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학개와 더불어 유대 사람들에게 중단된 성전 건축을 계속하도록 격려하면서 무너진 이스라엘의 신앙을 다시 세우는 것이 스가랴의 역할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행해야 하는데, 스가랴 예언자는 이전의 모든 예언자들이 외쳤던 것과 동일한 것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즉, 공정하게 재판하고, 서로 관용과 자비를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을 억누르지 말고, 동족끼리 해칠 생각을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길은 올바른 사회를 만드는 것, 즉, 공의와 자비로 서로에게 대하고,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라고 스가랴는 강조하고, 이전에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온갖 불행이 닥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는 7장 앞부분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너는 이 땅의 온 백성과 제사장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가 지난 칠십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며 애곡하기는 하였으나, 너희가 진정, 나를 생각하여서 금식한 적이 있느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도 너희 스스로 만족하려고 먹고 마신 것이 아니냐?'" 이 말씀은 그동안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종교적 행위가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종교적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즉, 스가랴 예언자는 모든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 생활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윤리적 삶을 담보하지 못했던 것을 비판하며,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올바르게 살아갈 것! 더욱 더 사랑하는 삶을 살 것에 대해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윤리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형제자매와 이웃을 위해 베풀지 못하는 삶을 살면서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채우는 것이라고 스가랴 예언자는 정곡을 찌릅니다. 이웃 사랑 없는 하나님 사랑은 너무도 쉽게 자기 사랑, 자기 이익만을 위한 것으로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정말 위험하고 무서운 것은 자기를 위해 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 뿐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이들을 박해하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보다 생명을]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서의 본문이 보여 주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앞으로 나오게 한 다음 손을 내밀게 하시어 그 손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런데 이 일로 바리새파는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죽일 모의를 합니다. 평소에 원수였던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없애는 데는 한 마음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매우 짧지만 명확하게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편은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 선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은 그 예수를 고발하고 죽이려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는 목숨을 구하는 일이 선한 일이며 바로 그 일은 곧바로 실행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는 일은 사실 안식일이 지난 다음에 해도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루 이틀 그래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루 쯤 뒤에 고쳐준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얼마든지 당시의 율법인 안식일법을 지키면서 치유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부러 안식일에 회당에서 이 사람을 치유합니다. 그냥 하는 것이 아닙니다. 손 오그라든 사람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사람들 한 가운데로 불러 세우고,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안식일의 존재 이유와 안식일의 근원적 의미를 물으신 다음 이 사람을 고칩니다. 예수는 이 일을 통해 자신이 고발당할 것이고,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하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라는 물음에 잠잠한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화가 나셨고, 공감할 줄 모르는 차돌처럼 굳은 마음을 보시고 탄식하십니다.
예수님을 고발하고 죽이려는 사람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율법에 충실한 이들이었습니다. 오늘의 말로 고치면 교회를 중심으로 모든 교회의 활동과 행사에 열정적이고 교회가 가르치는 종교적 교리에 대해서 엄격하게 지키려고 한 이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신앙생활이 윤리적인 생활을 담보하지 않으며, 교회생활이 사랑보다 증오, 누군가를 정죄하는 것에 더 혈안이 되도록 하는 것인가 입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따라 고통당하는 모든 이들을 사랑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교적 열정으로 가득한 이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해야 하는 노동자, 농민 그리고 노예, 그리고 가축과 땅에게 쉼을 주기 위해서, 일주일의 삶을 돌아보고 더 활기차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제정되었던 안식일(신 5:14)이 어쩌다가 누군가를 고발하고, 누군가를 없앨 모의를 하는 수단이 되어 버렸을까요?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저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그 어디에서보다 신앙을 가진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훨씬 더 깊이 있는 삶의 대화를 나누었으며, 참된 인간미를 느껴왔습니다. 어떤 공동체보다 교회는 사랑이 넘치는 곳이었고, 고통당하고 아픔을 호소하는 이들의 친구가 되어 준 곳이었습니다. 교회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 확실하고, 그래서 그 은혜를 갚느라 목회자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 제가 이 곳 저 곳에서 만나는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요즘 교회는 예전의 그런 곳이 아닌 듯 합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제가 만나 왔던, 겪어 왔던 사람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때야 하는가?]
그제와 어제 인터넷에서 실시간 검색어로 계속 네티즌들에게 회자된 하나의 사건이 있습니다. 16일 금요일 저녁 SBS 뉴스는 "서울의 한 사립초등학교에서 수련회를 갔던 어린이가 같은 반 학생 4명에게 발로 밟히고 야구방망이로 맞은 일"을 보도했는데, 이 일로 인해 피해자 학생은 근육세포가 파괴되어 녹아내리는 황문근 융해증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이 사건을 처리하는 학교의 태도였습니다. 학교는 자체 조사를 하였지만 '피해자는 있지만 의도적으로 폭행한 가해자들은 없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가해자로 지목된 어린이 가운데는 재벌 회장 손자와 연예인 아들이 있었는데, 학교폭력위원회는 가해 아동들에게 아무런 처분도, 피해 아동에 대해 아무런 보호조치도 하지 않기로 했을 뿐만 아니라, 재벌 총수의 손자는 사과하고 화해하도록 노력하라는 권고 대상에서조차 빠졌습니다.
학교폭력위원회가 열리기 이틀 전에 학교의 조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걱정한 피해자 어머니가 이 학교의 교장을 찾아갔는데 거기서 교장이 한 말입니다. 물론 이 말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교장: 우리도 변호사를 써서 빈틈없이 대응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어머님) 애 데리고 나갈 거 아니에요. 그러실 거 아니에요, 이번 일 끝나면. 어떻게 아이를 이런 학교에 보내시려고 하시겠어요? 학교를 징계하는 건 교육청이 아니에요. (우리는) 법인 이사장님이에요. 교육청은 하나도 안 무서워요.]
학교의 수련회에서 4명에게 한 명의 학생이 집단구타를 당하는 일이 벌어진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피해자 어머니가 그 학교를 총괄 책임지는 교장을 찾아갔습니다. 그 어머니에게 교장이 하는 말이 이런 것입니다. 교육청은 무섭지 않고, 변호사를 써서 우리도 대응을 할 것이다. 그런데 이 학교의 홈페이지의 학교장 인사말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과 존경으로 하나되는 공동체, 꿈과 사랑이 영그는 학교. 우리 학교 홈페이지 방문을 환영합니다. 우리학교는 섬김과 나눔의 실천으로 따뜻한 리더십을 가진 바른 인재를 육성하기 위하여 숭의가족 모두와 함께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스러웠던 예수님처럼 600여 숭의 어린이 모두가 사랑받기를 소원합니다. 슬로건을 내세우기보다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이 있는 학교를 만들어가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눈치 채셨겠지만 이 사건이 벌어진 학교는 숭의초등학교이고 1년 교육비가 1,000만원이 넘어가는 명문 사립초등학교로 알려진 곳입니다. 그리고 이 학교는 학교법인 숭의학원 아래 있고 같은 법인 밑에 숭의여자고등학교, 숭의여자대학교가 있습니다. 이들 학교의 전신은 1903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A. 마펫(Samuel Austin Moffet, 1864년 ~ 1939년), 우리이름으로는 마포삼열 목사가 그리스도교적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평양에 세운 숭의여학교입니다.
이제 마포삼열 목사에 대한 얘기를 조금 해야겠습니다. 마포삼열 목사는 1890년 1월 25일 자신의 26세 생일이 되던 해에 서울에 들어옵니다. 1893년 평양에 정착하여 새 선교지부를 세우고 1934년 일본총독부의 암살 계획을 피해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45년간 한국을 위해 헌신한 분입니다. 이 분은 9년간 결혼도 미룬 채,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고, 평양 선교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평양 관찰사의 방해와 주변 사람들의 박해에도 사랑방을 이용하여 꾸준히 전도하였는데, 그러던 중 최치량(崔致良, 1854-1930)이라는 사람을 얻게 됩니다. 이 사람은 여관업을 하던 객주로서 술꾼이요, 도박과 색을 즐기던 이였습니다. 한마디로 난봉꾼이었지요. 그런데 마포삼열 목사를 만나고 사람이 변화됩니다. 마포삼열 목사가 엘린우드라는 분에게 쓴 편지 한 대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 가운데 한 남자의 투쟁은 대단히 흥미 있습니다. 그는 여관 주인이고, 상인인데 한 때 대단한 술고래요 노름꾼이었지만, 한국인들 사이에 존경을 받고 전 지역에서 아는 사람이 수없이 많은 자입니다. 그는 용감하게 그리스도인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곧 요주의 인물이 되었는데, 온갖 놀림과 조롱과 욕설이 그에게 쏟아졌습니다. 이 모든 것을 그는 선한 성품으로 잘 이겨내고 점점 더 확고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술은 끊지 못하고 힘든 싸움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전 친구들이 그를 실족케 하려고 계책을 짰습니다. 그들은 매일 그에게 와서 유혹하면서, 한국의 관습대로 술을 마셔야 한다고 윽박지르고 친구에게 의리가 없다고 노골적으로 욕했습니다. 그는 지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기도로 힘을 얻기 위해서 반복해서 친구들로부터 빠져나와서 이곳으로 왔습니다. 여러 번 그는 실족했고, 이는 그와 우리에게 큰 슬픔이 되었지만, 주께서 그를 지키고 계시므로 승리는 확실합니다. 그가 몰라보게 변했기 때문에 아내와 동생은 그를 '미쳤다'고 부르지만 그 변화에 즐거워하고, 기독교인이 된 것을 조롱하지만 우리가 그로 하여금 악한 일들을 버리도록 인도했다고 크게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이 남자의 개종을 통해 복음의 소식이 널리 퍼졌습니다."
마포삼열이 전도를 한참 할 때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깡패 청년 하나가 친구들을 동원하여 마포삼열이 사는 방 창문으로 돌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집안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 후 그는 장터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하는 마포삼열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오기가 생겨 다시 돌을 집어 그에게 던졌고 날아간 돌은 마포삼열의 턱을 정통으로 맞추었고,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그 때에도 마포삼열 목사는 그를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한다는 마음으로 이 청년을 향해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인격에 반한 이 청년은 마침내 마포삼열을 찾아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였는데, 그가 바로 한국교회 초대 7인 목사 중 한 사람이며 제주도 개척 선교사가 된 이기풍 목사입니다. 이처럼 마포삼열의 사랑과 희생으로 평양 개척 역사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였고, 미국 북장로회의 한국 선교 보고서에 따르면 평양에서 일어난 복음의 불씨는 점점 번져서 7명의 세례교인으로 시작하여 1949년에는 신도 수가 7만여 명에 이르고 세례교인 수만 해도 2만 5천7백91명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교 사학 재단들은 이런 삶을 살다 간 선교사들의 피땀과 희생에 의해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런 정신을 이어가야 할 학교의 교장의 태도가 저를 매우 힘들고 괴롭게 합니다. 저는 숭의초등학교 교장 한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을 물으며 진실되게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별로 없어 보인다는 사실에 직면할 때 저는 무척이나 외롭고 고통스럽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직전 강제 수용소에서 게슈타포에게 처형당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은 1944년 4월 30일 감옥에 앉아서, 자기가 결코 석방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느끼며, 제자이자 친구인 에버하르트 베트게에게 편지를 씁니다.
"내 신학적 사상들과 그것들이 도달하는 결론들에 자네가 놀라고, 어쩌면 걱정할 수도 있겠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자네가 가장 그리운 이유일세. 내 생각을 명확하게 만들기 위해 그것들을 함께 논의할 다른 적격자가 나한텐 없기 때문이네.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질문은 이걸세. 기독교란 정말로 무엇인가? 또는 참으로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정말 누구인가?"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오늘날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교회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이어야 할까요?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을 해야 할까요? 만약에 미친 운전사가 버스운전대를 잡고 돌진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사람들이 그 버스에 치여 죽기도 하고 다치기도 합니다. 그 때 목사가 해야 할 일은 죽은 사람들의 장례를 치러주고 다친 사람들을 찾아가 위로하는 것일까요?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까요? 더 이상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버스에서 그 운전사를 끌어 내리는 일에 나서는 것이 더욱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아닐까요? 미친 운전사를 내버려 두고 다친 사람만을 찾아다니는 것은 더 쉬운 일이 아닐까요? 운전사를 끌어 내리는 일이 더 좁은 길 아닐까요? 이런 좁은 길들을 마다하지 않고 나설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지 않을까요?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심을 기억하는 거룩한 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하고 이 땅에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창조된 세계는 신음하고, 고통 받는 이들의 울부짖음이 계속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 선배 중에 장애를 가진 분이 있는데 그분과 대화를 나누며 가슴이 저려온 적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이 형은 다리를 사용할 수 없어서 목발에 의지해서 다니는 데 서러울 때가 몇 번 있었다고 말하더군요. 첫 번째는 차에서 내려 걸어가는데 갑자기 비가 올 때입니다. 자신은 목발을 짚기 때문에 우산을 쓸 수가 없어서 한없이 비를 맞아야 했다더군요. 또 친구 결혼식이 있어서 찾아갔는데 예식을 마치고 피로연장에 갔더니 뷔페식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은 목발을 짚어야 하기에 접시를 들 수가 없어서 그냥 밥도 먹지 못하고 나왔다더군요. 우리의 예배와 기도가 이런 분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 것일까요?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실생활에서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며, 우리의 신앙고백을 통해 정말 세상이 좀 더 하나님 나라에 가깝게 되고 있는 것일까요? 또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예수께서 다시 우리들에게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너희는 목숨을 구하는 일! 생명을 살리는 일을 실제로 하고 있느냐? 이제 저와 여러분이 응답할 차례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감사하여 예배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이 주일예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피어나게 하소서. 많은 이들이 우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교회가 세상을 이끌어가고 비추는 빛이 되게 하시고, 교회가 부패를 막는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소서. 그리하기 위해 더욱 정진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스승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여기에 들어가시면 설교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SoulLoveCommunity/UkVO/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