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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 몸을 바쳐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마태복음서 13장 44-53절, 빌립보서 3장 3-14절

[마태공동체와 예수의 가장 큰 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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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 김진한 기자)
▲한문덕 생명사랑교회 목사

지난 주 설교에서 마태복음서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전쟁의 상처를 간직한 채, 거대한 제국 로마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뿌리인 유대교 공동체로부터 이중의 핍박을 받아야 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행하고자 하는 높은 이상으로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던 교회공동체였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공동체를 편하게 마태교회라고 불러 봅시다.

마태교회는 이제 막 생겨나는 신생 교회입니다. 이들의 뿌리는 유대교였습니다. 이들은 이미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고 있었고, 하나님의 가르침인 토라의 말씀들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새롭게 눈을 뜨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이들이 깨닫게 된 것은 바로 모든 율법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마태 22:34-40)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명기 6장 5절에 나오는 하나님 사랑의 계명과 레위기 19장 18절에 나오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두 가지의 계명을 예수님 당시에 존재했던 모든 성경이 말하는, 즉, 율법서와 예언서가 말하는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로 떨어져 있던 이 두 가지 계명을 함께 말씀하시고 두 가지 계명이 동등한 지위에 있도록 하신 것이 예수님의 뜻이었습니다.

즉, 정말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의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조문을 지키고, 여러 가지 구체적인 종교적 행위들을 통하여 첫째 계명, 즉,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열심히 찬양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물을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금하신 음식을 먹지 않으며,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하지 않으며, 각 절기에 따라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 죄를 고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로 자신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실천이 이웃을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도리어 이웃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못하는 사람, 정결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을 나누고, 삶에 지친 민중들을 정죄하는 수단과 도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예언자 전통에 서서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고, 가르치셨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태교회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 사랑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제대로 실현해 보고자 생긴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로마였습니다. 마태교인들은 사랑으로 세상을 변혁하려 했지만, 로마는 폭력으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며 세상을 지배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맞서서: 폭력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노력]

새로 생긴 마태교회가, 무차별적으로 가해지는 저 괴물 같은 로마의 폭력을 어떤 식으로 극복하고자 했을까요? 예수님은 산상 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 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마태 5:38-41)

폭력은 폭력을 낳습니다. 작은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만들어 냅니다. 한 대 맞으면 두 대를 때리는 것이 바로 비이성적인 폭력의 습성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는 율법이 매우 원시적이고 과격한 것처럼 들리지만 이 율법은 매우 합리적입니다.

복수(復讎)동태(同態)법,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라는 율법은 우선 폭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눈을 다치게 했다면 상대편도 눈만을 다치게 해야지 눈에다가 코나 귀까지 더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법에는 숨겨진 더 중요한 속뜻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눈이나 이를 다치게 해 놓고 돈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눈을 다치게 하거나 이를 상하게 하는 경우가 보통 언제 발생할까요? 물론 보통 사람들이 화가 나서 치고 박고 싸움을 할 때도 이런 일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서로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에 눈을 눈으로 갚으라는 말이 잘 들어맞지 않습니다.

고대에 누군가의 눈이나 이를 다치게 하는 일은 보통 주인과 종 사이에서 벌어집니다. 일을 게을리 하거나 잘못한다고 주인이 종을 체벌하였기 때문입니다. 종의 실수로 주인의 재산이 손실을 입었거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주인이 화를 참지 못하고 마구 폭력을 행하면 노예는 눈을 상하거나 이가 부러지는 등 매우 심각한 상해를 입게 됩니다. 이 법은 바로 이런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인과 종이 있던 시절, 주인이 종에게 체벌을 하더라도 정확한 규칙에 의해서 합리적으로 해야지 화가 나는 대로 맘대로 종을 때렸다가는 주인도 동일한 방식으로 혼이 날 줄 알라는 계명입니다. 더군다나 남을 불구로 만들어 놓고 돈으로 해결하는 고대 근동의 제국의 법을 없애버리고 종을 불구로 만들었다면 주인도 그렇게 될 줄 알라는 무시무시한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이 법은 사랑의 법은 아니었습니다. 폭력에 대하여 똑같이 폭력으로 대하는 방식이었고, 이것을 통해서 폭력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탄생한 공동체 마태교인들은 폭력을 사랑으로 바꾸려는 모험을 실행합니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대어라"라는 명령은 맞고 있으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상대편의 오른쪽 뺨을 때리려면 왼손으로 때리거나, 오른손 등으로 때려야 합니다. 그런데 중동지역에서 왼손은 뒷일을 처리하는 데 쓰는 손이었기에, 왼손이나 손등으로 사람을 치는 일은 폭력죄가 아니라 모욕죄에 해당되었습니다. 즉, 오른쪽 뺨을 맞은 사람이 왼쪽 뺨을 돌려대는 것은 네가 나를 때리려고 하거든 제대로 인간 대접을 하면서 때리라는 일종의 인권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 벌어진 갈등을 꼭 폭력으로 해결하고 싶다면 내가 맞아 줄테니, 나를 모욕하는 방식이 아니라 나를 정확하게 인간 대우하면서 때리라는 말입니다. 상대편의 마음에 남아 있는 양심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에 생기는 분쟁을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옳은가를 근원적으로 묻고 있고, 로마가 식민지 백성을 억압하고 또 폭력적인 방식으로 다루면서 과연 문명국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고소해서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주라는 말씀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읽어야 합니다. 고대에 속옷은 여러 벌이었고, 가난한 사람에게 겉옷은 한 벌이었습니다. 겉옷은 밤에 몸을 따뜻하게 하는 이불이 되어 주고, 물건을 옮길 때는 보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 빚을 갚지 못하자 속옷을 저당 잡으려고 합니다. 그럴 때 이 가난한 사람이 이제 겉옷까지도 내어 준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그렇습니다. 이 가난한 사람은 입을 옷이 없어지고 더운 뙤약볕과 추운 밤을 안전하게 보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누려야할 최소한의 휴식과 잠자리조차 보장받을 수 없게 되고, 벌거벗었기에 인간으로서의 자존심마저 무너지게 됩니다.

공적인 재판이 인간을 이렇게 만드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구약의 율법에서 모세도 겉옷을 담보로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출애굽기 22:26-27). 진정 옳은 재판은 악덕 고리대금업자를 설득해서 가난한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도록 하는 것 아니겠는가? 가진 자가 가난한 사람의 속옷마저 빼앗도록 하는 재판이 모두 행복한 사람다운 세상을 만드는 재판인가? 합리성의 이름으로, 또는 법조문을 들이대면서 가난한 자의 모든 것을 탈탈 털어가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이 말씀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군인은 식민지 백성을 징발해서 노역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고 가시던 십자가를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졌던 것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로마는 스스로 자신들이 문명국이었기에 일을 시켜도 함부로 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오 리라고 하는 제한을 두었습니다. 어떤 로마병사가 유대인 청년을 시켜서 이 물건을 들고 가라고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 청년이 매우 밝은 표정으로 "그렇게 하지요" 하면서 오 리가 아니라 십 리를 들어 줍니다.

이 로마병사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수고를 덜어서 편했을지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했을 것입니다. 만약에 상관이 이런 상황을 보았거나, 나중에 오 리 이상을 옮기도록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로마군의 명예를 훼손시킨 죄로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 리를 가주라고 하는 말씀이 제기하는 문제는 누구는 시키고 누구는 그것을 무조건 실행해야 하는 체제와 구조가 올바른 것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사람은 지배자의 위치에서 일을 시키면서 권력의 맛을 보면 볼수록 남보다 윗자리에 앉아 있는 것에 쾌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아래에서 시키는 일을 하고 윗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사람은 돈은 벌겠지만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얻기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 리를 억지로 가라고 하는 명령에 십 리를 기꺼이 가주는 행위 속에는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풀겠다는 인간의 높은 도덕적 우월감이 있습니다. 남에게 베푸는 사랑은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참으로 명예로운 일입니다.

당시 세상은 권력의 자리에 앉은 사람에게는 명예가 수여되고,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은 돈은 벌겠지만 명예 대신 수치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이러한 자비의 행동들은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식민지 백성에게는 자존감을 높여 주었고, 남을 지배하는 인간들의 양심을 새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권력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다스리는 것, 관대함을 통해 하나님을 닮아가는 일은 보통 당시 지배자들에게 요청되던 덕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였던 마태공동체는 힘없고, 박해당하고, 멸시당하면서도 이런 지배자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을 자신들이 해 내고 있습니다. 불의를 불평 없이 참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사랑하기를 실천하는 것, 자기가 속해 있는 사람들끼리만 협조하고 사랑하며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배척하는 집단 이기주의를 해체하고 평등한 인간관계를 세워가는 자주적인 능력! 이제 그것은 더 이상 철학자들이나 권력자만의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의 것이라고 마태는 말합니다.

전에는 상류층의 가치였던 것을 이제는 힘없는 백성들이 받아들여, 그 가치를 변혁하고 있습니다. 마태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훨씬 탁월한 도덕적 우월성과 자의식, 그리고 인간의 보편적 자율성을 가지고 행동합니다. 이들은 남과 떨어져서 홀로 군림하는 그런 지배자가 아니라 자기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거룩한 가족들이며, 모든 생명체가 함께 행복한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요구한 행동은 수동적으로 악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마태교인들은 무력이 아닌 사랑으로 적극적이고도 비폭력적인 저항을 하며, 불의를 폭로하고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유대 회당에 맞서서: 전통을 새롭게]

마태공동체의 반대편에 로마가 있었다면 마태교회에게 있어 유대교 회당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 공동체와는 매우 미묘한 관계가 형성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도 유대인들이었고, 똑같이 하나님을 유일한 신으로 경배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서가 택한 방식은 유대인의 회당 공동체보다도 훨씬 더 깊은 하나님 이해와 훨씬 더 가치 있는 삶의 창출을 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서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는 누구나, 자기 곳간에서 새 것과 낡은 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여기서 하늘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는 바로 마태복음서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태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사람들은 유대교의 율법학자와 달리 하늘나라를 위해 훈련 받은 이들이고, 이들의 특징은 곳간에서 새 것과 낡은 것을 모두 꺼내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마태교회 사람들은 유대교 전통을 낡은 것이라 해서 함부로 버리지 않습니다. 낡은 것과 새 것을 모두 간직합니다. 그리고 때로 낡은 것을 새롭게 해석해 내고, 새롭게 변혁시켜 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이 지녔던 신앙들, 예배와 기도, 깊은 말씀 묵상, 율법에 대한 철저한 실행,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었던 그 열정을 그대로 간직하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맛보았던 하늘나라의 감격 또한 이어갑니다. 모두가 차별받지 않고, 한 자리에 둘러 앉아 떡을 떼며, 물고기를 나누어 먹으면서 누렸던 그 풍요로움을 기억합니다. 병이 들어 아픈데다가 죄인이라 낙인까지 받아야 했던 그 고통과 질곡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족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떠올리며, 이제는 서로서로 아프고 소외된 이들을 찾아 가고,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발견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그리고 그런 하늘나라를 위해 마태공동체는 전부를 바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두 개의 비유, 즉,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과 값진 진주를 얻은 상인의 비유는 마태공동체가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늘나라가 무엇인지도 모르다가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삽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을 하늘나라를 추구해 왔습니다. 그 노력 끝에 하나님 나라를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람 역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삽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여러분에게 하늘나라는 여러분이 가진 것을 다 팔아서 살만큼 값지고 귀한 것입니까? "아멘"을 하셨으니, 그럼 지금부터 팔아 보겠습니다. 일단 저는 전셋집에 사니까 전세금을 뺍니다. 자동차도 있네요! 차도 팝니다. 그러고 보니 수천 권의 책도 있군요. 그것도 팝니다. 다 팔았나요? 가전제품, 가구 모두 모두 팝니다. 또 그 다음에 무엇이 남았습니까? 제게는 두 아이가 있고, 아내가 있습니다. 사람을 팔수는 없지만 아무튼 하늘나라를 위해 가족도 내어 놓습니다. 또 뭐가 남았습니까? 이제는 다 팔았나요? 아닙니다. 아직도 제게는 팔 것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저 자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늘나라의 비유에서 하늘나라를 발견한 사람이 가진 것을 다 팔았다고 할 때 꼭 잊지 말고 팔아야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이 비유 다음에 바로 세상 끝날 마지막 심판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물에서 좋은 고기는 남기고, 나쁜 것들은 내버리듯이, 하늘나라를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내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하려면, 우리 내부에 본능처럼 담겨있는 자기 사랑을 넘어서야 합니다. 자기를 먼저 생각하고, 자기만을 우선적으로 내세우려는 모든 욕구를 모두가 함께 살아가려는 마음으로 전환시켜야 합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예수의 사랑, 거듭난 생명"입니다. 예수의 사랑만이 우리에게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좋은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생명을 거듭나게 할 수 있습니다.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이것들을 모두 깨달으셨습니까?

유대법에 따르면 만일 밭에서 보물이 발견되었을 때, 보물은 일꾼과 주인이 적절한 비율로 함께 나누게 되어 있었습니다. 양심적인 일꾼이라면 주인의 땅에서 보물을 발견했을 때, 당연히 주인에게 사실을 보고하고 기꺼이 그와 보물을 나누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 나오는 사람은 유대법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사람이 이 밭을 사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처분했고, 그 땅을 산 다음 벼락부자가 되었다면, 그리고 그렇게 된 이유가 밭에서 난 보물 때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 땅의 원 주인은 그 일꾼에게 소송을 제기해 올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과감하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밭을 사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았으니 가족의 생계나, 자신의 안전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비유에서는 이 사람의 이러한 비이성적인 행동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보물을 발견한 기쁨으로 인해 들떠서 지금 제 정신이 아닙니다. 보물을 발견한 그 기쁨이 그의 삶 전체를 뒤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복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여러분의 삶 전체를 뒤흔들어 놓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여러분의 삶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던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발견한 기쁨으로 인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살만큼 제정신이 아닌 적이 있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정말 제 정신이 아닌 것은 우리 사회가 아닐까 합니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제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이 전부인 세상에서, 돈이 전부인 줄만 알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권력을 추구하고 힘 센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세상에서 적당히 거기에 빌붙어 살아간다면 과연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뭔가 고뇌하고 아프고 힘들고 괴로운 것이 정상이 아닐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소식으로 인해 뭔가 깨달음이 있었다면 과연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바로 바울 사도가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신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 바로 이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바울은 자랑할 만한 것이 매우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를 체험하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입은 후로 바울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을 때만이 그분의 부활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올해도 벌써 6개월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매주 수요기도모임에서 우리 공동체가 양적으로 부흥하고 질적으로 성숙하기를 간절히 기도해 왔습니다. 예수의 사랑으로 거듭난 생명이 되기를 절실하게 간구하였습니다. 그런 기도와 간구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우리는 좀 더 과감한 도전을 해야 합니다. 온 몸을 바쳐 노력해야 합니다.

무엇이 되었든지 십년만 죽어라고 하면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위험과 곤경을 무릅쓰고 10년만 견디면서 노력하면 어떤 분야에서든지 탁월한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경지를 보여 주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목표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서, 누구와 함께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가십니까? 10년 전에 복음을 향해서 투신하지 못하셨다면 이제 하면 됩니다. 그러면 10년 후에 여러분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될 것입니다.

세상 끝 날에는 모든 것이 밝혀질 것입니다. 천사들이 와서, 의인들 사이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서, 그들을 불 아궁이에 쳐 넣을 것이니, 그들은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입니다. 지금 그런 불의한 자들이 우리의 앞길을 막는다 하여도 거기에 절대 굴복하지 마십시오. 더더욱 조심하면서 경계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엔 무엇이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며 나아가게 하소서. 바울 사도의 그 철저한 회개와 갱생의 길을 본받으며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게 하소서. 십자가의 원수가 아니라, 부활에 이르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언제나 기억하고 온 몸을 바쳐 하늘나라의 일군의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여기에 들어가시면 설교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SoulLoveCommunity/UkVO/317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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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