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6장 9-16절, 요한복음서 6장 60-71절
[성서에서 우뚝 솟은 두 개의 봉우리]
성서를 백두대간과 같은 큰 산맥으로 비유하여 성서에 나오는 수많은 사건과 이야기들을 봉우리라고 가정한다면 가장 높이 솟은 봉우리는 어떤 봉우리일까요?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났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등장했고, 이들의 고백과 깊은 신앙은 새로운 종교와 경전을 탄생시켰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그리스도교 신자이니,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럼! 구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버금가는 높은 봉우리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집트 사람들이 처음 하나님의 존재를 생생하게 경험한 것은 바로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였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6장 2절부터 7절에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리시는 장면이 잘 나옵니다. 6절과 7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나는 주다. 나는 이집트 사람들이 너희를 강제로 부리지 못하게 거기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고, 그 종살이에서 너희를 건지고, 나의 팔을 펴서 큰 심판을 내리면서, 너희를 구하여 내겠다. 그래서 너희를 나의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주 곧 너희를 이집트 사람의 강제노동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 사람들은 억압과 착취, 비인간적인 모독, 불평등과 거대한 폭력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됩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중받고 싶고, 평등하게 대우 받고,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이상 마음껏 꿈꾸고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싶은 것은 모든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욕구이자 소망입니다.
최근 종근당의 사장인 이장한 씨의 막말이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운전기사들에게 한 말들을 여러분 들어 보셨나요? 저는 지난 13일에 한겨레가 공개한 6분가량이 되는 녹취록을 들어 보았는데, 설교에서는 인용하기 힘든 인신공격성 폭언들이 마구 쏟아져 나옵니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이장한 씨의 운전기사들 중 일부는 퇴사 후에도 정신과에서 병원치료를 받을 만큼 엄청난 고통을 당했고, 이런 막말과 폭언 등으로 1년에도 수차례씩 운전기사가 바뀌었다고 합니다.
가진 자들의 갑질에서 모두가 느끼는 것이지만, 누군가의 종으로 살아야 하는 것, 강제 노동에 시달리는 것은 사실 살았으나 죽었다고 해야 할 만큼 괴로운 일입니다. 월급을 받는다 해도 인격적인 모독이나 욕설과 폭행이 난무한다면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의 바로 밑에서 신음하던 히브리 백성들의 가장 큰 꿈과 소망은 바로 자유와 평등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들에게 자유를 주셨고, 이들 또한 이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대제국 이집트 람세스 2세의 통치 아래에서 비돔과 라암셋이라는 나라의 창고를 건설하는데 강제 동원되어 고된 노동과 억압과 착취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던 노예들에게 불현듯 찾아온 해방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은 애굽을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의 한 장면입니다. 자유의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 뿐, 황량한 광야에 이르게 되자,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습니다. 몇몇 생물을 제외하고 생명을 유지하기 힘든 광야에 다다르자, 이 사람들은 겁이 덜컥 났습니다.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염려가 밀려옵니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에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에, 누가 우리를 주님의 손에 넘겨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을 뻔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 모든 회중을 다 굶어 죽게 하고 있습니다"(16:3).
[생존의 문제]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본문에서 하나님은 굶어 죽을까봐 걱정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고기와 빵을 배불리 먹여 주십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과 히브리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광야 생활을 통해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류의 비전도 생명이 유지될 때만 가능하다는 가장 기초적인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죽음의 그림자가 늘 밀려오는 상황에서는 참된 자유와 평등은 이룰 수 없음을 오늘 본문은 잘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 굶지 않게 하고, 배불리 먹게 하시는 분으로 성경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명을 유지하도록 해 주시는 분이야말로 참 하나님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를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원래 자신이 누려야 하는 그 생명을 온전히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누군가의 생계가 위태롭고 위협받고 있다면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울부짖는 소리를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먹고 살도록 인간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돕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다면 우리 또한 누군가가 생계 문제로 고통 받고 있을 때 그를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는 말이 있듯이, 각 사람이 조금씩 도우면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고,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오늘 하나님은 광야에서 빈곤과 생계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양식을 주시면서 각자 먹을 만큼씩만 거두라고 명령합니다. 자기 장막 안에 있는 식구 수대로, 식구 한 명에 한 오멜씩만 거두라고 명하시고 계십니다. 왜입니까? 누군가 더 거두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억압과 착취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 이상을 더 가지려는 그 생각과 욕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재화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이 지구가, 모든 자연환경이 풍성히 먹을 것을 내어 준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생명에 필요한 것만 취해야 합니다. 그 이상을 가지려는 욕심이 발동하는 순간, 이런 지구가 수십 개 된다 해도 모자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과 광야의 여정을 통해 참된 삶이 무엇인지 배워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유와 평등, 생명의 가치를 누리며, 이런 가치들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욕심을 절제해야 한다는 사실도 깨닫고 있습니다.
[영생의 말씀]
출애굽의 본문이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욕구들을 채워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서의 말씀은 거기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서의 본문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이 말씀이 너무 어렵다면서 예수를 떠난 제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복음 6장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네 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 기적이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인데, 요한복음서 6장은 이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서는 공관복음서와 달리 예수께서 백성들을 먹이신 이 기적을 베푸신 이후에 사람들이 예수를 억지로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는 사실을 보도합니다(6:15). 예수님은 자신을 왕으로 세우려는 사람들을 피해 혼자서 산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또 추후에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십니다. 그런데 많은 무리가 가버나움까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님,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답을 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6:26-27a).
이렇게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와 예수님의 대화가 계속 진행되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16:33)이며, 예수님 자신이 바로 "생명의 빵"이며, 자신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고,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긴 설교를 하십니다. 이 설교를 마쳤을 때 바로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곁을 영영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에 대해 말씀하시고, 자신이 주는 양식은 유대인들의 조상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셨을 때, 결국 예수를 떠나게 될 제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어렵다는 말의 원어인 '스클레로스'는 단순히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의 원래 의미는 '거슬리고 반감을 품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 중 일부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반감을 품고 예수를 떠났습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의 상황도 이와 비슷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날 한국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은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한 부류는 진정 참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추구하는데, 교회가 그것을 채워주지 못해서입니다. 교회가 세속보다 더 비윤리적이고 더 타락한 양태를 보였기에 떠납니다. 두 번째 부류는 반대입니다. 즉, 하나님을 잘못 믿었기에 떠납니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만 교회를 다닌 사람들은 교회가 더 이상 그런 용도로는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떠납니다. 그리고 교회에는 여전히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과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을 통해 이루려는 사람이 함께 존재합니다.
오늘 예수님 설교가 거슬리고 그래서 예수에게 도리어 반감을 품고 떠난 사람들은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에, 즉 예수보다는 빵에 더 관심을 두었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동시에 이들은 빵을 만들어내신 예수를 정치적 왕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존재적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참된 진리의 말씀보다, 참된 인격보다 어떤 이데올로기, 특히 정치적 권력을 얻으려고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세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1970-80년대 한국교회는 다양한 이유에서 급성장을 하였습니다. 한쪽에서는 교회를 통해 빵을 얻고자 했습니다. 교회 다니면 복 받는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교회를 통해 자신들의 이념을 이루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일부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통해서 빵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기복신앙으로 타락시켰고, 교회를 통해서 자신의 이념을 달성하려던 이들은 세상의 가치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쉽게 동일시하는 오류에 빠졌고, 더 깊은 차원의 세계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참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개인의 복이나 구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매우 유치한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자신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는 무력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은 우리 주님의 소망이고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그 뜻을 이어받아야 하지만, 동시에 어떤 제도나 조직, 법이나 사상을 곧바로 하나님 나라의 현실과 동일시하거나, 예수님의 진리처럼 말하는 것은 일종의 착각이거나 교만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고, 우리는 떨리는 마음으로 거기에 동참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할 때마다, 그것이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오거나,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인지 정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겸손해야 하고, 자신이 실수하는 사람이라는 것, 자신은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분의 형상을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 끊임없이 정진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빵을 보고 예수를 찾아온 사람이나, 자신의 이념과 가치를 실현하려고 교회에 오는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보통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헌신이나 자기가 손해 보는 일을 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진정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는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경남에 그리스도교 정신에 따라 세워진 거창고등학교에는 <직업 선택의 십계>라는 것이 있는데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춰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 다투어 모여드는 곳에는 절대 가지마라. 아무도 가지 않은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을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여기 나오는 계명 하나하나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것이 정말 직업 선택의 십계명일까요? 취직은 준비하는 사람에게 이것을 주면 그 사람이 좋아할까요? 이런 십계명을 지니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참된 신앙인이 되고 싶었던 키르케고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은 자신의 광채를 드러내는 천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세상으로 파송 받은 사도들이다." 또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성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애쓰는 노력을 요구하십니다." 마태복음서도 우리에게 말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생명의 길로 가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그 길은 비좁아도 그 길로 가는 그 자체에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고, 바로 생명이 있습니다.
["만 후": 이게 무엇이냐?]
오늘 구약의 본문에서 고수씨처럼 희고 벌꿀과자 같이(16:31) 달콤한 만나가 가는 싸라기처럼 내려앉았는데, 이 만나를 보고 사람들은 서로 묻습니다. "이게 무엇이냐?" 사실 만나라는 낱말은 여기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물었던 문장 "이게 무엇이냐?" 히브리어로는 "만 후"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게 무엇이냐?" 이 질문은 만나라는 것을 처음 보았기에 신기해서 던진 단순한 질문일 수 있겠지만 오늘 저는 이 질문을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출애굽 사건은 기원전 1250년경 일어난 역사적인 탈출 사건이겠지만 이 사건은 과거의 한 사실을 넘어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종교적 진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은 이집트의 고기 가마 옆에서 빵을 배불리 먹던 것처럼 단순히 배를 불리는 것을 말함이 아닙니다.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이집트의 노예가 되도 좋고, 야훼 하나님의 종이 되어도 좋다고 한다면 오늘 구약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본 뜻에서 크게 어긋납니다. 광야에서의 이 체험은 참 자유를 얻기 위해 모험을 감행한 이들이 겪은 실존적 불안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 불안이 어떻게 극복되었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가 그러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인생의 고통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있고, 고통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성을 절절히 말하는 종교입니다. 창세기의 타락 이야기에서 유래한 원죄의 교리는 인간 개인이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심지어 알아차리기도 어려운 구조악에 대한 문제를 짚고 있습니다. 또 바울 사도는 로마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백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 중략 ~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로마서 7:15, 24). 이렇듯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참된 자유를 갈망하지만 참 자유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또 다른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의 잔소리가 지겹고 부모의 독재 밑에서는 자유가 없다고 가출한 청소년이 하룻밤도 지나지 못해 다시 집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막상 자유인이 되었지만 정작 의식주 문제 앞에서 특히 먹을 것이 부족한 데에서 절망하게 되고, 다시 예전의 노예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겠다고 불평하고 맙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은 인간이 오히려 자유를 누리기보다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자유와 불안은 다른 것이 아니고 자유의 다른 이름이 불안입니다. 남이 시키는 것, 제도가 요구하는 것, 정해진 것을 따르면 자유가 없겠지만 동시에 불안도 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주인이 되어 모든 가능성 앞에 섰을 때는 이전의 불안과는 차원이 다른 불안이 자신을 엄습하게 됩니다.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세상에 첫발을 디딘 젊은이는 아마도 세상에 홀로 던져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기에 실존적 불안을 겪게 됩니다. 동반자로 공동의 인생의 첫걸음을 걷는 신혼부부, 첫 아기를 막 낳아 키워야 하는 초짜 부모, 다시 새 삶으로 거듭나 인생역전을 꿈꾸는 중년, 마음은 여전히 청춘이지만 동시에 갈 날도 멀지 않았다고 느끼는 노년, 모두 이 실존적 불안을 피해가긴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면서 늘 묻습니다. "이게 무엇인가?" "도대체 삶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질문을 하는 인간은 단순히 만족한 돼지에 머무르는 존재가 아닙니다. 만족한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존 스튜어트 밀)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즉, 실존적 불안을 자유로 승화시키는 것이 인간입니다. 어떤 사람은 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사유하고 더 깊은 진리를 추구하는 소크라테스로서의 인간에게 만족이란 불가능합니다. 진리를 제 스스로 찾아보겠다는 인간에게 참된 안식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우리는 주님의 품에 안기기 전까지는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으며, 당신의 안에서만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두려움, 불안, 염려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 안에서 해소됩니다. 하나님께서 답을 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신뢰 때문에 미지의 영역이 불안이나 두려움으로 다가 오는 것이 아니라 모험과 설렘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고난 속에도, 아니, 주님과 함께 걷는 그 고난의 길에 보물이 묻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묻습니다: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 열둘의 대표인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을 합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영생의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라는 이 베드로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길 원합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소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삶이 하늘에서 내려온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광야의 백성들은 불평을 하다가 만나를 보고 "이게 무엇이냐?"라고 물었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뵙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사오니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 좁은 길이라 하더라도 바로 그 길이 생명의 길이요, 구원의 문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여기에 들어가시면 설교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SoulLoveCommunity/UkVO/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