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서 2장 14-20절, 요한복음서 15장 5-17절
[목사라는 직분과 사람들의 하소연]
제가 국어교육을 전공하던 시절 한 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면, 이러저러한 자리에서 서로 무엇을 전공했는지 묻고 답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이 국어교육을 전공했다고 대답을 하면, 우리말과 글에 대한 다양한 질문이 나올 겁니다. 그 때 대답을 잘하기 위해서, 창피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 학기 수업에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때 수업은 한글 맞춤법에 대한 수업으로 기억합니다. 한국 사람이면서도 사실 글을 막상 써 보면, 주어 술어 관계도 어긋나고, 띄어쓰기를 비롯해서 잘못 알고 잘못 쓰는 말들이 허다합니다. 그 뒤로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 저는 국어 선생이 아닌 목사가 되었고, 제가 목사이다 보니 이렇게 저렇게 알게 된 사람들이 제게 상담을 합니다.
제가 전문상담가도 아니고, 정신과의사도 아니지만, 단순히 목사라는 이유로 많은 이들의 하소연을 듣게 됩니다. 국어교육을 전공한 이에게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말과 글에 대해 물어오듯이 신학을 전공한 목사에게 성경말씀이나 그리스도교적 진리에 대해서만 물어오면 좋은데, 목사에게 상담해 오는 내용은 인생에서 겪게 되는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입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고, 수시로 병원에 다녔지만 차도가 없자, 기독교인이었던 부모가 아는 목사에게 안수기도를 받게 했는데, 그것이 도리어 이 학생에게 엄청난 공포와 충격으로 다가와 평생의 트라우마가 된 청년이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을 떠나 독립하겠다고 고향인 대구를 떠나 무작정 서울로 왔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노숙인으로 10년째 거리의 급식소를 전전하며 갖은 일을 다 겪으며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갑니다.
어릴 때 부모가 제법 잘 살아서 사랑하는 딸아이를 외국으로 조기유학을 보냈는데, 인종차별로 인한 왕따와 낯선 곳에서의 부적응으로 엄청 고생만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중요한 청소년기 시절에 받아야 할 사랑을 받지 못해 늘 우울과 분노 사이를 오가는 청년도 있습니다.
성실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살았지만, 남편을 돈 버는 기계로만 생각하고, 기름을 쥐어 짜내듯 닦달하는 일상의 반복으로 결국 마지막까지 남은 것마저 다 내어주면서 이혼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외로움과 허무함, 삶의 무의미 때문에 지친 중년의 남성.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외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고생고생하며 평생을 모은 돈과 함께 은행 빚을 얻어 집을 하나 장만했는데, 몇 년이 지난 후 집값은 하락하고 남편은 늙고 병들어 일하지 못하고, 아들은 직장이 없어서 1억이 넘는 빚을 떠안고 생활비에 이자까지 감당하기 위해 점점 더 아파오는 몸을 이끌고 건물 청소에 나서는 나이 지긋한 권사님의 아픔과 고민.
소량의 카페인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것이 곧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변해서 가벼운 커피한 잔도 마시지 못하고, 계단을 뛰어 오르면 숨이 차올라 또 그것이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변하여 흥분하게 되고, 흥분이 과도한 감정 변화와 더 큰 공포로 이어져 결국 119를 불러 응급실로 향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는 젊은 친구.
동양문화권에서 만세사표(萬世師表), 즉, 영원한 스승으로 불리는 공자가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람의 나이를 칭할 때 쓰는 두 글자가 대부분 여기에서 왔지요. 열다섯을 지학(志學)이라 하고, 서른을 이립(而立)이라 하며, 마흔을 불혹(不惑)이라 하고 오십을 지천명(知天命) 또는 지명(知命), 예순을 이순(耳順)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공자의 일생을 표현하는 말에서 나온 것들입니다(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論語』「爲政」4.)
공자는 스스로의 일생을 돌아보며 마흔에는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오십에는 하늘의 뜻을 알았다고 했으며, 예순에는 귀가 부드러워져서 누구의 말이든지 잘 들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상담을 해 보면 서른의 나이가 되어도 떳떳하게 독립하여 자신의 삶을 추동해가는 청년들보다는, 세파에 시달려 벌써부터 피로가 누적되고 몸이 상한 이들을 만나게 되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림 없이 살아가는 중년이 아니라, 늘 이런 저런 유혹에 시달릴 뿐만 아니라 늘 넘어지고 자빠지는 이들을 봅니다. 하늘의 뜻을 알만한 나이가 되었지만, 자신의 감정 하나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작은 일에 화를 내며, 그저 땅의 가치에만 매여 반복되는 일상과 고생스런 삶의 길을 나서는 이들과 마주 대하게 됩니다.
[신학자의 지옥]
다양한 삶의 상황은 우리가 알고 대처할 수 있는 지식이나 경험보다 훨씬 더 크고 깊습니다. 그래서 교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이나, 성숙한 인격의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가진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누구든지 예상치 못하게 닥쳐오는 위기와 유혹, 곤경의 순간들에 당혹감을 느끼며 안절부절하게 됩니다. 속수무책이어서 무엇을 어찌해 볼 수 없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제게 상담하는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이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할 때마다 저에게 묻곤 합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가요?"
이 절박한 물음 앞에서 저는 대답할 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저는 매우 어렵게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비극적 상황을 만나게 되면 우리가 매주 드리는 사도신경은 참된 고백이 되기 어렵습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라고 사도신경을 외우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온 데 간 데 없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마가 9:23, 개역한글판)고 예수님은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때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신학자의 지옥이라고 불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각각의 신학명제는 아무 문제가 없는 듯 보이는데, 그 명제들을 모으면 서로 모순을 일으키고 도저히 풀 수 없는 거대한 벽에 다다르기 때문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 둘째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셋째 세상에는 죄악과 고통이 존재한다. 이 각각의 문장은 모두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세 문장을 함께 생각해 보면 미로에 빠지게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왜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죄악과 고통이 존재하는가? 이 문제에 여러 사람들이 대답하려 했지만, 또 그 대답을 통해 하나님을 변호하고자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많은 신학자들의 논의를 지금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문제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풀면 좋을 지 제가 깊이 고민하는 바를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제 말이 여러분에게 설득력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저 또한 그저 하나의 몸부림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경을 헤매는 아들 곁에 눈물을 흘리며 서 있는 부모 앞에서, 세월호가 순식간에 더 깊은 바다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그저 지켜보아야만 했던 상황 속에서, 전쟁의 한복판 광기 어린 학살자들에 의해 아무런 이유 없이 독가스를 마시며 죽어가야 했던 600만의 유대인들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게 됩니다. 그 때 나오는 말은 말이 아니요, 그냥 탄식이며 몸부림일 뿐입니다. 오늘 저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솟구치기를 기대하는 작은 인간의 몸부림으로서 보잘 것 없는 말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들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두 번이나 반복해서 자신의 계명은 이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17).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이 명령을 새 계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계명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에게 주어진 계명입니다.
방금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그리고 이 현실세계의 비참함에 대해서 말했지만, 사실 이 모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모름의 영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완벽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신비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방식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일면을 보았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조금이나마 알고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이 땅을 거니셨던 하나님, 태초에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시며 세상을 창조하신 지혜가 육신, 즉, 우리 인간의 살을 입고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복음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로지 예수 안에 머물 때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생명을 얻고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을 때만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뜻을 실현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 예수께서 명하십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하나님이 신비이지만, 우리가 겪는 고통 또한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습니다. 왜 우리에게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참으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수많은 일들이 발생하고 그것이 바로 고통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지구의 바다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 태풍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 태풍으로 인해 수많은 생명체가 죽음을 당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몸을 가진 이상 아프지 않을 수 없고, 태어난 이상 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모두가 고통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고통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이제 문제는 그 고통을 어떻게 겪어내고 살아내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의 대부분은 괴로운 일을 겪을 때, 고통 자체가 없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고통스런 상황이 오면 그것을 피해 달아나려 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있어야 하는가 하고 울부짖게 됩니다. 그러나 고통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관점을 지녀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고통 가운데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으며, 심지어 고난이 지니는 뜻을 발견할 수 있을까?
[전능하신 하나님에서 사랑이신 하나님에로]
그동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의 문제, 고통의 문제 앞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대어 이 문제를 풀어 보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힘에 기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라면 이런 어려움쯤이야 쉽게 해결해 주시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정말로 그 일이 뜻밖에 해결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시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하나님의 힘에 기대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습관은 하나님보다도 힘에 의존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무슨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울고 떼쓰면 들어주는 괴팍한 아버지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힘을 숭배하는 것으로, 자신의 욕망을 섬기는 것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도깨비 방망이로서의 신은 사실 무능력합니다.
프로이트가 비판한 대로 종교인들이 말하는 신은 단지 한 때 자신이 사랑하고 무서워하던 유아기 때의 육신의 아버지 같은 분이었고, 맑스가 말한 대로 종교는 인간을 고통에 맞서 싸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고통을 망각하게 만드는 아편 주사와 같은 것이 되어 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하지만 여러 가지 여건과 상황이 안 되서 행복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자, 신을 만들어서 그 욕구를 채우려고 하는 것이 바로 종교라고 말하는 포이어바흐의 비판을 피해갈 수 있는 종교인을 저는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갈망, 자신들의 욕구, 자신들의 자기보존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교회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상처가 회복되고,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만 그렇게 하려고 형제와 이웃, 공동체에게 피해를 입히게 한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욕망의 노예가 된 인간은 자신의 아픔을 치유한다면서 남에게 상해를 입히고,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더욱 문제인 것은 이렇게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의 욕망을 더욱 부추기는 종교는 역사 속에서 제도와 의식, 율법 등을 만들어 오히려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게 됩니다. 주위에서 얼마나 많은 종교인들이 그 종교 때문에 피폐한 삶을 사는지 보아서 알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서당에 다닐 때 만났던 제 후배 중 한명은 교회보다 술집이 많은 것이 더 낫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술집은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주는 반면 교회는 인간의 정신을 망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 비종교인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저 친구는 교회는 다니는데 참 사람은 괜찮아."
식물이나 동물과 달리 인간은 문명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바늘로 수십 번 찔러도 아프다는 소리하나 하지 않는 바위와 달리, 한곳에 머물러 한 평생을 사는 식물과 달리, 땅만 쳐다보고 기어가는 네발 동물과 달리, 인간은 하늘을 향해 사유하는 머리로, 두 발로 움직이는 행동으로, 민감한 감수성으로 지구상에 문명을 건설했습니다. 그래서 한 인간이 태어나서 성인이 되어 이 문명사회에서 제 스스로 서려면 보통 30년의 세월이 걸립니다. 태어나 부모의 돌봄을 받고(유아기 0-5세), 학교에 들어가고(유년기 6-12세), 사춘기(13-19)를 지나 청년이 되고 곧 사회에 적응하는 성인이 되는데 30년이나 걸리는 거지요. 인생의 각 단계에서 충분한 영양이나 정서적 돌봄, 지적 자극을 받지 못하면 그 사람의 삶은 넘치는 생명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타인 의존적 삶을 살거나 심한 경우 우울증에 노출되고 자기 파괴적 삶을 살게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성인기를 지나 장년기, 노년기를 거쳐 죽음을 맞이합니다. 누구나 두, 세 평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한 평생을 살고 그렇게 살다가 죽습니다.
인간이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이 한 평생을 살면서 고난과 역경이 찾아오기 마련이고, 바로 이것이 인생이요. 삶입니다. 바로 우리는 바위처럼 무감한 존재가 아니라,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고, 제 스스로 생각할 줄 알기에 자유를 누리고 삽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유 때문에 바로 고통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힘에 의지하여 그 고난과 고통을 극복합니다. 그러나 오늘 요한복음서는 새로운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의 일상에 녹아 있는 유교의 정신은 위기의 순간을 극복하고 고난 속에서도 주체적인 민주시민으로, 책임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엄청난 수행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고난이 그의 지조를 변하게 하지 못하는 유교적 인간은 평소에 깊이 생각하는 것을 통해서 얻은 지식과 그것을 삶에서 녹여낸 경험이 쌓여서 얻어진 지식으로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황에 꼭 들어맞는 적실한 행동을 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不思而得, 不勉而中). 공자는 그의 나이 70이 되어서야 그 경지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從心所慾不踰矩). 유교의 길은 사람사이의 관계(禮)를 바르게 설정하기 위해 개인의 인문학적 수양(仁)을 강조하는 윤리의 길을 만들었습니다.
불교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일어난다는 깨달음, 즉, 연기(緣起)를 통해 일체의 집착과 탐욕에서 해방되는 자유의 경지에 들어설 수 있다고 말합니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이 사건이 저 사건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는 같은 것의 양면일 뿐, 인간의 짧은 소견으로 구별 짓고 차별을 두는 것은 모두 깨닫지 못한 무지의 소치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도 고난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타마 싯달타는 보리수나무 아래서 이 모든 것을 깨닫고 깨달은 자, 즉, 붓다가 되어 흔들리지 않는 참된 평안과 고요의 경지(涅槃寂靜)에 들게 됩니다. 불교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현상을 바로 살핌으로써 참 자유를 누리는 깊고 넓은 심리학의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그럼 요한복음서는 우리에게 어떤 길을 제시하고 있을까요?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서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십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13:34-35). 요한공동체 내에는 세례요한을 스승으로 모셨고, 예수도 그의 계승자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이방인의 대표였던 사마리아인들, 유대교 회당에 여전히 적을 두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숨기며 눈치를 보는 사람들, 회당을 박차고 나와 떳떳하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 강경파들, 베드로로 대표되는 조직과 제도를 중시하는 사도계 제자들, 그리고 애제자를 통해 예수의 이야기를 전수받았던 이들, 예수의 죽음 이후 부활한 예수를 만져보지 않고는 믿기 어렵다는 합리주의자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공동체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돈과 힘이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대 로마제국의 맘몬신이 위세를 떨쳤고, 시시 때때로 맘몬의 사탄적 세력은 로마제국의 조직과 권력을 이용해 공동체를 위협하고 인권을 유린하였습니다.
내적으로 분열의 소지가 높았고, 외부에서는 자신들의 존재를 없애려는 사탄의 세력이 분기탱천할 때, 요한공동체는 "서로 사랑"함으로 인간의 자유를 지키고 고난과 위협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인간다운 인간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려 했습니다. 공관복음서에서 말하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사랑의 이름으로 자칫하면 자신의 기준과 방식대로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게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교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방식을 말하기도 합니다(己所不欲, 勿施於人). 그러나 유교에서 말하는 적극적 윤리의 길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에 바쁜 사람들, 지적인 배움에 동참할 수 없는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험난한 길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심리적 깨달음은 가족과 사회적 책무와 현실세계의 복잡한 관계를 몸으로 체험해야 하는 고달픈 삶속에서는 너무도 먼 길이었습니다.
요한은 좀 부족한 사람들끼리라도 서로 사랑을 주고받음으로써 서로의 약점과 아쉬운 부분을 이해하고 채워준다면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은 수없이 많은 좌절과 역경 속에서도 다시 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서로가 주체적으로 사랑하려는 노력 속에서 참된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인간과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그 곳에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고,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를 만듦으로써 세상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일을 요한공동체는 해 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말하지만, 한국의 대다수의 교인이 그러한 것처럼 하나님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극대화하고 이 세상에서도 모자라 저 세상의 공간도 차지하려는 욕심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도 자신만을 생각하며 이웃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차가운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생명사랑교회에서 진행되는 모든 예배와 모임과 종교적, 선교적 활동을 통해 유익을 얻고 그것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진정한 생명이 있는지, 성숙이 있는지, 서로 사랑이 있는지, 주체적 인간으로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창조적 자유가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이제 성인이고 생명사랑공동체도 하늘의 뜻을 알기에 충분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여기 죽음의 길과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자신을 살리며 지구공동체를 죽이는 길과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온 생명을 살리는 길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죽어 많은 열매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12:24). 여러분들이 예수의 말씀에 주체적으로 선다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셨던 그분에게 제대로 배웠다면,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세상조차도 사랑하셔서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서로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전능함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내내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 모릅니다. 어떤 사탄의 세력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덤빌지 모릅니다. 어떤 고난이 우리를 좌절시키고 낙망하게 만들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16:33). 그러니 너희도 세상을 이길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너희는 내가 없어도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왜냐면 이제는 너희가 땅위를 걸어 다니는 신의 아들딸이기 때문이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소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사랑을 통해서 이뤄진다는 사실을 알게 하소서. 힘을 숭배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게 하소서. 서로 사랑함으로 그 안에서 참된 삶의 맛을 느끼고, 인간다움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세상의 어느 곳보다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여기에 들어가시면 설교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SoulLoveCommunity/UkVO/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