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장 17-24절, 마태복음서 18장 21-35절
[두 종류의 사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구약과 신약성서의 본문은 두 종류의 인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라멕으로 표현되는 한 사람의 유형은 복수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의 명령에 따르는 다른 한 사람의 유형은 바로 용서하는 인간입니다.
라멕은 자기 아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본문에 의하면 라멕은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 사람을 죽인 살인자는 아닙니다. 자신이 먼저 피해를 당했습니다. 즉 상처를 입었습니다. 즉 라멕은 처음에 피해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피해자에서 머무르지 않고 복수를 통해 가해자가 됩니다. 그리고 이 복수는 자신이 받은 피해를 훨씬 뛰어 넘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가 자신에게 죄를 짓는다는 것은 자신이 피해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었던 베드로는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는 사람에 대해서 복수할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답게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용서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일곱 번까지 하면 어떻겠는가 하고 물어봅니다. 그러자 예수는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라멕은 자기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죽이면서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라는 것은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그 벌로 여기저기를 유랑하게 될 때, 죽음의 위협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자 하나님께서 가인을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으로 했던 말에서 나옵니다. 즉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들이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한 경고의 말씀으로 가인을 잘 돌보시겠다는 은유적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라멕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멋대로 인용하면서, 자신을 해치는 자는 일흔일곱 갑절로 복수를 하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라멕은 하나님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라멕은 제멋대로 생각하고, 오로지 자신의 힘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마태복음의 말씀에서는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 지를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하나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자기의 종들과 셈을 가리려고 하는 한 왕이 등장합니다. 이 왕은 만 달란트를 빚진 자신의 종의 하소연을 듣고, 그를 가엾게 여겨 그의 빚을 탕감해 줍니다. 즉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 즉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하고, 용서해 줄 수 있게 하는 그 근원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창세기의 본문에서 아벨을 죽이고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가인은 도시를 세웁니다. 그 도시를 자신의 아들 이름인 에녹이라 부릅니다. 이런 은유를 통해 우리는 도시가 가인의 후손, 즉, 형제 살인을 했던, 죄인들의 후손이 만들어 낸 것임을 알게 됩니다. 또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라고 하는 라멕의 아들들은 목자들과 음악가들과 대장장이의 조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즉, 이 도시로부터 청동기 문명과 철기 문명이 나타나고, 대규모의 축제에 필요한 온갖 예술과 제의가 생겨나며, 그리고 단순한 수렵과 채집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시절을 지나 가축을 기르고 대단위 농장을 소유한 농업의 등장들을 보게 됩니다.
이 본문은 마치 인간들이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면서 문화를 일군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라멕의 고백에서 절정에 이르는데, 이제 인간은 하나님 없이 이 세상에서 자기의 지위를 지키며 자기의 뜻을 관철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한편으로 이런 노력을 통해 문명을 발달시켜 왔지만 또 한편으로는 끊임없는 폭력의 악순환으로 대량 살상이 일어나는 전쟁을 반복해 왔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노아의 이야기를 통해 폭력의 악순환은 결국 세계의 멸망이라는 파국을 불러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용서하는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인]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과거처럼 계속 무기를 늘려가며 각국이 힘겨루기를 하고, 언제든 전쟁을 일으킬 것처럼 서로 으르렁댄다면 우리 또한 파국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용서를 말하고 있고,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 인류의 생명과 모든 생명체를 보존하고자 합니다. 폭력을 통한 멸망의 길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와 용서를 통한 상생의 길을 열어가라는 것이, 바로 성서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세상의 방식을 따릅니다. 세상이 알려 주는 대로, 세상의 가치를 좇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우리는 세상이 말하는 대로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께서 명하시는 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세상에서, 경쟁을 통해 남을 누르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라고 부추기는 세상에서, 부와 권력을 소유하여 남을 지배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참된 삶의 의미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지난 몇 주 동안 사랑에 대해 설교하였지만,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가 함께 잘 살기 위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그에게 축복을 베풀어주며,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세상의 방식에 따라 반응하는 인간이 아니라, 주체적인 신앙을 가지고 사랑으로 책임 있게 응답하는 사람들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바로 이러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와 태도를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말 중에 하나입니다. 용서하는 인간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용서 없이 악의 증가를 막을 수 없고, 용서 없이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용서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뤄야 할 하나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용서가 쉽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서란 피해자가 하는 것입니다. 즉 피해를 당한 사람이 해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누군가로부터 피해를 당하면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복수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시는 자신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과 상종하고 싶지 않습니다. 얼굴도 쳐다보기 싫고,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다든지, 아무튼 그 사람과 관련된 것들은 모두 싫어지게 됩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말은 완전의 완전이라는 말로도 바꿀 수 있습니다. 완전한 용서, 즉, 마음에 어떠한 앙금도 남지 않게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어떠한 앙금도 남지 않는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잘못을 용서하여 서로 완전한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인데, 보통 가해자가 완벽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제대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경우도 흔치 않으며, 실제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당하고 나면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용서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리고 함부로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은 피해자의 피해를 생각하지 않고, 가해자를 두둔하는 결과를 가져와서 오히려 악을 제거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어제 2남신도(포도나무회)와 함께 "택시 운전사"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주인공인 서울 택시운전사가 참혹한 학살의 현장인 광주를 떠나면서 광주의 택시 운전사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자 광주 택시 운전사가 왜 당신이 우리에게 미안하다고 하는가, 미안하다고 해야 할 놈들은 따로 있다고 말합니다. 대량학살을 일으킨 전쟁범죄나 국가 폭력을 저질러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앗아간 이들에 대해서 우리는 함부로 용서를 말해서도 안 됩니다.
피해자의 한을 풀어주지도 못하면서 제3자가 함부로 용서를 말하는 것은 가해자의 죄를 덮어 주고, 도리어 가해자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피해자는 2차 3차 피해를 입게 됩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용서는 가해자를 옹호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고, 실제적으로 용서를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더 구체적으로 더 세부적으로, 그리고 실제 용서가 가능하도록 노력하고 배워야 합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그 첫 번째 시간을 가져 보려고 합니다.
[용서의 가능성 1: 불완전하여 실수하는 존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누가복음서 23장 34절). 그렇습니다. 누가복음서의 이 장면이 보여 주듯이, 우리는 대부분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는지도 모르면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줍니다. 로마병정들과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유대-기독교 전통이 절실하게 체험했고, 그래서 강조하고 기억하려고 애쓰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불완전합니다. 우리는 실수하고, 유혹에 넘어가고, 잘못을 저지르고,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도 잘 모르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족한 존재들인 우리는 우리와 똑같이 부족한 존재들인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여 살아갑니다. 따라서 실수하는 인간이 모여 있는 공동체에서 언제나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누군가는 가해자가 되고 누군가는 피해를 입습니다. 자신이 가해자였던 때도 있고, 자신이 피해자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피해자이면서 저기에서는 가해자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는 존재이며, 동시에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용서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첫 번째 사실은 바로 이것입니다. 창세기의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열매를 따먹은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불완전하여 늘 실수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처럼 완전한 존재인 것처럼 생각할 때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하고 고통으로 넘쳐나게 됩니다.
내가 실수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는다면 남도 실수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록 내가 피해를 입었지만 그것이 상대방의 실수로 인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일말의 용서의 가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남편을 전쟁 통에 잃고 외아들에게 모든 소망을 걸며 살아가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학교에 다녀오다가 그만 술 취한 운전자의 차에 치여 목숨을 잃고 맙니다. 이 여인의 가슴은 무너지고 삶의 의미는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음주 운전자는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곧바로 형사 입건되어 감옥으로 보내졌습니다. 보험사는 법에 따라 사망에 따른 보상금을 지급하였고, 이 여인은 그 돈을 받았지만 앞으로 아들 없는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답답하고 막막합니다. 가슴에는 큰 바위 덩어리 하나가 생겼고, 그것이 매번 숨 쉬는 것을 막습니다. 자기 자식을 쳐 죽인 자의 얼굴을 보고 면상이라도 후려갈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 여성은 평생 이런 한(恨)을 품고 살아가야만 할까요? 세월이 지나면 이런 사무치는 마음의 응어리도 풀어질까요?
그런데 이 여인을 데리고 감옥에 갑니다. 가서 자신의 아이를 치어 죽게 한 사람과 면회를 합니다. 가서 이 여인은 자신의 마음을 다 쏟아 놓았습니다. 이 아이가 태어날 때의 이야기부터 이 아이가 자라던 모습, 그 아이가 자기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아이 없는 자신의 삶이 지금 얼마나 비참한지를 모두 말합니다.
그러자 음주 운전으로 사고를 낸 그 죄인이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은 평생 술을 입에 대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그런데 그날 자신을 위해 평생 몸 바쳐 헌신하신 아버지가 돌아가신 데다가, 회사에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구조조정이라는 명목 하에 자신을 해고시켰고, 이에 부당해고라고 회사에 계속 항의했지만 돌아온 것은 회사측에서 고용한 용역깡패들의 폭력과 욕설, 그리고 회사에 손해를 끼쳤으니 그에 대한 소송으로 3천만 원을 변상하라는 통지였다고. 그래서 홧김에 평생 먹지 않았던 술을 마시고 운전을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합니다. 정말 잘못했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모든 생명체는 생존에 위협을 느낄 때 달아나거나, 공격하거나, 죽은 척 하기를 합니다. 감정이 세밀하게 발달한 인간은 자신이 피해를 입었을 때, 그것이 생존과 연결된 감정을 건드리게 되면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이것은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건강한 몸과 정신을 가진 사람은 누군가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피해를 입거나 속임을 당하거나 무시를 당하고 멸시를 당했을 때 속으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이것은 본능이고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폭발하듯 반응하면서 온갖 욕설과 폭력으로 대처한다면 그것은 타인은 물론 자신에게도 피해를 줍니다. 화를 자주 내고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반복되면 혈압이 상승하고, 동맥벽이 손상됩니다. 혈관벽이 손상되면 간에서 C 반응 세포가 분비되고 이것은 심장 질환의 원인이 됩니다. 분노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대사증후군을 보일 확률도 높은데, 이렇게 되면 혈당 수준과 혈당 인슐린 수준이 높아져 인슐린 저항이 생기고 혈중 지방이 많아져서 체중도 늘어나고, 심혈관 질환과 제2형 당뇨병의 발병 위험도가 증가됩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그것을 표출하지 못하고 참고만 있으면, 암세포를 죽이는 NK(Natural killer, 천연 면역을 담당하는) 세포의 활동이 억제됩니다. 그리고 화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맥벽이 손상되고 콜레스트롤 수치가 높아집니다. 혈액 안의 혈소판을 더 많이 응고시켜서 동맥경화를 일으킬 수 있고, 암에 걸릴 확률도 높아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분노를 잘 알아차리고 적당하게 처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예처럼 피해자와 가해자가 만나 모든 속을 다 털어 놓고 충분히 자신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 말하고, 또 가해자는 피해자의 상처를 충분히 공감하여 용서를 구하고 잘못을 빌 때 용서와 화해도 가능합니다. 특히 한 공동체에서 생활해야 하는 형제자매나 동료, 가족, 친구라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용서의 가능성 2: 무한한 은총의 빛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비유는 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만 달란트를 자기 주인으로부터 탕감 받았는데,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탕감해주지 못하고 감옥에 집어넣고야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 또한 다시 감옥에 가게 됩니다.
1달란트는 약 5,000데나리온의 값어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 달란트라고 했으니, 지금 이 사람은 5,000만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바로 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관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무한한 은총의 빛을 쪼인 사람이라면 형제들 사이에서 발생한 빚을 탕감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울림을 줍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본질적으로 묻고 있습니다. 그대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경험했는가? 그대의 생명이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가를 알고 있는가? 무엇이 그대로 하여금 오늘까지 살게 했는지, 행복한 삶을 누가 허락했는지 그대는 알고 있는가? 오늘 비유의 말씀은 우리 존재 자체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불완전한 사람이 저지르는 잘못을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아직도 얕고 가볍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아직 어린아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다다를 수 있다면 우리 형제자매의 잘못은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함께 신앙공동체를 일궈 가야 할 믿음의 동료들이라면, 하나님의 한 백성이라면 더욱 더 그러해야 합니다.
[더 나은 용서를 향하여]
오늘은 용서에 대한 첫 번째 시간이라고 설교 초입에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저는 함께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 안에서 생활하는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발생한 상처와 잘못들에 대해 용서하는 문제를 얘기했습니다. 서로 사랑해야 하는 사명을 띤 우리들은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이 불완전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복잡한 삶 속에서 생각이 다르고, 표현 방식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고, 받아들이는 입장이 다르다면, 서로 오해가 발생하고 상처를 주고받는 일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상처를 받았을 때 우리는 내 안에서 발생하는 억울함과 분노, 존중받고 싶은 욕구 등등을 잘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폭발하는 그런 본능적 감정을 잘 다스리면서 사랑으로 응답하는 책임적 신앙인으로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관계 속에서 잘 처리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비폭력대화도 그 중에 하나일 것이고, 평소에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마음의 수용력을 넓히는 일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그렇게 준비하지 않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는 사탄의 세력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죄가 문 앞에 도사리고 있는데 우리는 조심하지 않으면 그 죄에 걸려 넘어지고 맙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고, 가인이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용서는 어쩌면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저 하늘의 별들이 총총히 떠 있듯이, 우리 마음에서는 모든 존재를 사랑하는 마음, 고통당하는 사람의 아픔에 함께 하려는 양심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남을 용서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 번번이 실패한다 해도, 우리가 이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오롯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려는 마음을 지니고 애써 노력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몸부림을 통해 때때로 세상을 바꾸십니다. 그런 은총의 시간을 기다리며 묵묵히 예수의 용서를 실천하는 생명 사랑 교우들 되시길 부탁드립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소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명하게 구별하는 판단하는 눈을 주소서.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비판하되, 그것으로 사람을 죄인으로 매도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폭력보다 사랑의 힘이 더 깊고 더 크고 더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소서. 받은 상처가 당신의 은총 가운데 눈 녹듯이 녹게 하시고, 영원한 당신의 품에 안길 때까지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의 주님이시지만 사랑으로 친구가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여기에 들어가시면 설교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SoulLoveCommunity/UkVO/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