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장 13-18절, 마가복음서 10장 17-31절
[잊을 수 없는 그 사람]
함석헌 선생님께서 쓰신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아시는 분이 많으시겠지만 그래도 워낙 좋은 시니까 읽어 드리겠습니다.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救命帶)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不義)의 사형장(死刑場)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咸錫憲 全集 6: 詩集 水平線 너머』(한길사, 1988), 191-92.
이 정도의 사람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제 인생을 돌아볼 때, 가족을 제외하고 잊을 수 없는 몇 분이 계십니다. 주일학교를 열심히 다니던 시절, 초등학교 3-4학년 교회 분반 선생님이셨던 차병준 선생님! 두 세 명도 안 되는 반 아이들에게 성경 말씀을 차근차근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기억 하나는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비유가 나오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본문을 함께 비교하면서 서로 다른 점을 찾아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 때부터 저는 그 선생님 덕분에 꼬마 신학자 노릇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선생님은 다재다능하신 분이셔서, 기타와 하모니카 연주에 능하셨고, 모든 전자제품을 다 고치셨으며, 자전거에 라디오를 달고 다니시며 자전거 바퀴를 돌려서 나오는 전기로 음악을 들었던 분입니다. 초등학생인 저에게 중학교 수학을 알려 주시기도 하고, 추리 소설과 비슷한 이야기도 들려주시고, 제가 혹시 교회에 빠지기라도 하면 소아마비를 알아 불편한 다리로 지팡이를 짚고 절뚝이며 저를 찾아오시곤 하셨습니다. 그 선생님과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신비롭고, 재밌고, 즐거웠습니다.
또 한 명은 고향교회의 3년 선배였던 양명철이라는 분입니다. 어린 시절 저의 신앙 멘토이기도 했지요. 그 형이 고3이었을 때, 제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입으로 세상 노래를 부르지 말자고! 그 제안으로 저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신나게 부르던 조용필과 이선희의 노래를 더 이상 부르지 않았고, 오로지 찬송가와 복음성가만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제가 성장하면서 세상의 노래도 모두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의 한 면을 보여 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과부와 고아를 돌아보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신학교에 입학했고, 주간에는 학습지 선생을 하며 주말에는 고아원 내에 있는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돌보던 그 형의 순수함은 제 마음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제게 한문의 세계를 열어 주신 단산 박찬근 선생님, 그리고 학문의 세계로 이끌어 주신 도올 김용옥 교수님! 이 밖에도 여러 분들이 계십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시에서 말하는 그 사람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저는 많은 분들과의 만남을 통해 다양한 삶의 기쁨을 누리고, 새로운 깨달음들을 얻었습니다. 그분들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제겐 너무나 소중한 분들이고, 그 분들을 떠올리면 참으로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인생을 살면서 참된 한 사람 그런 사람 만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축복이 따로 있을까요?
[영생을 찾던 사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가복음서에는 길을 떠나시는 예수님 앞으로 달려 와서 무릎을 꿇고 영원한 생명을 유산으로 받고자 하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마가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늘 길 위에 있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그 분의 길은 참으로 다양한 상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모든 인류가 따라야 할 길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은 어느 한곳에 정주하여 안주하지 않고 늘 길을 떠났던 분이기도 하십니다. 그 길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고난과 죽음의 길이라 하더라도 결코 멈추지 않았던 분입니다. 이런 분 앞에 어떤 한 사람이 달려와서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외친 첫 마디는 "선하신 선생님!"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 말은 예수님을 바로 알고 한 말일까요?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일까요? 아니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립 서비스, 즉, 아첨하는 말일까요?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본문은 이 사람의 재산이 많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산이 많은 사람이 왜 떠돌이 예언자 예수에게 무릎을 꿇었을까요? 그것은 예수에게 배우겠다는 진정성의 표현이었을까요? 아니면 이것 또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하나의 몸짓에 불과한 것일까요? 이 사람은 자기가 십계명 중에서 사람과 관련된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잘 지켜왔다고 말합니다만 결국 예수님의 주의 깊고 사랑스런 초청에 응답하지 못하고 근심하며 떠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그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가진 것이 많았기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며 떠나갔습니다. 2016년 5월 29일 심민정 전도사님께서 설교하신 대로 "버려야 얻는 것"이 있는데 이 사람은 자기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것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니 오늘의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여러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 것 같습니까? 예수님 편을 들겠습니까? 아니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 사람의 심정에 훨씬 더 큰 공감을 하십니까? 오늘의 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또 무엇을 깨달으셨습니까?
우리는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있지만 마가복음서는 이 사건을 통해 우리들에게 이러저러한 신앙의 깨우침을 주고 싶어 합니다. 지금부터 그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영생은 어디에?]
우선 오늘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이 얻고자 했던 것은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무엇입니까? 그냥 문자적으로 그대로 읽어서 육체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삶을 지속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말한 것은 계명의 준수와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준 뒤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다 해도 육체가 죽음을 맛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또 23절에서 예수님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하시는데, 여기서는 영생이 하나님 나라와 동일하게 쓰입니다. 마가복음서 전체에서 영원한 생명은 여기에 딱 한 번 등장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종교적 인간은 죽음 없는 세상을 늘 그리워했고, 지금도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생명은 그런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영원하다는 말을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붙이며, 참된 생명, 즉, 진짜 산다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즉, 하나님의 통치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곳,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 진정한 삶이라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이 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저 세상에서도 그렇게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신앙고백입니다.
구약시대를 살았던 이들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참된 삶, 즉, 영생은 주님께서 주신 율법에 순종하여 사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들은 이제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인격 예수 그리스도를 잘 따르는 것에서 완성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물었기 때문에 마가는 예수님의 입을 통해 구약과 신약의 모든 방법을 말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재산을 가진 것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실패하고 맙니다. 이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찾고자 했지만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해 오던 대로 자신이 모은 재산을 의지합니다. 그럼 이 사람이 자신이 말한 대로 과연 구약의 계명은 잘 지켰을까요? 마가는 사실 그렇지 않다는 암시를 본문에 해 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말씀하신 계명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제5계명인 부모공경, 제6계명인 살인 금지, 간음하지 말라는 7계명, 8계명 도둑질하지 말아라, 9계명인 거짓 증언하지 말라. 십계명 중 사람과 관련된 계명이 모두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순서라면 마지막 열 번째 계명도 등장해야 하는데 여기서 약간 이상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은 "너희 이웃의 소유는 어떤 것도 탐내지 못한다"입니다(출애 20:17, 신명 5:21 참조). 그런데 바로 이 열 번째 계명 부분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이것은 십계명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열 번째 계명과 밀접하게 관련됩니다. 이웃의 소유를 탐내는 사람은 결국 남을 속여 빼앗을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왜 마가복음서는 십계명을 말하면서 이렇게 바꾼 것일까요? 고대사회에서 재산을 많이 소유하려면 남을 속여서 빼앗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땅을 공평하게 분배 받은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부자가 되는 유일한 길은 절박한 사람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나 곡식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습니다. 이자놀이를 잘하면 나중에 땅도 빼앗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족에게 이자를 받는 것이 율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이 재산이 많았다는 것은 계명을 어기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마가는 독자에게 명확하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분명 재산의 형성 과정에서 속여서 빼앗는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이 사람의 정체가 조금씩 드러납니다. 이 사람은 재산에 대한 애착이 많습니다. 재산이 자신을 지켜 주고 안락하고 행복한 삶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도 어기면서 재산을 증식했습니다. 남을 속여서 빼앗을 생각은 했지만, 남과 나눌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신만의 행복과 더욱더 완벽한 삶을 살고 싶은 이 사람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찾아갑니다. 예수가 온갖 기적을 베푼다는 소식을 듣고, 이 사람은 자기가 가진 재산으로 채울 수 없는 더 큰 무엇, 즉, 이 사람이 기대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예수를 찾아갑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무릎도 꿇고 아부의 말도 합니다. 그러나 역시 재산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만약 이 사람이 진정으로 영원한 생명이 하나님께 달린 것이며, 예수님이야말로 선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신 분임을 깨달았다면,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에 순종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영원한 생명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진정 깨닫고 알았다면 울상을 짓고 근심하며 돌아갈 리가 없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많은데 그것을 다 팔아서 내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누구나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궁극적으로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다만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자신의 방식으로 예수를 찾아갔던 것뿐입니다. 요한복음서 17장 3절의 말씀대로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내가 그곳에 있을 것이다]
함께 읽은 구약의 말씀에 등장하는 모세는 이제 조금씩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떼를 치던 모세를 하나님은 부르십니다. 애굽에서 탄식하는 히브리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이제 모세를 시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모세는 당시의 습관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야 한다고 하나님께 말합니다. 고대에는 이름이 곧 존재 그 자체로 생각되었기에 지금 애굽의 왕을 만나든, 그곳에서 고생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만나든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으로 가야지만 자신을 백성들이나 애굽의 바로가 믿어 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름이 없습니다. 유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정 하나라면 그것밖에 다른 것이 없다면 굳이 이름이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안다고 해서 그의 존재를 아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 제 이름을 안다고 해서 저를 다 알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름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실제 내용이고 관계에서 보여주는 행실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라고 답하십니다. 이 히브리어를 우리 성경은 "나는 곧 나다"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많은 오해의 소지를 하게 하는 좋지 않은 번역입니다. 가장 좋은 번역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내가 있을 그곳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있을 것이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가 그곳에 있을 것이다'라고 하신 분이 너를 보냈다고 말해라."
즉, 모세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고, 그분의 명령에 바로 순종할 수 있었다면 바로 애굽으로 떠나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면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고 또 아직까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마가복음에 나오는 사람과 다른 점은 모세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생의 기쁨과 영원한 생명의 획득]
다시 마가복음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포기한 사람과 달리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약속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약속을 통해 지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생명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 그것이 바로 내세까지도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공동체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그 만큼의 상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첫 교인들은 자신들 개개인의 가족만을 챙기는 가족 이기주의를 포기함으로써 교회, 즉,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인 가족을 얻었고, 모두가 함께 쓰도록 개인의 재산을 내어 놓음으로써 어느 누구하나 부족함 없는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다른 사람의 약점을 공격하여, 즉, 속여서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의 부를 늘렸지만 그에게 영생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삶의 풍요로움은 바로 자신의 장점을 나누고, 서로 도우며 누구 하나 소외되거나 차별 받지 않는 공동체적 삶을 살아갈 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가공동체는 이렇게 평등한 공동체가 때때로 경쟁과 이익 추구의 사회에서 박해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박해는 잠시 뿐 진정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는 항목을 자세히 살펴보면 버릴 때는 분명히 버렸는데 보상을 받을 때는 받지 못하는 항목이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입니다. 고대에 아버지는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즉,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는 이유로 권력을 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오로지 사랑의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아버지가 됩니다. 영원한 생명의 공동체에서는 지배하는 자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권력을 휘두르는 자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섬기러 오신 것처럼 하나님 나라에서는 오직 사랑과 섬김만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자유의 복음"입니다. 오늘은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에서 해방된 지 72주년이 되는 날을 기억하며 우리 교단이 평화통일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허리 잘린 사람이 설 수 없듯이 진정한 자유와 독립은 남북의 통일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남북 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남과 북 모두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코리아 패싱이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분단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강대국의 권력 놀음에 꼭두각시가 되어 버렸습니다. 자유롭고 자주적인 대한민국이 되기 위해 우리에게 놓인 과제들은 참으로 많고 평화통일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또 다른 많은 것으로 인해 자유롭지 못합니다. 경제적 불평등, 성적 차별, 학벌, 지역감정, 세대간의 갈등 우리는 참으로 여러 가지 잘못된 습관과 가치관으로 인해 여전히 부자유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근심하며 돌아갔던 사람처럼 우리는 아직도 참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역설적으로 참된 것을 따르고 순종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모세는 바로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히브리 사람의 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니, 이제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을 걸어가서, 주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니 허락하라!"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권력과 근심과 불안으로부터 자유를 찾는 길은 하나님께 나아가 그 분 앞에 서는 것입니다. 서구 역사 속에서 근대적 인간은 제 스스로 자유를 추구하였지만 개인의 자율성을 자아도취적 이기주의로 남용했고, 결국 그것은 외로운 개인, 함께 하는 것에 미숙한 주체를 만들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라는 책으로 전 세계 그리스도인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던 앨버트 놀런 신부님이 30년이 지난 뒤 『오늘의 예수』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놀런 신부님은 예수의 영성은 근원적인 자유의 영성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께 뿌리박은 신앙으로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았고, 모든 것에서 초탈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대체로 우리는 예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간혹 특별한 예외가 있겠지만, 대개는 원수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뺨을 돌려 대 주지도 않는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지도 않고 나를 저주하는 사람에게 축복을 빌어 주지도 않는다. 가난한 이들에게 내 것을 나누어 주지도, 하나님께 모든 희망과 신뢰를 두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우리는 저마다 변명거리를 갖고 있다. 나는 성인(聖人)이 아니라고."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여러분도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으십니까? 참된 삶의 의미, 근원적인 자유를 누리고 싶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자신이 가진 것을 놓아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진지하게 따르십시오. 그 길이 유일한 길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영이신 하나님!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아침 바람처럼 맑은 얼굴, 저녁 하늘처럼 영광스러운 얼굴, 구룡연(九龍淵)의 폭포 같은, 천지의 깊음 같은, 땅 중심에서 하늘에까지 닿는 거목같이 싱싱하고, 굳게 찡그린 바위의 가슴을 터치고 웃는 꽃 같은 그 얼굴을 보았습니다. 당신 얼굴 보아서 세상 시름 잊었고, 당신 얼굴 대하여 맺힌 가슴 시원히 뚫렸습니다. 오늘 다시 그 얼굴 보고 싶습니다. 님의 얼굴 바라며, 님의 얼굴 그리며 슬픈 눈물로 씻어 내린 맑은 눈으로 당신 얼굴 한 번 더 보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17.8.13.)
* 여기에 들어가시면 설교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SoulLoveCommunity/UkVO/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