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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는 행복한 사람

이윤경 교수(이화여대)

신명기 33:29; 시 1:1-6; 마 5:1-10

이윤경
(Photo : ⓒ 이화여대 교목실)
▲이화대학교회에서 8월 20일 주일 설교를 한 이윤경 교수(이화여대 기독교학과)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9).

1. 들어가는 말

매년 3월 20일은 '세계 행복의 날'입니다. 이 날에 맞추어 유엔지속가능개발연대(SDSN)는 2012년부터 세계행복보고서를 발표합니다. 이 세계행복보고서는 국가의 1인당 GDP, 사회복지제도, 건강 수명, 인생 선택의 자유도, 관용, 정부와 기업의 신뢰 지수 등을 조사하여 순위를 매깁니다. 이 조사 결과를 보면, 대체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 정부가 투명하고 관용이 지배하는 나라, 평균 수명이 긴 나라들이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참고로, 올해 순위를 보면, 북유럽국가들이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1위는 노르웨이, 2위는 덴마크, 3위는 아이슬란드입니다. 우리나라는 55위이고, 바로 위인 54위는 라트비아이고, 56위는 몰도바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의 누군가는 "아니 행복을 수치로 표시하고 순위를 매길 수 있나?"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수치와 상관없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행복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떤 상태를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흔히 우리는 먹을 것이 있고, 잘 곳이 있고, 큰 걱정이 없을 때,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지금 먹을 것도 있고, 잘 곳도 있고, 심지어 주일 오전 교회에 나와 앉아 있을 수 있을 정도의 건강이 있고, 시간적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다지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혹은 더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우리는 충분히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살아갈까요? 우리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요?

2.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제가 이번 여름에 우연히 『몰입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별로 길지 않은 책이기도 했지만, 책 제목대로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imihaly)는 미국 클레어몬트 대학교 교수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행복은 즐거움이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미국인 500명을 두 시간 단위로 체크해 본 결과, 행복은 단순히 자신이 즐거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TV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TV만 하루 종일 본다고 해서 행복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행복의 기준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몰입, 보람, 의욕이라고 말합니다. 집중과 즐거움이 더해지고, 몰입하게 되면 더욱 더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복은 단순히 내가 지금 좋아하는 일, 즐거운 일,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높은 차원의 것을 몰입해서 하는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은 찰나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높고, 깊은 차원이 연루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결국 행복은 본능에 충실한 삶이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의 삶을 추구할 때 느끼는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칙센트미하이의 실험결과에 바탕 한 행복론은 사실상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것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책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삶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최고의 선은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심적인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활동을 수행할 때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행복의 정의를 규정하는 데 중요한 개념은 바로 '덕'이라고 주장합니다. 덕이란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떤 활동과 어떤 실천을 해야 최고의 선인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삶 속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고 싶습니까? 인간이 삶 속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을, 또 어떤 사람은 지식을, 명예를, 부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관조적 활동, 즉, 미덕, 중용, 자발성, 정의, 실천적 지혜, 우애 등의 활동을 통해 최고의 선인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바처럼 덕을 행하며, 관조적 활동을 수행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 것 같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에 대한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드는 생각은 이런 관조적 활동을 수행하도록 하는 힘은 무엇일까라는 보다 더 근원적 질문을 하게 됩니다. 분명 사람은 윤리적이고 자기충만한 삶을 살 때, 만족하고,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추동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 힘의 근원에 대해 묻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행복한 삶'에 대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지 살펴봅시다.

3. 복 있는 사람

구약성경에서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가장 유명한 본문은 시편 1편입니다. 시편은 여러 종류의 장르의 시들로 이루어진 책입니다. 그 중 한 장르가 행복송(beatitude)입니다. 행복송은 시편 중에서, 히브리어로는 '아슈레,' 우리말로는 '복 있는 자는' '~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라는 구절이 들어가는 시편을 말합니다. 행복송은 시편에 산재해 있습니다. 시편에 '아슈레'는 모두 26번 나옵니다. 시편 다음으로 이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 성경은 잠언입니다(8번). 우리는 이런 '아슈레'가 들어가는 잠언을 '축복잠언'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잠 28:14)와 같은 잠언이 축복잠언입니다. 이처럼 시편과 잠언에 '아슈레'가 집중해서 나오는 것을 볼 때, '아슈레'가 들어가는 행복송과 축복잠언이 지혜문학에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시편과 잠언에 '아슈레'가 집중적으로 나오는 것은, '아슈레'는 그저 남의 행복을 인정하고 찬양하고 축하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혜문학이라는 문학유형의 특성에 따라, '아슈레'라는 행복송을 듣거나 읽는 사람들에게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소개하고, 이 길을 따라 살 것을 권장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아슈레'가 들어가 있는 시편 1편을 봅시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은'이라는 구절로 시작하고, '악인들은...'이라는 병행구절로 대조를 구성하면서, 복 있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시편 1편에서 우리말 '복 있는'이라는 말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바로 '아슈레'입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서 '복'이라는 한 단어로 무차별적으로 번역되고 있는 히브리어는 실상 두 단어가 있습니다. 먼저 지금 얘기한 '아슈레'가 있고, 다른 하나는 '바라크'입니다(예: 이스라엘 총리-에후드 바락, 미국 대통령-바락 오바마). 이 동사는 예컨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번성하게 하고, 땅을 주겠다고 약속할 때, 혹은 살렘 왕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우리말로는 하나님이 복 주신다고 할 때나, 행복하다고 할 때, 모두 한 단어로 '복'이라는 말로 번역하지만, 히브리어에서 동사 '복주다'는 '바라크'이고, 형용사 '행복하다'는 '아슈레'입니다.

이처럼 '아슈레'는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로서, 시편 1편에서는 '얼마나 행복한지'(how happy), '얼마나 복 받았는지'(how blessed)라는 감탄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을 보고, 부러워하면서 감탄해서 말하는 관행적 표현이 바로 '아슈레'입니다. 시편 1편은 행복한 사람은 어떤 생활 태도를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행복송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의 삶을 위해 베푸는 자비하심이 바라크라면, 행복송의 '아슈레'는 행복에 이르는 행위와 특성들을 지적하고 권장하는 것이 주요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행복송에서는 어떤 사람을 행복하다고 말합니까? 우리말로 '복'으로 번역된 부분을 보다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행복'으로 바꾸어서 시편 1편 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이처럼 시편 1편 1절은 행복한 사람이 되는 길에 대해서 이런저런 사람이 되면 안 된다는 식으로 알려줍니다. 그래서 시편 1편 1절은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악인이 되지 말고, 죄인이 되지 말고, 오만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편이 가르치는 것은 그저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안분지족의 삶이 행복한 삶이라는 소극적인 마음의 자세가 아니라, 행복한 자가 되고 싶다면, 그에 알맞은 적극적인 행동을 수반하라고 가르칩니다. 행복하고 싶다면,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악인이 되지 않고, 죄인이 되지 않고, 오만한 자가 되지 않겠다는 마음의 결단, 또 그에 따른 실행력이 있어야만 행복한 자가 된다는, 수행적 행복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4. 팔복

신약에서 '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가장 잘 알려진 성경본문은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입니다. 이 설교에서 예수는 여덟 유형의 복 받을만한 자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에서 우리말로 '복이 있나니'로 번역되는 단어 역시 시편 1편의 아슈레와 동일하게 '행복'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즉, 우리말에 '축복하다'라는 동사인, 히브리어 바라크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는 εὐλογέω이고, 우리말로 '행복하다'라는 형용사인, 히브리어 아슈레에 해당하는 헬라어 형용사는 μακάριος입니다. 그렇다면 산상수훈의 팔복에서 형용사 '마카리오스'를 사용하는 것을 볼 때, 이 역시 행복한 자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이 부정형으로 악인이 되지 않고, 죄인이 되지 않고, 오만한 자가 되지 않아야지만 행복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면, 산상수훈은 긍정형으로 행복한 자가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행복한 자라고 알려줍니다.

시편 1편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산상수훈 역시, '행복'은 단지 우리의 현 상태에 대한 만족이나, 상대적으로 느끼는 만족감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어떤 자가 되어야지만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행복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하고,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이 가르치는 것보다, 산상수훈이 가르치는 행복에 이르는 길이 더욱 어려운 것 같습니다. 단순히 악인이나 죄인이나 오만한 자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가 되어야 한다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이 더 힘든 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팔복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복 받을만한 자'라고 생각되지 않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어떻게 가난한 자가, 배고픈 자가, 우는 자가 복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런 점에서 팔복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상반되는, 매우 급진적이며, 심지어 전복적으로까지 보이는 사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학자들은 산상수훈의 행복론을 종말론적 행복이라고 명명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그런 행복을 누렸지만,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행복이라고 봅니다. 바로 이점에서 시편 1편과 산상수훈 모두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행복'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이고도 주도적인, 수행적 성격의 행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 본문 모두에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자는 불행한 감정의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대상이 됩니다. 즉, 단순히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자이며, 그 결과 단순히 행복하지 못한 상태 그 이하의 상태가 됩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심령이 가난하지 못한 자, 애통하지 않는 자, 온유하지 않은 자는 단순히 불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상태에 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가르치는 행복은 단순히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을 요구하는 행동과 직결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시편 1편과 산상수훈이 말하는 '행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수행적 행복론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수행은 관조적 덕행, 그 이상의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관조적 수행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악인이 되지 않겠다는 자기결단을 촉구하고, 결국에는 악인이 되지 않아야지만 행복할 수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5. 행복한 사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신명기는 모세가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마치며, 약속의 땅을 건너다보면서 정착생활의 경험이 없이 광야에서 자란 세대를 향하여 던지는 유언의 연설로 구성된 책입니다. 정착생활의 경험도 없는 세대들이 이제 아무도 기다리는 자 없고, 어떤 것도 약속되지 않은 땅을 향해 들어가야 되는 상황인데, 이들을 향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 신명기 33장 29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열 두 지파를 향한 축복을 마무리하면서 던진 이 말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광야 40년 생활을 보낸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말씀을 현장에서 들었을 때,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너는 행복한 사람"이다, "너 같이 구원을 얻은 백성이 누구냐?"고 묻는 모세의 말씀에 순순히 수긍할 수 있었을까 회의가 듭니다. 돌이켜 광야생활 40년을 회상할 때, 과연 이들은 자신들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의 불편함은 말할 것도 없고, 하루 앞이 불투명한 절망적 상황을 긴 세월 감내하여야 했습니다. 또한 이제 팔레스타인 땅 입성을 목전에 두었지만, 이들의 앞날은 여전히 불투명하고, 분명 더욱 암담하였을 것입니다. 저 땅에 들어가면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을 해서 먹고 살지, 아무 것도 구체적으로 약속된 것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는 곳마다 자신들보다 강한 정착민들과 끊임없이 마주하면서, 싸웠고, 앞으로도 싸워야 하는 지난한 삶이 여전히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라고 단언합니다.

신명기 기자는 약속의 땅에 도달하면, 의식주가 충분하고 화려하고 편안할 것이라는 허위의식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불쌍하고, 더 불행한, 아직도 노예된 자들도 있으니, '그래도 너희가 그들보다는 행복하다'라고 남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행복한 백성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굶지도 않았고, 이민족들과의 전투 속에서도 몰살당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온 것을 보면, '그만하면 괜찮은' 평균값의 인생이니, '너희가 행복하다'고 이야기하는 것 역시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도달하는 그 광야 길 여정 가운데, 그 굽이굽이마다, 삶이 곤두박질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선택하였기에, 너희는 행복한 백성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신명기 기자는 모세의 입을 통하여, 고통과 고난의 삶의 여정이었던 광야 길, 그 40년의 인생길에,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었기에,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가는 삶을 선택하였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행복한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시편 144:15에서 시편기자는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악인의 길에, 죄인의 길에 설 수 있었지만, 나그네 인생길에서 때로는 쓰러지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날 수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선택하고, 살아온 "너희는 행복한 백성이다, 여호와의 구원을 입은 백성이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6. 맺는 말

이제 먼 옛날,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광야에 선 외롭고 힘들고 지친 이스라엘 백성이 들었던 "너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씀은, 오늘 여전히 외롭고 힘들고 지친 우리에게 던져주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먹을 것이 있고, 옷이 있고, 잠잘 곳이 있지만, 왜 행복하지 못하고, 덜 행복하다고 생각할까요? 성경은 행복은 나보다 불행한 이를 보고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성경은 너 정도면 행복한 줄 알고 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행복한 자는 적극적으로, 주도적으로 악인의 삶을, 죄인의 삶을, 오만한 자의 삶을 선택하지 않는 자가, 또 심령이 가난한 자가, 온유한 자가 될 때 그때서야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누구를 동반자 삼고, 인생길을 가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동반자 삼고 가는 삶은 행복하고, 하나님과 함께 가지 못하는 삶은 불행합니다. 우리는 고된 인생길에서 하나님보다 다른 어떤 것을 동반자 삼고자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광야 길 40년의 세월 속에 배고프고, 목마르고, 약속의 땅이라는 목적지의 존재조차 신기루처럼 보이는 이들에게, 너희는 그 광야 길 인생의 고단한 길에 하나님을 동반자 삼고 보냈기에 '너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몇 해 전 대강당 무용채플 마지막에 배경음악으로 나온 찬송곡이 있었는데, 그 가사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그 가사 중에 "절망 속을 감사함으로 지남은, 여호와가 함께 함으로... 모든 고난 감사함으로 지남은, 여호와가 함께 함으로 여호와가 함께 함으로"라는 후렴 구절이 가슴에 참 와 닿았습니다.

자기가 좋아하고, 재미있는 일만 하며 산다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인생에 세운 목표를 달성한 사람만이 행복을 느끼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목표에 미달한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 없는 삶이 행복한 삶이 아니라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하나님과 함께 했던 예수님의 고난의 삶이 가르쳐 줍니다. 우리 모두의 인생에 절망할 때가 있고, 고난의 시간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오늘도 절망과 고난의 인생의 길에서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우리의 여호와와 함께 함으로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고백하실 수 있는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017.8.20.)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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