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편 18:16-19, 고린도전서 2:9-12, 누가복음 5:1-6 -
Jesu Juva. 영어로 "Man Complex"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자가 남자다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의미합니다. 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 대기업 사무직 남성 10명 중 6명 이상이 이 "Man Complex"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남자가 남자다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과도하게 압박 받으면 마음의 병이 됩니다. 이 병 때문에 한국 남성들의 삶이 행복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20~30대 남성 사망률은 여성의 2배가 넘습니다. 40대에는 3배가 됩니다. 자살률은 남자가 여자의 2배인데, '자살성공률'은 남자가 여자의 3배가 됩니다. 왜냐하면 자살할 때에도 '남자답게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과감하게 결행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학력 콤플렉스'입니다. '일류대학 콤플렉스'라고 하기도 합니다. 소위 명문대생들도 자기보다 서열이 높다는 대학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같은 대학을 다니면서도 본인이 가고 싶었던 학과에 가지 못했으면 또 이 콤플렉스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콤플렉스, 즉,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주눅 들게 만들고, 무엇이 우리의 어깨를 움츠려들게 만듭니까? 과거 윤정희라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는 자신의 손이 밉다고 생각하여 어디를 가도 악수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날 OECD 국가 중 성형수술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가 한국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따지고 보면 외모에 대한 열등감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국인에게는 개인적인 열등감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열등감'도 있는 듯 합니다. 한국을 방문하는 서양인들에게 우리가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How do you like Korea?" '한국 어때요?' 하지만 우리는 같은 질문을 동남아 출신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던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신 그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야, 너 얼마 버니?"입니다. 우리에게는 서양에 대한 집단적인 열등의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남성 콤플렉스, 학력 콤플렉스, 외모 콤플렉스, 집단 콤플렉스, 그리고 수많은 다른 콤플렉스 등 ... 우리들의 삶은 어쩌면 콤플렉스 투성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많은 콤플렉스들은 다 어디서 오는 겁니까? 열등감은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하고 기뻐하고 감사하지 못해서 생긴 마음의 병입니다. 행복과 기쁨의 근원이 내 안에 없어 생기는 영혼의 우울증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기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로 언제 기뻐하고 언제 슬퍼하나요?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는 대부분 남들이 칭찬할 때 기쁘고 남들이 비판할 때 슬픔을 느낍니다. 교수님의 칭찬 한 마디에 학생들은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하지만 누가 뒤에서 나에 대해 이런 저런 욕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으면 우리의 마음은 이내 슬픔과 분노의 바다에 빠져들게 됩니다. 기쁨과 슬픔의 원인이 '내 안'에 있지 않고 '나 밖'에 있습니다. 남의 눈과 입을 통해 만족과 행복을 얻으려 하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혹 서커스단에서 오색무늬 천을 걸치고 피리소리에 발맞춰 흥겹게 춤추는 곰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곰은 무슨 피리소리에 흥이 겨워 그렇게 춤을 추는 것일까요? 관중의 박수갈채가 신나서 그럴까요? 비밀은 '조건반사'입니다. 훈련사들은 곰을 철판 위에 올려놓고 열을 가합니다. 바닥이 뜨거워지니 곰은 발을 번갈아 구르게 됩니다. 그 때 옆에서 흥겨운 피리가락을 불어댑니다. 이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면 마침내, 러시아의 생리학자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가 말한 조건반사(Conditioned Reflex)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제 곰은 피리소리만 들어도 두 발을 번갈아 구르며 춤을 추게 됩니다. 발바닥이 지져지는 고통이 무서워 저도 모르게 춤을 추게 됩니다. 멋모르는 관중은 박수갈채를 보내고, 돈은 재주부린 곰이 아니라 뜨거운 철판 위에서 곰을 고문한 서커스단 주인 호주머니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남의 장단에 맞춰 춤추는 것이 과연 이 곰만의 이야기일까요?
오늘날 대다수 현대인들의 삶은 '슬픈 곰의 춤'과 같지 않을까요?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오는 기쁨이 아니라 남들의 칭찬과 비판이라는 장단에 맞춰 두 발을 구르며 춤을 추는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정보화 시대는 개인의 창조성과 개성이 중요하다고 말들 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인터넷으로 24시간 연결된 현실에서 우리는 점점 더 '나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가'보다 '남들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더 마음을 뺏기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이 진정 누구인가'보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더 신경을 쓰며 사는 것 같습니다. 정보화 시대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한 개성과 아름다움에 기초한 다양성이 아니라 획일화된 미와 획일화된 가치관 그리고 획일화된 소비패턴을 요구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가리키는 존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획일화된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를 재는 사회에 살다보니 다음과 같이 웃지 못 할 유머도 만들어졌습니다. 제목은 '세계적인 과학자들이 한국에 태어난다면'입니다. 퀴리부인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취직을 하려고 했으나 얼굴 때문에 면접 때마다 번번이 떨어졌고, 에디슨은 발명특허를 내려고 했으나 초등학교 졸업장 밖에 없어서 접수조차 할 수 없었고, 아인슈타인은 수학만 잘하고 다른 과목은 못해서 대학에 갈 수 없었고, 갈릴레이는 우리나라 과학현실에 입바른 소리를 하다가 연구비가 끊겨버렸고, 마지막으로 사과나무 아래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은 다행히 대학원까지 갔는데 아무도 그의 졸업논문을 이해하지 못해 결국 교수가 되지 못하고 사과장수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땅에 있는 갈릴리 호수는 끝에서 끝이 보일 정도로 작은 호수지만 2천 년 전 사람들은 그곳을 '바다'라 불렀습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팔레스타인 땅을 남북으로 6천 킬로미터에 걸쳐 관통하는 거대한 단층지역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사납고 매서운 바람이 불어 풍랑이 높았던 곳입니다. 마치 바람이 좁은 건물 사이를 통과하면 더 빨라지고 세지는 원리입니다. 때문에 예수님 시대 갈릴리 어부들에게는 한 가지 불문율이 있었습니다. 절대로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언제 풍랑이 일어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고기잡이는 언제나 얕은 물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는 찌든 가난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 곳을 예수님께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시몬이라는 어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고기잡이를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볼까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런데 그 분의 말씀 속에는 이상한 힘이 있었습니다. 사나운 풍랑보다 더 큰 힘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지금까지 한 번도 고기 잡으러 나간 적이 없는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 가장 깊은 곳까지 나아갔습니다. 그 곳에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하니, 오늘 읽은 성경의 말씀처럼,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삶을 정말 값지게 살다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남들의 평가와 판단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정신을 집중하기보다, 자기 자신의 깊은 내면의 세계를 갖고 거기에서 솟아오르는 힘으로 주위의 오해와 비난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간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스데반 커베이라는 학자가 전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2백 명의 자서전을 꼼꼼히 연구해보니 그들에게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quick technic," 혹은, "quick character," 즉, 무엇인가 남으로부터 빨리 인정받을 수 있는 임기응변적인 기술이나 그러려는 성격을 애당초 가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들도 살면서 기쁠 때가 있었고 슬플 때가 있었습니다. 왜 안 그랬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이 기뻤을 때에는 누군가 칭찬해주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걷고 있는 길에 대한 확신과 감사 때문이었고, 그들이 슬펐을 때에는 누군가 뒷 담화를 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정한 일을 성실히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습니다.
미국의 하버드 경영대학의 마지막 수업은 평상시와 매우 다르게 진행된다고 합니다. 토론도 없고, 질의응답도 없고, 교수님은 칠판에 아무 것도 적지 않고 기말시험의 형식에 대해서만 간략히 설명한다고 합니다. 학생들은 메모를 한 뒤 조용히 노트북을 닫습니다. 하지만 아직 수업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사회에 나가 멋진 일꾼이 될 학생들을 향해 교수들은 지금까지 수업시간에 아껴두었던, 스승으로서의 최고의 조언을 들려준다고 합니다. 그 조언들을 모아 『하버드 졸업생은 마지막 수업에서 만들어진다』는 제목의 책이 나왔습니다. 그 중 인상적인 것 하나 소개합니다. 데이비드 켈 교수의 조언입니다. "5년마다 열리는 모교 방문행사에 절대 오지 마라!" 이유가 무엇일까요? 켈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졸업생들이 동창회를 의식해 옛 급우들에게 자랑할 거리를 생각하며 살다보면 짧은 시간에 자신의 이력을 돋보이게 해줄 일이나 순식간에 떼돈 벌 일만 고르게 된다고 합니다. 그 결과 지식과 재능이 넘치는 인재들이 돈벌이는 꽤 되지만 자신에게 적합하지도 않고 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직장에서 인생을 허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버드 졸업생은 마지막 수업에서 만들어진다』, 이 책의 원제목은 Remember Who You Are입니다. '당신이 누군지 기억하라'입니다. 저의 미국 유학시절 Ash Wednesday, 즉, '재의 수요일' 예배가 생각납니다. 재의 수요일이란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사순절'의 시작을 알리는 교회의 절기이지요. 종려나무 가지를 태운 재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고 기도하며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둘씩 짝이 되어 서로의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그리며 "Remember Your Baptism; Remember Who You Are"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당신의 세례를 기억하시오. 당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시오.' 순간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잊고 있던 크리스천으로서의 정체성이 다시금 저를 일깨워주었습니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얕은 물가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한 풍성하고 값진 삶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의 한 가운데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나아가 거기에 그물을 내려야 합니다. 콤플렉스는 깊이가 없어서 생기는 마음의 병입니다. 깊이란 주체성입니다. 주체성이란 고유한 자신의 정체성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위기가 닥치는데 위기는 상황이 변해서 오는 게 아닙니다. 상황은 언제나 변하고 불확실합니다. 위기는 상황이 변해서 오는 게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깊이, 자신의 주체성, 자신의 정체성을 잊어버렸을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의지나 선택과 상관없이 세상 속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우리의 실존은 이 세계 속에 '던져져 있음'(thrown-ness)에서 출발합니다. 이렇게 던져진 인간은 그가 속한 세상에서 통용되는 일상의 규범, 즉, 세론(世論)을 따르며 살아갑니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지 않고, 세론에 의해 지배되는 삶을 사는 상태를 '비본래성'(unauthenticity)이라 하고, 이런 비본래성에 젖어있는 인간, 즉,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를 두려워하고, 그들과 똑같은 길을 가려하고, 또 그들과 존재의 모든 가능성을 똑같이 낮추려고 하는 그런 인간을 '세인'(世人, the They)라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로마서 12:1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은 이 세대에 '순응'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크리스천이라 불리는 우리의 존재의 정체성은 지금처럼 한둘을 승리자로, 나머지 다수를 패배자로 만드는 그런 시대의 룰에 정신없이 적응하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대신, 우리 하나하나를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하나하나에게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이고 독자적인 가치를 부여하시며, 그 귀한 하나하나가 모든 승리하기를 원하시는, 그리고 도리어 가난한 자, 슬퍼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자비한 자, 마음이 깨끗한 자, 평화를 만드는 자들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의 룰에 따를 때 비로소 만들어집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서로 명함을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명함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크리스천 명함에는 무어라 씌어 있습니까?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나오실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이상 가는 예수님의 신분증명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 - 이것이 예수님의 명함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구약성서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습니다(시편 18:19).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는 "기독교의 복음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도 받아주셨다는 이 한마디다"라고 했습니다. 크리스천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입니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고 말씀하시며 내 모습 이대로 나를 받아주시고,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도 무언가 위대한 일을 이루려고 하신다는 게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부른 찬송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도 어떤 콤플렉스로 고통 받고 슬퍼하고 그것을 감추려 애쓰고 있습니까? 누가 준 열등감입니까? 어떤 제도와 문화와 인습이 강요한 콤플렉스입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인 '척'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자기'다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다움'은 '아름다움,' '사람다움'과 같이 사물이 자기다울 때 가장 아름답고 바람직하다는 뜻입니다. 자기'다움'은 곧 자기'존중'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물입니다. 유사 이래 나와 똑같이 걷고, 말하고, 생각한 사람은 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창조물입니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시장에서 사고 팔리는 상품이 아니라, 효용가치에 의해 비교되는 상품이 아니라, 이 세상에 둘도 없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작품을 상품화하지 마십시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내 삶을 내맡기지 마십시오.
대신에 여러분의 갈릴리 바다로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의 갈릴리 바다로 힘차게 노 저어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 가장 깊은 곳 그 한 가운데에 계십니다. 거기로 노를 저어 나아가 그 곳에 깊이 그물을 내릴 때 우리의 삶에는 풍성한 은혜와 기쁨이 가득 찰 것입니다.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고 존재에 있습니다"(에리히 프롬).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 깊이 내 영혼의 그물을 내리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땅에 내어놓으신 단 하나의 '고유한 나'로 존재해야 합니다. 존재함만으로도 진실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늘 사랑이 넘치고 정이 많으며 애정이 돈독한, 그런 사람의 향내가 우리에게서 나야 합니다. 그렇게 존재의 깊이를 가지고 의연하게 이 시대를 헤쳐 가십시오. 조급해 하지 말고,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당당하고 의연하게 흔들림 없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멘. (2017.9.3.) 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