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 26-27절, 시편 8편 1-9절, 요한복음서 10장 31-38절
[성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비 콕스]
세계적인 석학으로 많은 지식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고, 뉴욕 타임즈가 21세기의 10대 신학자라고 부른 하버드 대학의 하비 콕스 교수가 2009년 80세의 나이에 정년퇴임을 한 뒤 6년 후에 책 한 권을 내어 놓는데, 그 책이 올해 5월에 번역되었습니다. 제목은 『성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How to Read the Bible?)입니다.
이 책의 서문에 자신이 그동안 성서를 읽어왔던 세 단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성서를 이야기로 읽는 것인데, 어릴 때 아이들이 동화책을 읽듯이 성서에 나오는 매우 다양한 인물들과 사건들을 마치 실제 일어난 이야기처럼 있는 그대로 읽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성서를 보다 더 학문적으로 읽어내는 것인데, 성서가 쓰인 시대적 상황이라든가, 문서의 장르적 성격, 저자의 의도를 살피는 역사적 읽기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하비 콕스가 영적인 단계라고 부르는 것으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개인과 사회를 아울러 성서가 오늘 우리들의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작용하면서 생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의 읽기입니다.
같은 성서를 읽지만 읽은 사람에 따라 거기에서 얻고 깨닫는 것은 천차만별입니다. 특히 성서가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장에서 쓰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하기 쉽지 않은 고대에, 우리 문화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쓰였기 때문에 성서를 이해하는 것이 때로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점점 성서를 멀리하고 있고, 또 성서를 열심히 읽는다 하여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거나, 자신의 마음에 드는 성서 구절만 따로 떼어 읽거나, 자신의 입장이나 오늘날의 상황을 성서에 투사하여 읽곤 합니다. 때론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교리의 파편들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기도 하고, 세상적인 가치관과 성서가 말하는 세계관이 혼합되어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바르게 깨달으려면 이런 모든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하비 콕스 교수처럼 우리도 사실은 이야기 단계, 역사적 단계, 영적 단계들을 오가며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더욱 깊이 성경을 읽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진실된 마음으로 묻는 자에게만 자신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수십 년 교회를 다니고, 종교생활을 하였다고 해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지 않았다면 그의 신앙은 여전히 투정부리는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사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 것도 바로 바른 성서 읽기를 하지 못해서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읽었지만 잘못 읽었고, 그래서 잘못 믿었고 잘못 살았습니다. 50년 동안이나 하버드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쳤던 이 노 교수가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끊임없이 성경을 읽으며 묻고 또 물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해야 합니다.
[인간의 창조]
창조절 첫째 주일을 맞아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의 말씀은 너무도 유명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다른 것들은 특별한 설명 없이 말씀으로 창조되는 반면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스스로에게 하시는 말씀이 나오는데,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제가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와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27절은 단 한 절이지만 이 안에 "창조하셨다"라는 말을 세 번이나 언급함으로써 사람을 창조하신 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속에 창조되었습니다. 게다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만 모든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게 하는 권한을 주십니다.
즉,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의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특별히 생각하고 계신지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함께 읽은 시편의 저자는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본문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27절에 특별히 사람의 창조를 언급하시면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한 번 더 강조한 이유는 어느 한 부류만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성적 정체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고대에 남자와 여자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오늘 본문은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에서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인데, 오늘 저는 이것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다양한 관점]
오늘의 본문을 유치부나 어린이부 교우들이 읽으셨다면 하나님도 사람처럼 생겼구나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아이들이나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나 모두 하나님을 한 번 그려 보라고 하면 대체적으로 전부 흰 수염 늘어뜨린 할아버지를 그리곤 하는데,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이렇게 사람의 모습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 중에도 혹시 하나님이 사람처럼 눈과 코와 귀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신지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으시지만 사실 우리의 하나님 이해는 우리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기준에서 자신이 겪은 경험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지금의 심민정 전도사님과 같이 목사후보생 수련과정을 하던 때, 일 년에 한 번씩 일주일간 집중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중 한 시간에서 강사로 오신 목사님 한 분이 종이 한 장을 나눠 주시더니, 반을 접고 한 면에는 예전에 생각하던 하나님 이미지를, 그리고 나머지 면에는 신학을 공부한 후에 요즘 생각하는 하나님 이미지를 그려 보라고 했습니다. 사람마다 특색 있는 그림들이 나왔습니다. 그 중에 한 친구가 그린 그림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예전에 생각하던 하나님 그림이 눈으로 빼곡히 찬 그림이었기 때문입니다. 설명을 들어보니 예전의 하나님은 어디서나 자신을 감시하는 눈 같았다는 것입니다. 시편 139편에는 이분이 그렇게 생각할만하구나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 중략 ~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물론 시편의 저자는 어디에나 계셔서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지만 이 분에게 하나님은 하나의 감시자로 느껴졌던 것입니다.
오늘 성서 본문을 이해할 때도 이런 비슷한 일들이 벌어질 것입니다. 저마다 처한 상황에서 본문을 이해하고, 또 하나님을 느끼고 알기 때문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썼던 사람들은 어떤 하나님을 느끼고 알았기에 이런 성서 본문을 썼던 것일까요? 창세기를 썼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려고 했던 하나님 체험은 무엇이었을까요? 왜 이들은 사람이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이렇게 강조했던 것일까요? 이제 하비콕스가 말한 두 번째 단계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창세기 1장을 기록한 이들은 바벨론으로 잡혀가서 식민지 백성으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남의 나라로 끌려가서 노예 생활을 하며 자신들의 신앙을 뿌리로부터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혹시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아니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힘이 없는 분이신가?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신 것인가? 이 벌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가? 국가적인 대 재난 속에서 이들은 새로운 신앙고백에 이르게 되는데, 바로 이 보잘 것 없이 망해 버린 백성의 하나님이 사실은 온 세계의 진정한 창조주라는 것입니다.
수메르와 바벨론의 창조 이야기에는 신들이 제 맘대로 행동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자기들을 섬기고 자기들에게 제물과 음식을 바치는 종으로 인간을 창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유일신으로 고백하는 하나님은 결코 세상을 그렇게 창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말씀으로 질서 있게 창조하시고,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만들어 책임 있는 대리자로 세웁니다.
바벨론의 신화적 세계에 가치관의 뿌리를 둔 사람들은 지배계급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천자(天子)요, 신의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같은 사람을 노예로 부리고 함부로 대했지만,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 모두에게 당신의 형상을 주었다고 고백함으로써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에게 형제의 정신으로 대하여야 한다." 세계인권선언 1조입니다. 바로 창세기 1장의 사람 창조 이야기는 이 인권선언의 모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넘치는 뜻]
창세기 1장 창조 이야기의 저자가 처한 상황에서 사람을 창조하신 이야기는 당대 식민지에서 신음하던 유대 백성들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현실의 고난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미래를 준비하며 현재를 해석하도록 새로운 안목을 주었습니다. 때로 자존감에 상처를 받아도,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며 참 인간다움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비록 삶의 환경은 노예의 비참한 모습일지 모르지만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니고 있었기에 쉽게 굴복하거나 절망하거나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2,500년 전에 글로 남겨진 이런 신앙고백은 지금 우리에게도 힘이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이 구절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상상력을 불러 일으켰고, 2000년이 넘는 유대-기독교 전통 속에서 다양한 뜻을 지니게 됩니다. 계몽주의를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은 인간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이 바로 사유할 수 있는 이성의 능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만이 다른 동물과 달리 자기를 되돌아보고, 세계의 운행 원리를 탐구하여, 자연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문명을 만들어 온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이성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악한 일을 도모하는데 사용합니다. 그래서 살인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합니다. 그 수법이 얼마나 교묘한지, 당하는 사람은 속수무책이 됩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질 때 그런 사람, 그렇게 이성을 사용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우리는 단순이 이성의 유무, 사유 능력만을 가지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윤리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앎과 모름의 문제만이 아니라 어떻게 행동하느냐의 문제도 함께 생각해야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바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지니고 있는 어떤 부분을 하나님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실 성서의 정신과 어긋납니다. 그래서 십계명은 그 어느 것을 가지고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유의 능력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고, 생각하는 존재로서 하나님과 인간이 마치 동등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다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성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창세기나 시편의 말씀에서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지으신 이 창조세계를 다스리게 합니다.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새로운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부여 받은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 창조 세계를 잘 돌보고 가꾸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세상은 지금 어떠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세계를 잘 돌보지 못했습니다. 지구는 병 들었고, 아파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신뢰와 사랑과 평화와 화해가 있기보다 불신과 증오와 전쟁과 다툼이 계속 되었습니다. 인류의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과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 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아담이 범죄 한 이후에 본래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졌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
이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하나님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은 작품을 보시고 좋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계는 하나님의 작품이며 그것은 시편 저자가 말하듯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솜씨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보다 더 놀라운 창조를 하셨습니다.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자신을 봅니다. 우리가 우리와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소통하며 살듯이, 하나님은 이 세계의 창조와 유지를 위해 인간과 소통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으로써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신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가 하나다"(30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을 들은 유대 사람들이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고 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신앙에 철저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말은 분명히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는 분명 나사렛 출신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간일 뿐인데 네가 어찌 하나님과 하나라고 할 수 있는가? 유대 사람들의 신앙의 열정을 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회심하기 전 바울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하는 예수의 제자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넣은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이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바로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그 오래된 사실입니다.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예수만이 하나님의 참 형상(고후 4:4, 히브 1:3, 골로 1:15)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자 한 것은 바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 지구에서 하나님을 알아보게 하는 표지는 바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명료하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서 사역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람"으로서 정확하게 "하나님의 아들"로 살았습니다. 즉, 우리는 그분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았습니다.
저의 큰 아이 선규가 5살 때 쯤 일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 가족은 제 고향 파주 교하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사시는 동네 바로 옆 동네였는데, 하루는 제 아내와 선규가 함께 길을 가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다가 오셔서 선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가, 문덕이 자식 아니야?" 제 아내는 깜짝 놀라서 얼른 인사를 드렸습니다. "안녕하세요!" 나중에 알고 보았더니 그 아주머니는 저의 오랜 친구의 어머니였습니다. 저를 잘 알고 있는 어머니는 선규의 얼굴에서 저를 보았고, 그래서 곧 바로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진정한 사람, 참 사람이 된다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아라.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면, 나를 믿지는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서를 쓴 이들은 예수에게서 하나님을 보았고, 예수님 덕분에 자신들이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들을 자신들이 해 내면서 이들도 자신들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 안에 자신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서가 말하는 대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태초에 보여주셨던 그 창조의 능력을 이어받아 이 우주를 아름답고 원래 보기 좋았던 그 모습으로 유지해 나가야 합니다.
유대인 랍비가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언제 새벽이 된 줄 아는가?" 한 제자가 대답합니다. "사람의 눈에 하늘의 환한 빛 한 줄기가 보이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그러자 랍비는 아니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가 말합니다. "사람이 숲에 있는 나무들을 구별하여 볼 수 있을 때 새벽이 옵니다." 스승은 그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아무 대답도 못하자, 그 때 랍비가 입을 열었습니다. "너희가 밖을 내다보았을 때,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너희의 형제로 보일 때 그 때 새벽이 온 것이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성도 여러분! 언제 하나님 나라가 옵니까? 여러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일 때, 모든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때입니다.
마지막으로 함석헌 선생님의 "얼굴"이라는 시의 일부분을 읽어 드리고 제 설교를 마칠까 합니다.
얼 굴
-함석헌-
이슬에 젖어 반짝이는 들판을/ 뚫고 닫는 큰 길 위에/
기운 좋게 내리쏘는 아침 햇빛을 받으며/ 배바삐 오고 가는 저 얼굴들, /무엇하러 어디로 가는 얼굴들인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무엇 잡으러 무엇 보러/ 누굴 보러 뉘게 뵈러/ 가는 얼굴들인고?
남자 얼굴, 여자 얼굴,/ 젊은 얼굴, 늙은 얼굴,/ 아직도 잠이 아니 깬 얼굴,/ 무슨 꾀를 그리는 얼굴,/ 우멍한 얼굴, 뻔뻔한 얼굴,
간사한 얼굴, 얄미운 얼굴,/ 어떤 거는 기름때가 번지르르 돌고,/
어떤 거는 수수깡같이 빼빼 마르고,/ 젠 체 입을 다문 것,
반편만치 침을 지르르 흘리는 것,/ 영웅심에 들뜬 청년,
욕심에 잔주름이 잡힌 노인,/ 실망한 얼굴,/ 병에 눌린 얼굴,
학대받아 쭈그러진 얼굴,/ 학대하고 독살이 박힌 얼굴,/
얼굴, 얼굴, 그 많은 얼굴들 속에/ 참 아름다운 얼굴은 하나도 없구나.
참 고운 얼굴이 없어?/ 하나도 없단 말이냐?
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 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
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 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
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하고,/ 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애,
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 가슴이 그저 시원한,
그저 마주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 얼굴,/ 참 아름다운 얼굴은 없단 말이냐?
~ 중략 ~
아, 내 마음 급해!/ 내 가슴 타! / 내 눈 흐리고 /
내 숨 헐떡여 끊어지려 하네!/ 그 얼굴 하나 /
그 산 얼굴 하나 보고 싶은 마음에.
이 세상 뭘 하러 왔던고?/ 얼굴 하나 보러 왔지.
참 얼굴 하나 보고 가잠이/ 우리 삶이지.
시간의 끝없는 물결/ 들고 또 나는
영원의 바닷가에,/ 한없는 모래밭에,/ 오르며 또 내리며
헤매어 다니면서/ 진주 한 알 얻어 들잠이/ 우리들의 삶이지.
~ 하략 ~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영이신 하나님!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태초에 아름다웠던 그 모습 되찾게 하여 주소서. 우리가 아무런 생각 없이 행할 때 우리를 용서하소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게 하시고, 모든 피조물들이 우리를 통하여 참된 평안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에게 창조의 능력을 부어 주셔서, 주님 창조하신 이 세계를 잘 이끌어가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여기에 들어가시면 설교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SoulLoveCommunity/UkVO/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