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4장 1-9절, 마태복음서 14장 13-20절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누군가 제게 영화 하나를 추천하라고 한다면 제가 서슴지 않고 추천할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로베르토 베니니가 주연과 감독을 함께한 작품으로 1998년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하였고 1999년 아카데미에서도 7개 부문의 후보로 올라, 음악상, 최우수외국어영화상,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습니다.
파시즘이 팽배하던 이탈리아의 1930년대 말, 유대인 청년 귀도는 숙부 밑에서 웨이터로 일하다가 어느 날 초등학교 여교사 도라를 만나 첫눈에 반합니다. 도라는 파시스트인 읍사무소 서기와 약혼한 사이였지만 귀도의 순수한 구애와 사랑을 받아들이게 되고, 이들은 결혼하여 아들 조수아를 얻게 됩니다. 동화처럼 행복한 결혼생활도 잠시,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이들 앞에 불행이 찾아옵니다. 독일의 유대인 말살 정책으로 귀도와 그의 아들 조수아는 유대인 수용소에 끌려가고, 유대인은 아니었지만 가족과 함께 하고자 했던 도라도 격리된 채 각기 다른 수용소에서 비참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귀도는 그런 상황에서도 전쟁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들 조수아를 위해 이것은 일종의 게임이고, 1000점을 먼저 따는 사람이 일등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때부터 아빠인 귀도는 아들의 행복한 일상을 위해 단 한 번도 슬픈 표정이나 힘들고 지친 표정을 보이지 않습니다. 처형당하러 가는 와중에도 병정놀이를 하듯 아들 앞에서는 밝고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일관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귀도는 아들을 위해 매우 깊은 사랑으로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 지를 보여 줍니다. 오늘 하루의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이며, 한 사람의 아름다움을 향한 그 열정은 곧 다른 사람의 인생마저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고 영화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요즘에 저는 강남순 교수의 『배움에 관하여』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거기에 한 인터뷰를 소개하고 있는데,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르윈스키 스캔들이 터졌을 때, 힐러리 클린턴이 했던 인터뷰입니다(『배움에 관하여』, 31-32).
미국의 빌 클린턴은 임기 내내 미국의 경제 호황을 이끌어서 민주당 대통령으로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 52년 만에 처음으로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입니다. 그러나 그는 모니카 르윈스키를 비롯해 3년간의 다른 여성들과의 성추문이 폭로되어 탄핵의 위기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르윈스키 스캔들이 터졌을 때 미국의 찰리 로즈(Charlie Rose) 쇼의 인터뷰에 힐러리 클린턴이 나왔습니다.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찰리 로즈는 "어떻게 지내십니까?"(How are you?)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힐러리는 그 평범한 인사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침묵했습니다. 아마도 남편이자 정치적 동지인 빌 클린턴의 성추문 사건 직후였기에 "어떻게 지내냐?"는 물음이 가볍게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잠시 침묵하던 힐러리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매일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뜨면 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자, 힐러리. 오늘 어떠한 자신을 선택할 것이지? 주변에 불만을 터뜨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냉소적인 힐러리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가장 최선을 다하여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힐러리를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나는 매일 아침 냉소적인 힐러리가 아니라, 이 삶을 인정하고 긍정하는 힐러리를 선택합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매일 아침 어떻게 여러분들의 인생을 선택합니까? 무엇을 기준으로 삼으며, 그런 선택에 따른 여러분들에 삶에 만족하시는지요?
[제자들의 선택과 예수님의 선택]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서의 말씀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른 제자들의 체험담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선택합니다. 세례 요한이 죽었고, 그 제자들이 요한의 시체를 거두어다가 장사 지냈다는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몸을 숨기십니다. 예수님 또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이고,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세례 요한의 이스라엘 갱신운동과 맥을 같이 하였기 때문에, 헤롯 안티파스가 세례 요한의 잔당들을 소탕한다면 예수님조차 위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났지만, 지도자를 잃은 이스라엘의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오늘 본문은 무리가 여러 도시에서 몰려 나왔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배를 타고 가시는데 이들은 걸어서 따라옵니다. 이런 모습들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이 어떠한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대변해줄 지도자 세례요한을 잃었고, 각 도시들에는 그 도시를 다스리는 통치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자신들을 의탁할 수는 없었으며, 또 예수님을 걸어서 따라왔다는 것은 제대로 된 이동수단 하나 갖추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저녁이 되었을 때 이들 모두가 굶주렸다는 것은 도시락 하나 준비할 수 없는 극빈의 상태였음을 알려 줍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또 이렇게 곤궁한데다가 병마에까지 시달리는 이들을 고쳐 주십니다.
어느 덧 저녁이 됩니다. 예수께서 계신 곳은 광야입니다. 풀 한 포기, 한 움큼의 물조차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제자들은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자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의견을 묵살하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물러갈 필요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예수께서 명령하셨을 때, 제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은 솔직히 대답하고 있고, 바로 우리도 제자들과 같이 이런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의 합리적인 이성을 가지고 계산해 보면 제자들처럼 우리가 가진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일말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고, 특히 내 문제도 아니고 남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것은 더욱 더 힘든 일입니다. 그들 각자가 알아서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 있으면 해결될 일이니, 각자 알아서 사 먹게 하자고, 제자들이 말했듯이 우리도 그렇게 말하기 쉽습니다. 가정의 문제이든, 교회의 문제이든, 이 사회의 문제이든 당사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우리가 무슨 상관인가 하고 생각하고, 그 문제들을 해결할 때도 언제나 돈이 문제라는 식으로 떠넘깁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전혀 다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일단 예수님은 무리들의 문제를 각자 해결해야 할 문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굶주리고 지도자를 잃고 있는 이 백성의 문제를 바로 나의 문제로 여길 것인가, 아닌가 입니다. 내 문제로 여겼다면 무엇으로 이들을 도울 것인가 하는 실천적인 두 번째 문제에 바로 직면하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것을 꼭 돈으로 해결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미 있는 것을 가지고 하늘에 감사의 축복기도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미 우리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하십니다.
물론 돈은 매우 중요합니다. 돈이 있으면 많은 것들이 해결됩니다. 그러나 돈을 만들어 내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카를 마르크스가 훨씬 전에 말했지만 인간의 노동이 바로 잉여가치를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함께 하겠다는 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부터, 그것이 비록 작아 보이고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그것부터 해나가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지 못하는 놀라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도 가진 떡과 물고기를 하늘을 향해 우러르시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떻게 그 작은 양으로 수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었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결과는 온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열 두 광주리에 부스러기가 가득 찼습니다. 가득 찬 것은 본 음식이 아니라 부스러기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할 때,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능력들을 나눌 때, 모든 사람이 먹고 마실 뿐만 아니라 그 부스러기로도 온 이스라엘을 살릴 수 있다는 고백을 우리는 오늘 만나게 됩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이런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명 앞에서]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주저주저하는 한 사람이 여기 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 말씀의 주인공인 모세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애굽 땅에서 고생하고 있는 히브리 백성들의 고통을 보시고 하나님은 가시떨기의 불꽃 속에서 모세를 불러 자신의 백성을 이끌어 내시고자 합니다. 모세는 이 중차대한 명령 앞에서 큰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 내겠습니까?" 모세는 계속 망설입니다. 자신은 말재주가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자신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자신은 하나님 당신의 이름도 알 수 없다며 계속 피할 구멍을 찾습니다.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시라고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 걱정과 염려,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 한 모세를 설득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모세와 비슷합니다. 평범한 우리는 대체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안녕을 위해 살아갑니다.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즉, 자아실현, 또는 자기의 꿈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삽니다.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세상이 만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직장에 간신히 취직을 해도, 적응하지 못하고 3년이 못되어 퇴사하는 경우도 수두룩합니다. 큰 맘 먹고 자영업에 뛰어 들었지만, 기술부족, 경험부족으로 돈만 날리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런데 지금 모세는 미디안의 목자로서 자신의 삶을 잘 살고 있습니다. 비록 고향인 이집트에서 죄를 짓고 도망자 신세가 되어 타향에 왔지만, 그동안 이 곳에서 80세가 되도록 잘 정착했습니다. 가정을 꾸려 참으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고, 젊은 시절 모세가 품었던 그 높은 이상을 다시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걱정이 앞섭니다.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제가 무엇이라고"라는 말에는 이런 모세의 심정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이집트 땅에서 고생하고 있는 동족을 생각하면 여전히 그들을 바로의 손아귀에서 구원해내고 싶은 생각이 솟아오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을 지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이제 자신은 이집트 왕자도 아니요, 젊은 시절의 힘과 능력도 사라진 지 오래된 황량한 들판에서 양이나 치는 늙은 목자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돌아봐도 이 정도밖에 안되는데 누가 나를 믿고 따라오겠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를 믿어 줄 것인가? 그 젊은 시절 용기가 가득하고 머리가 팽글팽글 돌아갈 때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를 내쳤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나를 누가 믿겠는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고, 그 분이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외치겠지만 과연 히브리 백성이 이런 말들을 신뢰하겠는가? 모세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묻고 있습니다.
[모세의 믿음]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제 모세에게 하나씩 깨달음을 주십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물으신 것은 "네가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였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지팡이였습니다. 목자에게 지팡이는 맹수의 위협으로부터 자신과 양들을 지키는 소중한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그 지팡이는 그저 자기 목숨을 지킬 수 있고, 맹수를 쫓아 보낼 수 있는 정도의 지팡이지, 그것을 가지고 바로와 맞설 수는 없습니다. 한편 지팡이라도 없으면 모세는 홀홀단신 어떤 보호장구도 없이 서게 됩니다. 그래서 지팡이는 모세에게 소중합니다. 바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모세에게 그것을 던지라고 명령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지팡이를 던지자 지팡이가 곧 뱀으로 변합니다. 이런 표징을 통해 모세는 순식간에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나에게 지팡이일 뿐이지만 하나님께 드리면 이것은 다른 것으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지팡이라고 쥐고 있으면 그저 내 목숨 정도, 내가 치는 양 정도 지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지팡이를 하나님께 맡기면 이 지팡이는 더 놀라운 일을 해내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성서는 모세가 이 기적 이후로 자신의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이집트로 떠났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4장 20절).
하나님의 능력을 눈앞에서 목격한 모세는 이전보다 더욱 확고한 믿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뱀의 꼬리를 잡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내밀어 꼬리를 잡습니다. 저는 어릴 때 삼촌을 따라서 논둑을 기어 다니는 뱀을 많이 잡았습니다. 뱀을 잡을 때는 나무 같은 것으로 뱀을 누르고 반드시 머리를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뱀에게 물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뱀의 꼬리를 잡았다가는 바로 물리게 됩니다. 만약 그 뱀이 독사라면 즉사(卽死)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명하신 것은 네 목숨을 나에게 맡기라는 것이고 모세는 바로 그렇게 합니다. 그러자 뱀이 다시 지팡이로 변합니다. 이제 이 기적을 통해 모세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고, 모세는 하나님께 자신의 목숨을 맡기며 하나님의 지팡이를 붙들게 됩니다.
두 번째 기적은 모세의 손에서 일어난 변화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가진 것이 없다고, 우리에게는 그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것 말고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 자신(自身)입니다. 지난주에 설교했지만 우리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귀한 존재이고,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고, 또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 존재는 그 자체로 빛을 발하게 됩니다. 두 번째 이적을 통해 모세는 자신의 몸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위해 '나'라는 존재 자체를 변화시켜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모세는 이제 더 이상 80세의 힘없는 늙은이가 아닙니다. 신명기에는 모세의 임종을 묘사하는 말이 있는데, 120살의 나이에도 눈이 빛을 잃지 않았고, 기력 또한 정정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신 34:7). 모세는 더 이상 미디안 광야에서 양이나 치는 목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그의 존재를 바꾸어 놓으실 것입니다. 그저 제 한 목숨 유지하고 세상이야 어떻든 우리 가족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테네 사람도 아니고, 그리스 사람도 아니다. 나는 세계의 시민이다." 여러분은 하늘나라의 시민이고,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함께 하는 동역자입니다. 오늘 모세가 깨달은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류의 구원과 모든 피조물의 안녕을 위해 헌신하는 청지기임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창조절기를 보내는 우리들은 모두 우주 생명체의 한 구성원으로 나의 삶과 행위가 이 태양계만이 아니라 우주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실 개인의 행복과 가족의 평안함도 이 사회 전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좀 더 좋은 사회를 만들고 좋은 나라를 만들려고 애쓸 때 나 자신과 우리 가족의 평안도 보장되는 것입니다.
오늘 모세의 모습을 통해서 지도자의 한 단면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명을 가지고 이집트로 돌아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말과 자신을 믿어줄까를 고민하였습니다. 사실 40년 넘게 고향을 떠나 있던 모세를 믿어줄 리가 없지요. 그의 능력을 본 적도 없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평가할 기회도 없습니다. 그저 전설처럼 들려오는 것은 40년 전에 이집트 궁에서 키워진 유대인 한 명이 있었고, 그가 젊은 시절 제 혈기를 이기지 못해 이집트 감독관을 쳐서 죽이고 도망쳤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모세는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요?
첫째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지켜 줄 그 지팡이! 모세는 이것을 하나님께 내어 놓았습니다.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지켜줄 안전장치를 풀어 놓은 것입니다. 둘째 모세는 자신의 몸을 변화시켰습니다. 그의 손은 악성 피부병으로 녹아내렸습니다. 이것은 그의 헌신의 정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옛날 중국 고사에 보면 우 임금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관개 시설을 잘 다스려서 농사짓는 백성들에게 풍요를 가져다주었는데, 물 관리를 위해 늘 수로에 다녔기에 7년 동안 다리에 털이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 임금의 수고로 백성들은 홍수나 가뭄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사랑하는 생명 사랑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아직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살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말한 만인제사장 설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의 구원을 위해, 억압당하고 있는 모든 생명체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하나님께 내어 놓을 줄 알아야 하고, 우리 자신을 드려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우선적으로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도 세상 사람들은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모세가 두 가지 이적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 주어도 그들이 믿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오랫동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여 세상에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에 오래 살다 보니 이집트 사람들이 신으로 받들던 나일강을 믿고, 나일강이 자신들의 생명을 좌지우지한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마저도 우상숭배에 물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 주시는 마지막 기적이 바로 나일강에서 퍼온 물이 피로 변하는 것입니다. 나일강을 섬길 것이 아니라 진짜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다시 새롭게 거듭나는 길]
오늘날 왜 그리스도교가 힘이 없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베푸신 그 놀라운 선물과 은총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바르게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방식, 자본주의의 방식에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방식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을 대했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알아서 돈으로 해결하라! 없는 놈들은 굽신거리며 살아라. 자기 지팡이를 움켜쥐고 제 목숨과 제 가족만을 위해서 살아라! 이런 세상의 가치들이 교회에 침투하였고,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는 우리들마저 그것에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 놓았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지팡이를 하나님 앞에서 던져버렸고,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것들을 가지고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올 한 해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양적으로 부흥하고, 질적으로 성숙하기를 기도하고 바랐습니다. 이제 그 열매들이 조금씩 맺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라지 않고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면 왜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가진 것을 과감하게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알아서, 각자가 알아서 해결해주겠지 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그러니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십시오"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하나님의 사명을 회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던 분들은 분명 조금씩 자라고 있습니다. 존재가 변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거기에서 기적을 일으키시고 이적을 보여 주십니다.
물고기 두 마리, 보리 빵 다섯 개,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그것으로 오천 명이 먹고도 남은 부스러기가 열 두 광주리에 가득했던 것처럼, 우리가 지닌 것이 작아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충분히 누리고도 그 남은 것으로 삼천리 금수강산이 더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마십시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주위가 어둡다고 불평하는 그 시간에 한 자루의 촛불을 켜십시오. 자신이 바로 그 초가 되십시오. 그 길이 유일한 길입니다. 자신을 드려 태울 때 하나님의 밝은 빛이 어둠을 몰아낼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너희가 주어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주님의 명령에 우리가 가진 것을 하나님께 내어놓게 하소서. 그래서 나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구가 되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께 내어드릴 때 우리 존재가 변하고, 우리의 삶은 기적으로 가득 찹니다. 우리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나라를 일구소서. 세상에서 나쁜 소식이 들려와도 주님을 믿는 참된 믿음 안에서 희망을 잃지 않게 하소서. 어떤 순간이라도 우리는 주님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하늘의 시민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7.9.10.)
* 여기에 들어가시면 설교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SoulLoveCommunity/UkVO/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