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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마가복음서 10장 35-45절, 로마서 14장 13-19절

[한가위 명절의 명암(明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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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 김진한 기자)
▲생명사랑교회 한문덕 목사

한가위 명절을 잘 보내셨나요? 푸짐하고 넉넉한 먹을거리가 있고, 오랜만에 일가족들과 친지들을 모두 만나 그 간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명절은 우리들의 삶에 활력소가 됩니다. 이번에는 열흘이나 되는 긴 명절로 인해 충분히 쉴 수 있고, 더 여유를 지닐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명절로 인해 도리어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한 취업포탈(잡코리아와 아르바이트 알바몬)이 직장인 및 취업준비생 2,892명을 대상으로 공동 설문조사를 한 결과에 따르면 이들 중 77.5%가 명절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래서 "명절 증후군"이라는 말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고향을 오가는 장시간의 운전과 명절을 치르면서 겪게 되는 가사노동에서 오는 신체적 피로, 시댁과 친정의 차별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머리가 지끈거리고, 어지러움을 느끼며 소화불량에 시달립니다. 명절을 지내고 난 뒤에도 무기력하고, 괜히 우울해지고, 심지어 가슴이 답답해지며 호흡곤란까지 생기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국민건강 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매년 추석 명절이 있는 9-10월에 척추질환과 관절염으로 인한 진료 환자 수가 평소보다 두 배까지 증가하고, 화병 환자도 급증한다고 합니다.

이런 명절후유증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연휴 마지막 날에는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가벼운 산책이나 조깅,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어 주고, 채소와 과일을 섭취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혹시 우리 교우들 중에도 명절 후유증이 있으시다면 오늘과 내일 몸조리를 잘 하셔서 평소의 생체 리듬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명절이 되어 모처럼 만에 온 가족이 모이게 되면, 함께 식사하고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꽃이 피게 되지요. 모진 풍상을 극복한 집안의 역사도 듣게 되고,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 얘기도 듣게 됩니다. 그렇게 저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한 가족이면서도 그동안 서로에 대해 몰랐던 것들을 새롭게 알게 되기도 합니다.

저도 이번 추석에 가서 한 번도 뵙지 못했던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어떻게 대하셨는지에 대해서 처음 들었습니다. 저의 할아버지는 구척장신의 큰 키에 손발도 엄청 큰 분이셨는데, 저의 아버지는 매우 작은 체구여서, 할아버지가 제 아버지를 보며 늘 "저 쬐깐이(어린아이의 전남 방언)가 무슨 일을 하겠노!"라고 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매우 성실하신 분인데, 어쩌면 할아버지의 그 한마디를 극복하기 위해 그렇게 평생토록 일하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족들이 둘러 앉아 옛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면 한 가족이 같이 겪었어도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기에 이야기는 더욱 흥미진진하지요. 그렇게 옛 이야기들, 그간 지내온 이야기들이 깊어질수록, 가족들은 더욱 더 서로를 잘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가족 간의 끈끈한 정은 더욱 깊어집니다.

[복음서의 탄생과 마가복음서가 그리는 열두 제자]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가복음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예수님과 함께 일상을 보내며 다양한 사건을 겪었던 사람들의 증언들이 모아져서 탄생한 문서입니다. 온 가족이 모여 조상들의 이야기를 하듯,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매주일 모여서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들을 다시 떠올렸고, 예수님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들을 나누고 또 공유하였습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이나 보는 관점, 그리고 저마다의 해석과 기억방식에 따라 서로 다른 이야기들, 새로운 이야기들이 터져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서로 나누면서 자기가 알고 있던 예수님의 모습뿐만 아니라 미처 모르고 있던 예수님의 모습들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점점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해의 폭이 넓어질수록 예수님에 대한 사랑도 깊어졌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변에 있었던 초기 제자들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로 각양각색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최소한 4개의 복음서를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과 예수님이 함께 했던 사람들의 전체적인 삶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마가복음서를 썼던 사람보다 예수님에 대해서 더 잘 알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서 저자는 잘 몰랐던 마태와 누가, 요한복음서의 예수님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가 전하는 예수님 이야기는 예수님의 삶 전체를 전부 담은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서가 이미 말하고 있듯이(21:25), 예수께서 하신 일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한 책들을 다 담아 두기에 부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서가 쓰일 당시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지 40여년이 흐른 시점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것은 잊어버리고 어떤 것은 기억에 남는데, 대체로 들은 사람과 연관된 것이 기억에 잘 남게 됩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가 설교를 듣지만, 아마 몇 달이 지나면 여러분들은 오늘 설교 전체를 기억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다가 왔던 부분, 자신이 감동을 받았거나, 의아하게 여겼거나 하는 것들은 여전히 기억이 나겠지요.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들은 초기 제자들의 기억들과, 또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었고, 그 중에 어떤 것은 마가복음에, 또 어떤 것은 마태나 누가에, 또 어떤 것들은 요한복음에 기록됩니다. 같은 사건도 기록자가 처한 상황, 즉 복음서를 만들어야 했던 어떤 공동체의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기록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서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수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죽게 될 것이라는 세 번의 예고를 한 뒤에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주러 가시는데, 수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은 고관대작의 감투를 예수님께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와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마태복음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아니라 이 형제들의 어머니가 부탁하는 것으로 나옵니다(20:20-21). 이렇게 복음서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예수님의 수제자라면 예수님의 뜻을 잘 알고 그분의 뒤를 따라야 할 터인데, 이들은 지금 예수님이 가시는 길과 정반대의 길로 가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수난 예고를 하실 때마다 열두 제자들은 엉뚱한 소리를 했습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를 하자, 제자 중에 제자 베드로는 길길이 날 뛰면서 그럴 수 없다고 예수님을 말립니다. 그러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꾸짖음을 당하기도 하지요. 두 번째 수난 예고를 했을 때도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서로 누가 더 높은지 다투었고, 이제 세 번째 수난 예고 후에는 세베대의 아들들이 이런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고, 십자가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전해주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오해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참된 제자는 어때야 하는지를 말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의 길과 제자들의 모습과의 대조를 통해 참된 제자의 길이 어떠한 것인가를 자기의 공동체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열두 제자의 모습은 별로 긍정적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의 초기에부터 예수님과 함께 하였음에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기로 하자 이들은 예수님의 뜻을 잘 이해하지도 못하고, 결국은 예수님을 버리고, 배신하고, 도망갑니다.

[첫 마음을 끝까지 간직해야 한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아버지 세베대를 일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 두고 곧바로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물만 버린 것에 비해 이들은 아버지와 일꾼, 배까지 포기하였으니 예수님을 위해 훨씬 더 많은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결단한 것은 원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단순히 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사는 인생이 아니라, 로마의 식민지 지배 속에서 고생하고 있는 민족을 위한 삶, 불평등과 억압의 세상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누리지 못하는 형제자매들을 위한 삶, 즉,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 나라의 운동에 참여하고자 이들은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이들은 이런 것을 잊어버리고 권력의 자리에 오를 것을 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 이제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가야 할 사명은 온전히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 즉, 교회들에게 남겨졌습니다. 처음 생긴 교회들은 열 두 사도를 중심으로, 특히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이었던 베드로와 주님의 동생 야고보, 세베대의 아들들에 의해서 기틀이 잡혀가고 있었습니다(사도행전 15장, 갈라디아서 2:9 참조). 사랑과 정의가 펼쳐지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탄의 세력을 몰아내고, 온갖 악한 것들을 물리치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수단이었던 힘을 소유하게 되면 어느새 힘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권력을 누리려는 습성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은 상황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교회들을 지도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힘을 갖게 되었고, 그것을 행사하는 방식이 권력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자기를 내어주는 길이 아니라, 더 큰 힘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볼 때,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칼리귤라 황제의 박해 시절에 순교를 당하고, 아마 요한도 49년 이후에 순교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마가복음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교회라는 조직과 제도가 생기면서 교회의 지도자 자리를 놓고 새롭게 드러난 갈등과 권력욕에 대해서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마가복음서는 교회가 세상의 다른 어떤 조직과는 달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예수께서 다른 어떤 지도자와는 다른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천군천사를 부를 수 있었지만, 가장 강력한 힘으로 로마군대를 제압할 수 있었지만, 그분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의 입을 통해 오늘 마가복음서는 새롭게 탄생하고 있는 대안 공동체인 교회의 길을 말합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위대한 섬김의 사람]

예수님의 명령이자 새로운 공동체의 기준은 모든 구성원이 섬기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섬기는 공동체야말로 참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이 권력을 탐하자 나머지 10명이 분개합니다. 누군가 윗자리에 올라서려는 마음을 갖자마자 이 공동체는 분열의 조짐이 드러납니다. 서로 싸우고 나뉘는 것은 자신만 옳다고 여기면서 상대와 소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 섬기려는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하고, 너는 틀리고 나는 옳고, 옳은 나는 당연히 너에게 명령할 권리가 있고, 너는 그에 따라야 한다고 하는 생각이 팽팽히 맞설 때, 모든 공동체는 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두의 구원은 결국 섬김으로부터 일어난다고 예수님을 말씀하십니다.

구원이란 모든 억압에서 풀려나는 것이며,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의 한 상징입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은 바로 이런 구원을 위해 힘을 가지려고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곧 힘이 되기에 돈을 많이 가지면 모든 억압과 고통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방식은 다릅니다. 진정한 자유와 삶의 의미, 공동체가 존재하는 방식은 서로 섬기는 것밖에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경쟁사회에서 섬긴다는 것은 발전이 아니라 퇴보로 보일 수 있습니다. 자유가 아니라 굴종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섬김이라는 가치는 매우 높은 이상입니다. 낮은 자리에 있기에, 힘이 없기에, 가진 것이 없고, 배운 것이 없기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높은 자리에 있고, 힘도 있고, 배움도 있고, 가진 것도 많은 이가 모두의 행복을 위하여 섬긴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이미 가진 것으로 모든 이의 종이 되어 그들을 살릴 수 있는 사람, 자신의 능력으로 남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위대하고 으뜸의 자격이 있습니다.

사실 성숙한 사람만이 남을 섬길 수 있습니다. 성숙하지 못하면 섬기기보다는 자기를 내세우고 싶기 때문입니다. 또한 섬김을 통해서 성숙이 일어납니다. 종이 주인을 섬긴다고 해 봅시다. 종은 주인을 잘 섬기기 위해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상대를 이해하고,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떻게 성장했는지, 그 사람의 생각은 무엇이며, 꿈은 무엇인지 등을 자세히 알수록 더 잘 섬기게 됩니다. 내 안에 있지 않은 것들, 즉, 남에 대해서 잘 알게 되고 그것을 이해하는 능력은 섬김을 통해서 확장됩니다. 낯선 것을 만나면 평범한 사람들은 어색하거나 두렵거나 떨리게 됩니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불편합니다. 심지어 어떤 것은 역겹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이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훨씬 더 여유를 지닐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낯선 것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호기심의 대상이요, 새로운 세계를 여는 기회가 됩니다. 섬김은 이런 가치를 지니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섬김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섬김이야말로 위대한 인격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고, 동시에 위대한 인격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요구했던 그 자리는 바로 이러한 섬김의 사람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그런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늘 성실하게 모두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계속 키워가면서 믿음의 형제자매와 세상을 섬기려고 애썼던 사람에게 하나님은 바로 그런 자리를 맡기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지만, 앞으로 올 세상, 즉, 미래는 바로 이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지금 서점에 나가보면 미래를 예측하는 많은 책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사회는 그 책들보다 훨씬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책방에는 4차 산업이 몰고 올 이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인공지능으로 인해 곧 닥칠 많은 문제들에 관한 책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와 이세돌 9단과의 대국에서 보았듯이, 4차 혁명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 확률이 높고, 그로 인해 인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불안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인류는 지금까지 크게 세 번의 도약기를 거쳤습니다. 신석기 혁명이라고 불리는 1차 농업혁명, 그리고 기계와 분업, 산업 발달에 의한 2차 산업혁명, 그리고 획기적인 지식 증가에 의한 3차 정보혁명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1-3차 혁명은 모두 물질적 토대 위에서 이뤄졌다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그런데 4차 혁명은 이와 다릅니다. 이 혁명은 물질적 토대가 아닌,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공지능이 인간의 많은 것들을 대체하게 되는 새로운 시대에, 역설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떠오르는 것은 바로 참된 인간성이기 때문입니다. 웬만한 일들은 로봇이 다 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의 참모습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깊은 논의가 새롭게 시작될 것입니다. 동시에 로봇은 하지 못하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그럼 로봇은 못하지만 인간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로봇은 기존의 정보를 수집하여 그 정보 내에서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정보가 없는 완전히 새로운 것은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완전히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내는 능력, 상상력과 창조력이 중요해집니다. 두 번째는 몸으로 수행하는 실천지식이 중요해집니다. 많이 아는 것은 이제 로봇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아는 것을 가지고 어떤 실천을 해내는가가 중요해집니다. 마지막으로는 공감의 능력입니다. 감정은 매우 복잡한 것이고, 아직까지 감정을 지닌 로봇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공감 능력을 지니고 모든 생명들의 공생을 위해 노력하는, 참된 인간미를 가진 사람을 이 사회가 찾게 될 것입니다.

산업혁명과 정보혁명의 시기에는 지식정보의 획득이 중요해서 똑똑한 사람이 필요했지만, 앞으로는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갈등을 원만하게 풀며, 위기 상황에서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하고, 협업을 통해 함께 그것을 헤쳐 나갈 사람이 필요하게 됩니다. 혼자 잘난 사람은 앞으로 살아가기 힘듭니다.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경청할 줄 아는 사람, 다른 사람들의 장점들을 잘 살려주고 격려해서 함께 일하는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제 독불장군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천재들의 시대도 아닙니다. 자신을 기준으로 삼고 남을 심판하고 정죄하고 부려먹으려는 사람은 외톨이가 될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자유를 절제하는 사람]

그래서 오늘 바울 사도는 로마 교회에 쓰는 편지에서 서로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형제자매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편지에서 끊임없이 말하는 것은 자신을 남에게 맞추어줄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활약하던 당시 중동과 유럽은 대제국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로마 문명이 지배하는 시대에 일반인들이 사먹을 수 있는 고기라고는 제사를 거치지 않은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자기가 직접 양을 잡든지 소를 잡든지 하는 것이 아니면 모든 고기가 다양한 신전을 거쳐 나오는 것인데, 유일신을 섬기던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고기를 먹는 것이 매우 께름칙한 일이었습니다. 율법에 얽매임이 없는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야 내가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어떤 거리낌도 없었지만, 유대인의 풍습과 절기와 전통을 지키려고 했던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먹는 문제, 어떤 절기와 금식의 날을 지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그것을 어기게 되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 설문조사에서 우리는 고액과외, 체벌, 부동산투자, 주식투자, 음주, 복권, 사주팔자 등에 대해서 기독교 정신에 위배되는지 아닌지 무관한지를 물었습니다. 6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참여자들 사이에서도 정말 서로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었습니다. 이 중 하나도 의견의 일치를 본 것은 없습니다. 교인들마다 각자 생각이 다르고, 또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입장이 다릅니다. 고린도 교회, 로마 교회 등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섞여 있는 교회에서는 음식을 먹는 문제, 또 유대인들이 지켜왔던 절기를 지키는 문제들을 가지고 서로 논란이 있었고, 때로 그것으로 인해 상처받는 일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원칙을 세웠고, 이 원칙은 매우 합리적이면서도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바로 이어받고 있습니다. 서로 섬기라는 그 정신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범죄 행위가 아니라면, 인간의 인격에 손상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부정하다고 볼 이유는 없다는 것이 바울 사도의 대원칙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금하는 마약 같은 향정신성 의약품 같은 것을 제외한 모든 기호식품과 음식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는 것과 크게 관련이 없다는 것이 바울 사도의 원칙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공의가 펼쳐지는가? 자기 내면에 하나님께서 주신 참 평안이 있으며 그것으로 믿음의 식구들과 함께 평화를 누리고 있는가? 더불어서 세상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가? 이런 모든 과정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이 있는가? 하는 것이 더 근본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이 있음에도 바울 사도는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마음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행동하라고 조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고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행동과 태도와 자세가 같은 공동체의 누군가에게 상처가 된다면 그것은 사랑을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함께 믿음의 가족이 된 이가 더 자랄 때까지, 즉, 마음 약한 성도가 강한 마음을 지닐 때까지는 기다려 주면서 조심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며, 그분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이유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작은 교회이지만 서로 매우 다른 생각과 입장을 지닌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틀린 것이라 생각하고 억지로 강요하여 하나의 생각을 하도록 하는 것은 예수님의 정신에도 맞지 않고, 현대의 감각에서도 옳지 않습니다. 서로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이 바로 이런 다양한 생각들을 들어보고, 각자가 지닌 일리 있는 말들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고 살 수밖에 없었음을 알아주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진리를 없애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가 가진 일리 있는 생각들이 충분히 이야기되고 나누어질 때 서로 동의하고 합의하는 진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진리는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각자의 삶 속에서 은혜롭게 체험된 다양한 하나님의 경험들의 공유를 통해 발견되는 것이고, 한편으로 또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아마 우리도 예수님께서 가신 길, 십자가의 그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그 길이 우리의 일상에서는 섬김으로 드러납니다. 굴종이 아니라 섬김입니다. 우리의 스승이자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배웠기 때문에 실천하는 섬김이지, 내 이익을 위해서나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생명사랑 온 성도가 서로가 서로에게 성숙한 신앙인으로 서로를 섬길 때, 바로 이곳에서 날마다 구원이 이뤄질 것입니다. 바울 사도께서 권면하신 것처럼 서로 화평을 도모하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쓰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를 얻게 하소서. 섬김이 기쁨이 되게 하소서. 큰 원칙을 잘 지켜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게 하소서. 그러나 약한 형제자매를 위하여, 여린 믿음의 식구들을 위하여 자신의 자유 또한 절제할 줄 아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하나님 나라가 먹는 일과 마시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를 이루며 기쁨을 누리는 삶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시고,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당신의 길을 따라가게 하소서. 자신을 주셔서 우리의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17.10.8.)

* 여기에 들어가시면 설교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SoulLoveCommunity/UkVO/331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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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니체의 시각에서 본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무신론자", "반기독자"(Antichrist)로 알려진 니체는 "유대인 문제"에 관해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유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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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무종교인들의 증가는 기성 종교에 또 다른 도전"

최근에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무종교인의 성격을 규명하는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정재영 박사(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종교와 사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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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섭리 숨어있는 『반지의 제왕』, 현대의 종교적 현실과 닮아"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의 섭리와 『반지의 제왕』을 연구한 논문이 발표돼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숭실대 권연경 교수(성서학)는 「신학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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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 탈존적 주체, 유목적 주체, 포스트휴먼 주체

이관표 박사의 논문 "미래 시대 새로운 주체 이해의 모색"은 세 명의 현대 및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주체 이해를 소개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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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쇠퇴하고 신학생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한신대 김경재 명예교수의 신학 여정을 다룬 '한신인터뷰'가 15일 공개됐습니다. 한신인터뷰 플러스(Hanshin-In-Terview +)는 한신과 기장 각 분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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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 선에 쏠려 있는 개신교 전통에서 미(美)는 간과돼"

「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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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