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서 5장 1-9절, 로마서 7장 14-25절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남아메리카의 멕시코 어떤 마을에 온천과 냉천이 옆에서 가지런히 솟아나는 신기한 곳이 있다고 합니다. 한쪽에는 부글부글 끊는 온천이 땅에서 솟아오르고 그 옆에는 얼음물과 같이 차가운 냉천이 솟아오릅니다. 그 동네 아낙네들은 빨래 광주리를 가지고 와서 온천에서 빨래를 삶고 냉천에서 헹구어 가지고 깨끗한 옷을 집으로 가져갑니다. 미국에서 온 관광객이 그 모습을 보고 안내하던 멕시코 관광 가이드에게 물었습니다. "이곳 부인들은 참 좋겠습니다. 찬물과 더운물을 이렇게 마음대로 거저 쓸 수 있으니까요. 이곳 사람들에게는 온천과 냉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많겠군요?" 그랬더니 멕시코 안내원의 대답합니다. "천만에요. 이곳 아낙네들은 왜 비눗물은 나오지 않는가? 하고 불평이 많습니다."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우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생각하다"라는 영어단어 think와 "감사하다"라는 영어단어 thank는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 똑같은 상황에서라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불평을 할 수도 있고, 감사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좋은 일이 생기면 저절로 미소를 짓습니다. 그러나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처럼 웃으면 좋은 일이 생깁니다. 넉넉해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나누면 넉넉해지고, 예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니까 예뻐 보이는 것이지요. 친구라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으니까 친구가 되고, 잘해서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칭찬하면 잘합니다. 충분해서 만족한 것이 아니라, 만족하기에 충분하고, 가능한 일이라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하면 가능해집니다. 젊어서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도전하면 젊어지고, 세상이 달라져서 생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구별하는 결정적 기준은 지나간 일에 대해 감사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감사를 발견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며, 그 감사를 통해 행복을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 "지옥이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 찬 곳이고 천국이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로 가득 찬 곳"이라는 영국의 격언처럼 우리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면,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렇게 감사하는 능력을 갖추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어떤 부인이 일곱 살 난 아이를 데리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웃집에 놀러갔습니다. 이웃집 아주머니는 이 아이가 사과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빛깔 좋고 먹음직한 좋은 사과를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고맙다"는 인사말 한마디 없이 사과를 받았습니다. 이 장면을 본 아이의 어머니가 무안한 마음이 들어서 무서운 표정을 지으면서 아이를 불렀습니다. "얘야, 아주머니가 사과를 주실 때는 뭐라고 해야 되지?" 아이는 잠깐 생각하더니 이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껍질을 벗겨주세요!"
감사하는 능력은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러라도 감사할 거리를 찾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할 필요가 있습니다. 탈무드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만일 다리를 한 쪽만 잘렸으면 하나님께 두 다리가 다 잘리지 않은 것을 감사하라. 만일 두 다리가 잘렸으면 하나님께 목이 부러지지 않은 것을 감사하라. 만일 목이 부러져 버렸으면 그 뒤는 다신 걱정할 일이 없음을 감사하라." 다소 과장된 면이 있지만 이렇게까지라도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언제나 감사로 넘치는 일로 가득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사실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시련과 역경을 만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간다는 것은, 수많은 도전과 어려움들을 끊임없이 극복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웃음과 행복을 주는 일들도 있지만, 그보다는 힘든 일, 슬픈 일, 어려운 일, 가슴 아픈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뜻하지 않은 질병과 사고, 실업, 파산, 가족의 죽음 등 삶을 지탱해주는 기둥들이 흔들리는 커다란 시련도 있지만,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인간관계에서의 사소한 갈등과 작은 실수, 짜증스러운 일들도 우리가 극복해야 할 시련 중의 하나입니다. 목회자는 어린 아이로부터 90세가 넘는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 청년들과도 이야기를 나눠 보면 직장에서 또 다른 친구나 동료들의 관계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스트레스를 받는 일들이 생깁니다. 스트레스 없는 삶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떤 경우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터지기도 하지만, 또 어떤 경우는 내 자신이 문제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로마서의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이 문제에 대해 절절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율법에 충실하려고 했던 바리새파였기에 조상들의 모든 훌륭한 신앙의 전통을 지켰던 사람입니다(갈라 1:14).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자신이 해야겠다고 하는 것은 하지 못하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하는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분명히 있지만, 어느새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 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법을 좋아하는 속사람과 이것에 맞서 싸우는 죄에 사로잡힌 육의 사람이 자신 안에서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바울은 발견합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
바울의 이런 고백은 모든 인간에게 발견되는 보편적 특성입니다. 자신을 성찰하는 능력이 많고, 더욱 더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에게 이런 실존적 고뇌는 더 깊이 더 넓게 더 세세하게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평범한 보통 사람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살기 때문에 자신이 악을 저지르고 잘못을 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는 줄도 모르지만, 역사적 사명을 지니고 더 올바르게 살려는 사람은 바울 사도의 고백과 같은 절규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수도사로서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사람입니다. 수도생활이라는 것은 실제적인 범죄를 저지를 수 없는 생활이지요. 여성이 없으니 간음죄도 없고, 사유 재산이 없으니 도둑질도 없고, 욕심 부릴 일도 없습니다. 세속과 분리되어 있기에 출세를 위한 음모라든가 권력 다툼도 없습니다. 그 곳에서 기도하며 주를 섬기며, 영혼을 맑게 하고,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하며 노동과 성서 묵상과 기도와 찬양으로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도 루터는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계속 자기의 죄가 떠올랐고, 하루에도 스무 번 이상이나 고해성사를 하러 신부를 찾아갔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범죄는 전혀 없지만 마음에서 일어나는 시기와 질투, 하나님에 대한 의심, 끝없이 솟아나는 육체적 만족을 추구하려는 욕구! 이 모든 것이 루터를 괴롭혔고, 루터는 이것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매일매일 신부를 만나 고해성사를 해도 끝없이 솟아나는 이 죄에 대해 참회하기 위해 루터는 로마의 스칼라상타라는 성당을 찾아갑니다. 이 성당은 교인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곳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계단이 있는데, 이 계단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믿음이 좋아서 예루살렘의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님이 끌려 올라갔던 계단을 뜯어다가 옮겨놓은 것이었습니다. 이 거룩한 계단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모든 죄가 사함을 받는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계단이었습니다. 루터 또한 자신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하여 여기를 찾았고, 그래서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계단에 입을 맞추고 무릎을 꿇고 주기도문을 외우며 자신의 모든 죄를 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스물여덟 계단을 다 올라가서도 여전히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죄책감을 모두 벗어버리지는 못했습니다. 마틴 루터 또한 바울 사도와 같이 절규하였을 것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
[38년 된 병]
제 힘으로,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풀기 어려운 과제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래 되면 보통의 사람은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체념하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서를 통해 38년 된 병자를 만납니다. 예루살렘의 "양의 문" 곁, 북쪽과 남쪽에는 베드자다라는 한 쌍의 연못이 있었습니다. 이 두 연못은 대략 사다리꼴 모양으로 된 네 개의 지붕 있는 주랑에 둘러싸여 있고, 이 두 연못을 분리해놓는 다섯 번째 주랑에는 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이 쌍둥이 연못은 원래 솔로몬의 못이라고 불린 큰 저수지로부터 물을 공급받았지만, 솔로몬의 못에 물을 공급해 주는 것은 여러 샘들이었습니다. 여러 샘들에서 가끔씩 물들이 솟구치는데 이 때 아마도 이 베드자다 연못의 물도 움직인 것 같습니다. 또 이 샘에는 철염 성분이 많아서 물이 붉은 빛을 띠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보고 병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눈 먼 사람들, 다리 저는 사람들, 중풍병자들 등 많은 환자들이 누워 있는 이 연못가에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예수님이 방문하셨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 중에 38년이나 된 환자 곁으로 가셔서, 그가 오랜 세월을 병에 시달린 것을 아시고 묻습니다. "낫고 싶으냐?"
저는 오늘의 본문을 읽을 때마다 이 부분이 생경하게 다가옵니다. 아픈 사람의 가장 큰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병이 낫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환자에게 묻습니다. "낫고 싶으냐?" 우리는 이 사람이 어떤 병이 걸렸는지 자세히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 사람도 병이 낫고 싶어서 물이 움직일 때에 연못으로 갔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먼저 갔습니다. 즉, 빠르게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눈이 멀었거나, 다리를 절거나, 아니면 중풍병자였을 것입니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라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셨고, 또 이 사람은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는 것으로 보아서, 대다수의 학자들은 중풍병자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실 이 사람의 병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알기란 어렵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본문에서 사용되는 언어들은 모두 굉장한 상징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눈이 멀거나, 다리를 절거나, 중풍병이거나 이런 병들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삶을 불편하게 할 뿐입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상태가 만약 38년이나 지속되고 있었다면 저와 여러분은 낫기를 기대했을까요? 아니면 그냥 이런 상태로 살다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우리는 일제 식민지를 35년이나 겪었습니다. 그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나섰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기득권과 이익을 위해 친일파가 된 이들도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나중에는 친일파로 변절한 자들도 매우 많았습니다. 친일행각을 한 자들과 변절한 자들에게 왜 그랬는지를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배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35년을 보냈을 뿐인데도 벌써 이렇게 거기에 안주하고 거기에서 적응하는 인간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삶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38년이나 된 병자 또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연못가 주랑에 나와 있지만 실제로 자기의 병이 나을 가망성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오늘 예수님은 바로 이 병자의 그 속마음을 꿰뚫어 보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낫고 싶으냐?" 장애를 가졌을 때, 헛된 희망을 품기보다, 그런 상태에 적응하고 그에 따른 삶을 빨리 받아들이는 것이 한편으로 그 사람의 삶에 도움이 되고, 훨씬 삶의 질을 높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에 장애는 죄의 결과로 여겨졌고, 만약 오늘날 우리의 삶의 환경이나 이 사회의 모습이 여러 죄들 때문에 계속해서 고통을 양산하고 있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오늘 바울사도가 절규했듯이 죄의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운 사람입니다. 그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운 사람이었습니다(빌립 4:11-12). 그러나 이런 바울도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싸워나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고통을 만들어내고, 분열을 야기하고, 모든 생명에게 위협을 가하고, 평화를 깨뜨리며 참된 자유를 말살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주인공 38년 된 병자는 아마 처음 몇 년 간은 자기의 병을 고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먼저 연못에 들어가느냐 하는 문제에 직면합니다. 모든 경쟁에서 1등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패자가 되는 현실에서 매번 좌절하고 맙니다. 그런 실패의 연속은 이 사람을 절망의 늪에 빠지게 합니다. 희망을 끝내 저버릴 수는 없어서 연못가에 남아 있지만, 제 힘으로 다시 자리를 걷어서 일어날 생각은 못합니다. 누군가 자기를 들어서 제일 먼저 연못에 넣어 주기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러한 형편은 사실 우리들의 삶과 매우 비슷합니다. 건강한 사람들, 자신의 능력으로 먹고 살만한 사람들, 나름대로 자기실현을 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자신들은 경쟁에서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그 경쟁에서 낙오되고 그 때문에 아프고 힘들고 다친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계속 경쟁에 뛰어듭니다. 가장 먼저 연못에 도달해야 나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쟁에서 매번 실패한 사람은 이제 그것조차도 포기합니다. 자기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경험을 너무 반복적으로 자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누군가 남이 해 주기만을 바랄 뿐, 이제 제 스스로 할 수 있는 힘은 점점 잃어갑니다. 그래서 이내 포기합니다.
[낫고 싶으냐?]
오늘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낫고 싶으냐?" 다시 한 번 희망의 불씨를 살려보려는 것입니다. 그 때 이 38년 된 환자는 자신의 이전 방법과 경험에 대해 털어 놓습니다. 낫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결코 되지 않았던 그 경험 말이지요.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다른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매우 간단하지만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남들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경쟁에 뛰어들어서 연못에 제일 먼저 도달하는 자가 승리한다는 것이었지만, 오늘 예수님은 다른 것을 말합니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요한복음서는 이 일이 일어난 날이 안식일이라고 명시함으로써 어쩌면 당시의 문화, 율법체계가 이 사람을 이렇게 옥죄었던 것이 아닌가를 묻고 있습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다음 구절에서 유대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에게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시비를 걸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 때문에 아프고 병들고 괴롭습니까? 우리를 옭죄고,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부과하고, 우리의 삶에 고통을 주는 것은 진정으로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떤 가치관에 매여 있기에 우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까? 세상의 가치에 잘 적응하여 기득권이 된 사람은 지금 세상에서도 아픈 이들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픈 이들을 찾으신 예수님의 마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한편 이 세상의 방식 때문에 아파하면서도 여전히 이 세상의 방식으로 자신의 병을 고치려는 우리들의 모습도 또한 예수님의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통하여 전혀 새로운 길을 발견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진지하게 예수의 길에서 생명을 찾으십시오. 예수의 길에서 자유의 복음을 만나십시오. 여러분이 정말 낫고 싶거든, 여러분 스스로 일어나서 여러분이 지금 안주하려는 그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십시오.
신앙의 길에서 볼 때 아직 우리 생명사랑공동체는 몇 걸음 걷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신앙에 확실하게 뿌리내릴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이 되면 우리는 거의 모든 질병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2015년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사망 원인 중 두 번째로 흔한 질병이 심장병입니다. 심장에 문제가 있어서 병원에 가면 의사들은 대체로 담배를 피우지 말고, 지방이 적은 음식을 먹고, 주기적으로 운동하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야 비만, 고혈압, 고콜레스테롤 혈증을 줄일 수 있고, 심장질환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요?
1960년대 미국 펜실베니아의 로세토 마을 주민들을 진료하던 의사들은 신기한 현상을 발견합니다. 로세토에서는 심장병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유달리 적었기 때문입니다. 로세토 사람들은 술과 담배를 즐겼고, 비만인 사람들도 매우 많았습니다. 의학적으로 심장병 위험인자가 많은 지역에서, 실제 심장병 사망은 오히려 적게 발생한 것입니다. 조건이 비슷한 1.6킬로미터 떨어진 빙고라는 마을에 비해 사망률이 절반에도 미치지 않았습니다. 1964년, 이 마을의 이러한 현상을 연구한 사람들은 <미국의사협회지>에 "특이하게 낮은 심장병 사망률: 펜실베니아 이탈리아 이민자 마을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을 냅니다. 그리고 의학논문에서 보기 드문 다음과 같은 글을 씁니다.
"로세토 마을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사람들이 삶을 즐기는 방식이었다. 그들의 삶은 즐거웠고, 활기가 넘쳤으며 꾸밈이 없었다. 부유한 사람들도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과 비슷하게 옷을 입고 비슷하게 행동했다. 로세토 마을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그 공동체는 계층이 없는 소박한 사회였으며, 따뜻하고 아주 친절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신뢰하였으며 서로를 도와주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있었지만, 진정한 가난은 없었다. 이웃들이 빈곤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었으며, 특히 이탈리아에서 이주해오는 소수 이민자들에게 그러했다."
이 마을의 특별한 점 하나는 니스코 신부라는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니스코 신부는 마을이 성장하기 위해 정치적인 참여와 교육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로세토 주민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얻어 투표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라고 적극 권장하고, 마을을 단장하기 위해 씨앗을 나눠주며 꽃을 가장 예쁘게 키운 사람에게 상을 주기도 했습니다. 지역 채석장의 근로자들이 1시간 당 8센트라는 극단적인 저임금으로 일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는 채석장 사장을 만나 임금인상을 위해 협상을 시도합니다. 협상이 결렬되자 니스코 신부는 노동조합을 만들고 스스로 노조위원장이 되어 파업을 주도해서 로세토 채석장 근로자들이 1시간당 16센트를 받으며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니스코 신부를 중심으로 로세토 주민들은 마을 고유의 문화를 만들어갔습니다. 마을 사람들 중 누군가 죽으면 함께 죽음을 애도하고, 부모가 사망하면 그 집의 아이들을 마을 모두가 돌보았습니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식량과 돈을 받을 수 있었고, 그렇게 온 마을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파산한 이웃을 돕는데 함께 하였습니다. 이 마을주민들은 내가 속한 공동체가 나를 보호해줄 수 있다는 확신이,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함께 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을의 분위기가 심장병을 막는다는 사실은 울프 박사의 위대한 논문 "로세토 효과: 50년(1938-1985) 동안의 사망률 비교"를 통해 과학적 사실로 증명됩니다.
하와이 군도 북서쪽 끝에는 인구 3만 명에 불과한 작은 섬 카우아이가 있습니다. 이 섬은 1950년대에 지독한 가난과 질병에 대대로 시달려온 지옥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주민 대다수가 범죄자나 알코올 중독자, 혹은, 정신질환자였고 학교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청소년 비행문제도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이 섬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마치 불행한 삶을 예약하는 것과 다름없었는데, 1954년부터 이 섬을 대상으로 하나의 연구가 진행됩니다. 연구자들은 1955년에 카우아이 섬에서 태어날 신생아 833명을 대상으로 이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추적 조사하는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오랜 기간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여 얻은 연구 결과는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손 가정의 아이들일수록 학교나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었으며, 부모의 성격이나 정신건강에 결함이 있을 때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부모와의 관계나 동료와의 관계가 좋은 아이일수록 자율성과 자기 효능감도 좋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연구의 자료 분석을 담당했던 심리학자 에미 워너 교수는 실험 대상이었던 833명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201명을 고위험군으로 분류하고 다시 살펴보았는데, 이 201명중 3분의 2는 문제를 일으켰지만, 3분의 1에 해당하는 72명은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으며, 심지어 좋은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보다 더 모범적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에미 워너 교수는 40년에 걸친 연구를 통해 "회복탄력성"이라는 개념을 확립하게 됩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제대로 성장한 아이들은 예외 없이 그 아이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어른이 적어도 한 명은 아이 곁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우리는 작지만 건강한 공동체를 추구합니다. 건강은 의사 선생님만 책임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낫고 싶습니까? 모든 병에서 해방되고 싶으십니까?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으십니까? 우리 곁에는 우리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해 주고 받아주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그 분과 함께 새로운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살게 될 것이고 우리 공동체는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생명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넘치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낫고 싶으냐?"라고 물으시는 주님께 나를 도와주는 다른 이가 없다고 핑계하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여 우리의 삶을 회복하게 하소서. 세상 풍조에 휘둘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우리의 삶 전체를 산 제사로 드리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과거의 어둔 자리를 걷어내고 희망의 새 아침을 기대하는 우리가 되게 하시고, 말씀에 우뚝 서서 당당히 걸어가게 하소서. 힘 주시고 위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17.10.15.)
* 여기에 들어가시면 설교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SoulLoveCommunity/UkVO/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