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박국 3:17-19, 로마서 13:8-10, 마가복음 6:34-44 -
Jesu Juva.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한국 전통에서의 '추수' 감사는 한가위에 드려져야 하겠지만, 우리는 좀 더 폭넓은 뜻으로 오늘 '추수'에 대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임성숙 시인의 "가을의 기도"입니다.
"지난 봄 여름 / 당신이 굽어보는 눈동자 안에서 / 얼마나 푸르게 얼마나 크게 / 자라났는지 // 당신이 무상으로 주시는 / 단비와 햇빛 속에 / 얼마나 향기롭게 얼마나 달콤하게 / 맛 들었는지 // 지금은 당신께서 거두는 / 수확의 계절 / 여문 열매는 여문 열매대로 / 쭉정이는 쭉정이대로 / 공의(公義)로운 손길로 거두시는 날 / 잠시 잠시만 / 그늘 속에 묻혔던 끝물 열매가 / 어여삐 무르익기까지만 / 사랑의 손길로 기다려주소서."
시인은 활자적으로 들판의 곡식과 열매를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여문 열매'와 '쭉정이'는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의미로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무상으로 주신 단비와 햇빛 속에 우리 영혼이 얼마나 향기롭게 달콤하게 무르익었는지, 시인은 하나님께서 공의로운 손길로 거두시는 수확의 계절에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우리 자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늘 속에 묻혔던 끝물 열매'와 같은 우리 자신은 아직 여물지 않았지만, 시인은 공의로운 하나님께 감히 사랑의 손길로 우리가 '어여삐 무르익기까지' 기다려 달라 청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겸손하고 온유한 자의 자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이렇게 제단 앞에 정성스런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추수감사를, 어떻게 드려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께서 어떤 감사를 드렸는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알면 우리가 어떤 감사를 어떻게 드려야 할지 배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복음서에는 모두 네 번 예수님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첫 번째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의 일입니다(마태 14:13-21, 마가 6:30-44, 누가 9:10-17, 요한 6:1-14). 한 어린 아이가 바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6:41)고 했는데 이 말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보리떡을 다이어트 음식으로 먹지만, 당시에는 초라한 음식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식사였습니다. 생선 두 마리는 아마 말라비틀어진 작은 생선이었을 것입니다. 그저 어린 아이가 하루를 버틸 수 있는 최소한의 끼니였을 것입니다. 그것을 놓고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5천 명을 먹일 수 있는 수많은 떡과 물고기가 생겼을 때 감사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감사하셨습니다. 그 감사가 기적의 출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기적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단순한 감사의 기도였습니다. 초라한 음식 위에 드린 겸손한 감사의 기도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바로 그 감사의 결과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는 이러한 예수님의 감사의 기도가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현대인들은 보통 큰 일, 중요한 사건에만 감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만 감사하곤 합니다. 화폐가치로 환산할 수 있는 것들에만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런 감사는 기복신앙적인 감사입니다. 기복(祈福)신앙이란 '복을 바라는 신앙'입니다. 복을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대부분 세속적인 성공과 복을 동일시하니 신앙적으로 문제가 됩니다. 성서적 감사는 좋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드리는 감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려움 속에서도 발견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입니다.
추수감사절은 1623년 미국 청교도 개척자들의 감사에서 시작됩니다. 플리머스(Plymouth)에 상륙하여 첫 농사를 지었지만 그 해 겨울 개척자의 절반이 굶어죽었습니다. 어렵사리 첫 수확을 거뒀지만 하루에 고작 옥수수 다섯 개를 배급받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약도, 의사도, 병원도 없었습니다. 혹독하게 추웠던 그 해 겨울 결국 개척자의 절반이 사망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고통과 궁핍을 겪으면서도 그들은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풍성한 수확을 거둬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그 참혹하고 배고픈 상황 속에서도 발견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입니다.
사실 이런 감사는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성서 하박국 3장에 나오는 감사와 일치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3:17-18). 이런 상황은 청교도 개척자들보다 더 나쁩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면 이게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땅에서 소출이 없으면 가축에서라도 도움을 받아야 할 텐데 외양간에도 소가 없다고 합니다. 이게 어떤 현실입니까? 그럼에도 하박국의 저자는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노래합니다. 인간이 신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겸손한 감사입니다. 지극하고 고귀한 감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서의 감사'입니다.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근원적인 은혜를 온몸으로 느끼며,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것이 바로 성서적인 신앙의 감사입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이런 높은 수준의 감사의 영성을 잃어버린 채 허겁지겁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가끔 몸이 아파 누워 있어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 때가 아니라면 언제 우리가 생명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과 가까워지겠습니까? 가끔 홀로 외로워질 때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현대인의 삶에서 그런 고독마저 없다면 우리가 언제 존재의 깊이에 대해 다소나마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일이 계획대로 안 되고 종종 삐걱거려도 감사해야 합니다. 가끔 아들과 딸이 실망스럽고, 어쩌다 남편과 아내가 미워지고, 시시때때로 부모와 동료가 부담으로 느껴질 때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 무거움이 없이 어떻게 삶에서 인내하고 사랑하는 보람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먹고 사는 게 힘겹고 지칠 때에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 고통이 한 번도 없고서야 어찌 눈물로 빵을 먹는 소중함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인류를 한 번이나마 생각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때때로 내 인생이 허탈해지고 허무해질 때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욱 영원한 것을 그리워하며 영생과 소망을 향하여 달려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김소엽 시인의 "기도 - 물질에 관하여"입니다.
"하나님 / 나로 하여금 / 가진 것이 너무 많아 / 하나님보다 높이 / 물질을 쌓아 / 내가 왕이 되지 말게 하시고 // 나로 하여금 / 가진 것이 너무 적어 / 사람 앞에서 비굴해져서 / 시녀가 되지 않게 하소서 // 당신의 귀한 여종이 / 품위를 지키게 하옵시며 / 제 푼수에 합당한 / 물질을 허락하사 / 헐벗은 이웃을 돌아보고 / 조금은 가슴 아프게 하시되 / 적절히 베풀어 / 천국의 기쁨을 나누도록만 / 허락하소서 // 물질이 너무 많아 / 디딤돌이 될까 / 물질이 없어 / 걸림돌이 될까 / 두렵사오니 / 부요롭게도 / 가난하게도 / 마시고, 오직 / 일용할 양식만을 / 내려주소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굶주린 남자만 5천 명이 예수님만 쳐다보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 주님은 지극히 초라한 식사를 발견하시고 거기에 감사를 드리셨습니다. 그 감사가 기적을 낳았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예수님의 감사의 기도가 넘쳐나길 희망합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감사는 '실패 속에서 드린 감사'였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는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는 뜻밖의 일이 보도됩니다. 가장 정성을 들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한 마을들이 회개하지 않는 실망스런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세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11:21). 예수님은 또 한탄하셨습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11:23). 노력의 열매가 맺히지 않은 것입니다. 당연히 화가 나고 실망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다음과 같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11:25). 여기서 '어린 아이들'은 제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파송하신 70명의 제자들이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성공적인 보고를 하였던 것입니다(누가 10:17-20).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누가 10:17). 지혜롭고 슬기있다는 자들은 '하나님의 통치'라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한 제자들을 통해 이 복음이 소리 없이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아직 미약한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보시고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태 11:26, 누가 10:21)라고 하시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진실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감사의 기도였습니다. 큰 실패가 계속되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구석구석에서 진행되는 작은 성공들을 눈여겨보시며 감사하신 것입니다. 이런 감사의 기도는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굳은 믿음과 소망이 없으면 드릴 수 없는 기도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렇게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도하심을 믿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감사의 기도가 넘치길 바랍니다.
세 번째 예수님의 감사의 기도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드리신 기도입니다. 죽은 지 나흘 후에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신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와 유족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한 11:33-35). 무덤 돌문을 옮겨 놓으라 하실 때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죽은 지가 나흘이 되어 벌써 냄새가 난다고 말하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11:40). 그리고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한 11:41)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상황 앞에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아버지여 내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요한 11;40-41). 이 기도는 "둘러선 무리를 위한" 기도, 곧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11:42)는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는 어떤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임을 믿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 알려주신 기도입니다. 우리도 이런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넷째로 예수께서 드리신 감사의 기도는 최후의 만찬에서의 기도입니다. 주님은 자기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 이렇게 기도를 드립니다.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또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누가 22:17-19)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죽기 전의 마지막 식사에서의 기도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감사,' 그것은 오직 부활과 영생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가진 자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58). 우리도 이처럼 우리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부활과 영생에 대한 확신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발견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도 내게 주어진 작은 의미들에 대한 감사, 비참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감사, 그리고 우리 자신의 부활과 영생에 대한 확신에 기초한 감사, 이렇게 예수께서 보여주신 네 가지의 감사의 기도가 우리 삶에서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일이 생겨서 드리는 감사, 기적이 일어났기에 드리는 감사가 아니라,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생명과 일상과 은총의 삶에 먼저 감사하는 기도가 넘쳐나길 희망합니다. 그리고 덧붙여 오늘 우리의 감사는 '개인적'인 감사가 아니라 성서가 강조하는 '공동체적' 감사가 되길 기도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97년, 가혹했던 IMF 외환위기 직후의 일입니다. 경기도 화성군의 한 양계장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외환위기로 사료값이 폭등하자 닭에게 하루 세 번 주던 모이를 한 번으로 줄였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배가 고파진 닭 2만 마리가 서로 싸워 죽이더니 죽은 닭의 내장을 쪼아 먹기 시작했습니다. 배고픔이라는 공동의 고통 앞에서 2만 마리의 닭 '사회'는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이 지구상에서 가장 '사회적'인 생물은 개미라고 합니다. 퓰리처상을 받은 책 『개미세계의 여행』을 보면, 앞으로의 지구는 사람이 아니라 개미가 지배할 거라는 다소 생뚱맞은 주장을 폅니다. 개미들의 희생정신과 분업능력이 인간보다 더 뛰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개미는 굶주린 동료를 절대로 그냥 놔두질 않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개미는 위를 두 개나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을 위한 '개인적 위'이고 다른 하나는 굶주린 동료가 배고픔을 호소하면 먹이기 위한 '사회적 위'입니다. 한문으로 개미 '의'(蟻)자는 벌레 '충'(虫)자에 의로울 '의'(義)자를 합한 것입니다. 개미가 '의로운 곤충'이라 불리는 것은 아마 그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우리 인간의 위도 개미처럼 두 개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랬다면 세상을 더 평화로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단 하나의 위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굶주림의 고통이 닥쳐올 때 닭들보다 더 무자비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은 위가 하나뿐인 인간이 위가 두 개인 개미들보다 때때로 더 이웃의 아픔과 슬픔을 자기 일로 여기며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1935년 어느 추운 겨울밤이었습니다. 피오렐로 라과디아(Fiorello La Guardia) 판사는 뉴욕 빈민가의 야간법정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날 누더기 옷을 걸친 한 할머니가 끌려 왔습니다. 빵 한 덩어리를 훔친 죄였습니다. 할머니는 울면서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사위란 놈은 딸을 버리고 도망갔고, 딸은 아파 누워있는데 손녀들이 굶주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빵가게 주인은 비정했습니다. 고소 취하를 권면하는 라과디아 판사의 청을 물리치고 '법대로' 처리해달라고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도리가 없었습니다. 라과디아 재판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할머니를 향해 이렇게 선고합니다. "할머니, 법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벌은 받아야 합니다. 10달러의 벌금을 내시거나 아니면 10일 동안 감옥에 계십시오." 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모자를 벗더니 자기 주머니에서 10달러짜리 지폐를 꺼내 거기에 넣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최종판결을 내립니다. "여러분, 여기 벌금 10달러가 있습니다. 할머니는 벌금을 완납했습니다. 나는 오늘 굶주린 손녀들에게 빵 한 조각을 먹이기 위해 도둑질을 해야 하는 이 비정한 도시에 사는 죄를 물어 지금 이 법정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50센트씩의 벌금을 선고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모자를 법정 경찰에게 넘겼습니다. 다음날 아침 뉴욕타임스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빵을 훔쳐 손녀들을 먹이려 한 노파에게 47달러 50센트의 벌금이 전해지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빵가게 주인과 법정에 있다가 갑자기 죄인이 되어버린 70명의 방청객들, 그리고 뉴욕 경찰들까지 벌금을 물어야 했다." 그 날 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빵가게 주인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은 벌금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갔다고 합니다.
현재 뉴욕시에는 두 개의 공항이 있습니다. 하나는 J.F.K. 공항이고 다른 하나는 라과디아 공항입니다. 앞에 것은 존 에프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의 이름을 딴 것이고, 후자는 바로 그 피오렐로 라과디아 재판장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라과디아 재판장은 그 이후 뉴욕시장을 세 번이나 역임하면서 맨해튼을 세계적인 도시로 만든 장본인입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인간의 법보다 지극히 위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법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뉴욕의 라과디아 공항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습니다.
올해도 추수감사절이 왔습니다. 시편 67편 6-7절을 보니,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이 땅이 오곡백과를 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셨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나 개인이 받은 복만 감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서의 감사는 언제나 '공동체적' 감사입니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사회는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층 간 갈등과 반목이 심해졌습니다. 어느 경제학자의 표현대로 "아랫목이 절절 끓어도 윗목이 냉골인" 심각한 불평등과 양극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하루에 약 40명씩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이 참담한 나라에서 오늘 우리가 맞이하는 2017년 추수감사절은 이 나라 백성 모두가 '함께' 드리는 감사의 절기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좋은 일이 생겨서 드리는 감사, 기적이 일어났기에 드리는 감사가 아니라, 감사하기에 기적이 일어나는,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그런 기적이 일어나는 감사의 절기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Soli Deo Gloria. (2017.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