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글은 2017년 10월 미국 시카고 한인교회협의회 주최로 열린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심포지엄 강연의 일부이다. 여기서 현대 미국 개신교의 상황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피고, 최근의 상황을 Post-Truth와 Post-Secular라는 개념과 연결해 이해하고자 한다. 이런 시대적 이해를 바탕으로 기존 개신교 교회에서 이탈한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와 Nones라 불리는 그룹들이 늘고 있는 현상을 최근 미국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종교 현상으로 규정하고 그 의미를 살핀다. 그 현상은 교회의 미래가 아니라 미래의 교회를 새롭게 상상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교회가 스스로를 절대화하지 않고, 끝없이 반성하고 비판하고 개혁할 의지를 갖는데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이 심포지엄이 그런 정신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 강연에서 먼저 이 시대 미국의 모습을 문화적이고 정신사적인 차원에서 간략하게 살피고, 이 모습이 종교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지 파악하고, 이런 흐름이 한인교회의 미래를 전망하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 강연은 몇 개의 개념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이어가고자 한다. 우선 이 시대 미국의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지형을 이해하기 위해 두 용어를 떠올리고 그 의미를 생각하고자 한다. 바로 Post-Secular와 Post-Truth 란 개념이다. 두 개념은 대립적인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동시에 존재한다. 현대 사회에서 이런 시대적 개념들이 종교성향에 미치는 영향을 최근 급속도로 늘고 있는 SBNR (Spiritual But Not Religious)이라 불리는 사람들에 대한 고찰을 통해 파악하고자 한다.
먼저 "트럼프 시대를 사는 미주 한인교회의 미래"라는 심포지엄 주제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고 얼마 후 필자가 느꼈던 충격을 인터넷 매체에 써서 올린 기억을 떠올린다. 그 앞부분을 먼저 공유한다. (아래의 내용은 이후 출간된 필자의 『미국의 묵시록』이라는 제목의 책에 실렸음.)
한국에서 요즘 많이 쓰는 '집단적 지성'이란 말을 접하면서 그런 게 과연 있을까 의심을 품은 적이 많지만 나 역시도 그에 대한 기대를 했었던 것 같다. 그 기대가 '트럼프 대통령'이란 말이 현실이 되면서 깨졌을 때까지는 말이다. 트럼프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예선전을 이기도 있다는 소식이 들릴 때, 나는 그 마저도 인정하기 싫어 뉴스 읽기를 거부했었다. 그가 공화당 후보로 선출되었다는 뉴스는 미국 정신의 몰락과 묵시록의 한 페이지를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의 충격도 그의 당선 소식이 준 충격과는 비길 수 없었다. 세상의 예측은 다 틀렸고, 미국의 경제와 정치의 내막을 가장 잘 알 것 같았던 뉴욕 타임스의 Paul Krugman도 자신이 미국을 잘 모르고 있었노라 고백을 하고 말았다. 지난 한국의 총선과 영국의 Brexit도 그랬다. 왜 빅 데이터와 SNS의 개명된 시대에 그렇게 많은 돈과 기술을 투자하고도 사람들의 생각을 읽지 못하는 것일까? 바로 그 개명된 시대의 하수인이 되고 싶지 않는 사람들의 마지막 자존심이 작동한 것은 아닐까. 어쨌든 트럼프 대통령 시대를 살아내는 일은 이제 우리 모두의 몫이 되었다.
POST-TRUTH 사회
미국의 지난 대선 기간에 시대를 풍자하는 상징적인 용어 하나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Post-truth라는 이 단어는 2016년 말 옥스포드 사전에 의해 올해의 단어로 선정될 만큼 파급효과가 컸다. Post-truth는 사람들이 무엇을 판단하고 믿고 또 결정을 내리는데 객관적 사실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가짜 뉴스가 판치는 정치판에서 진실과는 거리가 먼 주장을 해도 지지자들은 별다른 동요 없이 기존 후보에 대한 지지를 계속하는 모습에서 그 적용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 단어의 의미와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진리나 진실이란 단어가 서구 사회에서 그 의미를 잃어버린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Post-Truth시대의 현상은 이미 오래 전 상실된 진리의 의미가 최근 가짜 뉴스가 난무한 인터넷 시대의 정치판 속에서 대중들에게 각인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근대 이후 서구사상의 역사는 신이라는 진리의 원천에서 벗어나 어떻게 신 밖에서 진리를 재구성할 수 있을지를 묻는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으로 출발한 그 역사는 다윈의 진화론을 통해 신의 존재론에 도전을 가했고, 20세기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의미가 덧없음을 경고했다. 그 사이 진리는 해석의 문제가 되었고 20세기에 도달해 진리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살릴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왔다. 신적인 것들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했던 근대의 '거대담론'들이 20세기 후반 신뢰할 수 없는 공허한 담론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대변하는 것으로도 여겨져 왔다. '가치' 라는 용어도 진리에 대한 서구사회의 공통적인 인식이 사라지면서 이를 대체하는 개념으로 등장했고, 19세기 후반 이후 많은 의미를 함축하는 보편적인 개념이 됐다. 서구 문화에서 보편적으로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진리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오래 전 니체가 진단했었고, 비교적 최근에는 '진리'만이 아니라 '의미'조차도 언제나 임의적이고 일시적이라는 생각이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진리라는 개념을 어떻게 사용해야 그 의미를 어느 정도 살릴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20세기 서구철학의 중요한 주제였다. 공동체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도 있었고, 진리를 소통과 대화를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진리의 다원화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있다고 믿었던 근대 이전의 서구사회에서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진리란 이름으로 강요와 차별과 억압의 역사가 유지되어 왔었고, 진리를 거짓과 대비시켜 서로를 이단시하고 정죄하고 저주해온 역사 또한 서구역사의 주류에 속한다. 따라서 Post-Truth라는 개념은 이런 서구역사에서 진리가 사라지고, 진실도 없고, 사실이라는 것도 객관적이지 않다는 인식의 변화, 그리고 진리는 이용가치에 그 의미가 있다는 미국의 실용적인 논쟁의 역사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개념이 포괄적인 차원에서 이 시대의 정서를 대변하는 용어로 떠오른 것은 당연한 결과로도 보인다.
Post-Truth사회는 신뢰가 와해된 사회이고 냉소적인 사회다. 인간의 진심과 진실보다는 그 저변의 정치적 의도가 무엇인지를 먼저 묻는 사회다. 타인의 진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자신의 진실은 왜곡된 뉴스를 통해서라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은 정치판의 얘기만은 아니다. Post-Truth사회는 그리스도 교회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Post-Truth라는 시대의 조건 속에서 현대의 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있지만, 더 나아가 그 조건을 미국의 보수 교회들이 만들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미국의 많은 교회들은 과학이 제시하는 객관적인 사실이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는 주장을 해왔다. 성서의 문자적인 이해를 고집하면서, 교리에 의거한 진리만을 고집해 온 측면이 있다. 일례로 온난화의 과학적 근거를 믿지 않고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인간이 몰락의 길로 이끌 수 없다는 주장을 펴는 교회들이 아직도 많다.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이 시대의 왜곡된 모습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또 그 모습을 교회 속에서 그대로 반영해 온 것이다. 소통이 없고, 대화가 없고, 성찰이 없는 진리의 선포는 진리를 공허하고 독선적으로 들리게 만들었고, 진리를 추구하는 방식까지 망각하게 만드는 냉소적인 Post-Truth시대가 등장하게 만들었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 객관적 사실을 거부했지만, 그 결과는 진리에 대한 거부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결국 Post-Truth시대는 세속과 종교가 함께 만든 작품이라 해야 한다.
POST-SECULAR 사회
Post-Truth와 더불어 이 시대의 정신을 형용하는 용어로 Post-Secular란 개념을 생각할 수 있다. 이 개념은 Post-Truth란 말이 유행하기 훨씬 이전부터 철학, 신학, 사회학 등에서 많이 논의가 되어 이미 시대적인 시사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세속화'라는 개념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서구에서는 종교개혁 이후 근대의 역사를 주로 교권이나 신학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세속화의 과정을 밟는 역사로 이해하는 경향이 컸고, 민족주의에서 자유주의로 변하는 과정 그리고 이 변화의 경제적 질서를 뒷받침해온 자본주의의 흐름, 즉, 산업자본주의에서 기업 중심의 세계화 자본주의로 흐르는 과정도 세속화의 과정이라고 이해했다. 이런 변화의 모델을 거부하는 이슬람이나 비서구권 사회들은 비정상적이거나 아니면 언젠가는 이런 서구의 모델을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식의 숙명론이 선포되기도 했었다. 사회학에서 Secularization Thesis라고도 불려온 근대 서구의 아전인수적인 세상 이해가 경험과는 동떨어진 것이라는 데이터가 쌓여도 세속화에 대한 미련은 거의 신앙의 차원으로 유지되어 왔다. 신학 내에서도 세속화를 신학의 이론 속에서 수용할 수 있는 것으로 인정하여, 일례로 성육신의 사건을 세속화의 예로 보는 세속의 신학이 한때 유행하기도 했었다. 이처럼 근대화의 역사는 세속화의 역사이고, 근대화를 통해 빈곤 인구가 줄고 여가를 즐기는 계층이 늘어나면서 세속화도 가속될 것이고, 세속화는 종교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는 가정이 통용되었다.
하지만 이런 가정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세계사적인 인식으로 인문학에서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미국의 9/11 사건을 통해서였다. 이 사건을 통해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이해만이 아니라 서구사회 내에서의 종교 세력과 세속세력 사이의 갈등에 대한 재조명, 더 나아가 종교와 신학의 철학적인 함의까지도 재검토해야 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서구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해 하버마스나 데리다와 같은 유럽의 철학자들이 신학의 의미를 다시 읽었고, 인간에게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인문학의 차원에서 성찰하게 만들었다. 그런 와중에 등장한 용어가 Post-Secular란 것이다. 서구의 미래가 바로 세속화라는 공식이 깨졌다고 해서, 그 이후의 상황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합의가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 의미를 세속과 종교의 세력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공존해야 한다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그 의미를 단지 인간이 종교적이기에 종교의 영향력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으로 국한시키는 관점도 있다. 인터넷과 디지털 그리고 세계화 자본주의 시대에 제 3 세계라 불리던 지역에서 기독교가 성장하는 모습은 Post-Secular의 또 다른 의미를 확인시켜 준다. 필립 젠킨스와 같은 학자는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목격할 수 있는 오순절 계열의 기독교가 급속도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기독교의 지형을 뒤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킬 새로운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있다는 예견까지 한다.
세속화에 대한 서구의 믿음은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면서 인간의 종교성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됐지만, 21 세기 미국에서 확인되는 그 종교성은 기존 교회에서 기대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SBNR (SPIRITUAL BUT NOT RELIGIOUS)의 등장
미국에서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사람들이 줄고 있으며, 장로교나 감리교와 같은 주류 교단의 교인들이 줄고,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복음주의 계열의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이미 오래 전부터 공식화되어 있는 이야기다. 주로 1960년대에 시작된 이런 경향은 21세기 들어 더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미국인 중 1/5은 현재 '종교가 없다'(Nones)고 밝히고 있는데, 30살이 안 된 사람들 사이에선 그 비율이 1/3로 증가한다. '종교가 없다'는 인구가 늘면서, 교회 출석률도 당연히 줄어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은 20%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추세 속에서 수천 개의 교회들이 해마다 문을 닫고 있다고 한다. 이런 경향을 시대의 흐름 탓으로 파악하고 당연시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최근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인구조사에서 소속된 종교가 없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을 연구하면서 발견한 새로운 계층의 사람들이 있다. 현재 미국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스스로를 SBNR이라 부르는 그룹이다. 조직화된 종교를 거부하고 제도적이고 교리적인 교회를 불신하지만 자신은 영성을 추구하는 삶을 산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들로 인해 개신교 교회를 중심으로 이어져 왔던 미국 종교의 지평이 바뀌고 있다. 이들의 영향력이 교회 안으로까지 미치면서, 내적인 영성 중심의 신앙을 교회라는 조직에서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개신교회들이 늘고 있다.
SBNR은 왜 급속도록 늘고 있을까? 전통적으로 개신교 사회였던 미국에서 이 부류의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이유는 일단 교회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들은 현대 교회에서 찾을 수 없는 영성을 원하고 있었고, 교리와 제도를 앞세운 교회에서 이들의 영성이 인정받지 못했다는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교회의 교권주의, 성직자 중심주의, 번영과 성장의 신학 때문에 교회를 떠나 홀로 내면의 돌봄과 치유를 추구한 사람들이 많다. 불교나 힌두교와 같은 아시아 종교의 명상과 수행법은 최근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데에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차별도 한몫을 하고 있다.
SBNR의 증가가 가속화되면서, 미국 개신교의 전통적 신앙이 와해되고 새로운 형태의 신앙, 더 나아가 새로운 형태의 교회를 예견하는 학자들도 있다. 단순히 현존하는 교회의 미래가 아니라 미래의 교회를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비판도 있다. 대표적인 예를 시카고 지역에서 목회하던 UCC교단의 목사 Lillian Daniel의 책 When "Spiritual But Not Religious" Is Not Enough에서 찾을 수 있다. 영성을 다분히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을 비판하고, 전통과 공동체에서 주는 위안과 돌봄을 무시할 수 없고, 성숙한 신앙을 이 시대 교회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항변했다.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그에 대한 비판도 매우 높은 것을 보면서 SBNR의 영향력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는 교리에 대한 신뢰만이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신뢰도 상실한 채 자기만의 진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지만, 그 결과가 공허한 자기만족의 나르시시즘일 수 있다는 사실을 책에서 지적하고 있다.
SBNR이 성장하는 이유를 기존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더 넓은 차원의 시대적 현상으로 읽을 여지도 있다. 즉, 종교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미국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읽을 수 있는 보편적 현상으로, 일례로, 미국의 정치 역사에서 한 축을 담당했던 정당에 소속된 당원의 인구대비 비율이 줄고, 자신을 독립 유권자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란 의미다. 미국인들이 자신과 동일한 가치관을 추구하는 공동체에 소속되면서 느껴왔던 독특한 존재의 의미를 더 이상 가치 없는 것으로 판단하게 되는 공동체 의식의 와해현상까지 고려하게 되면 한때 미국사회에서 큰 화제가 됐던 'Bowling Alone'이란 표현을 여기서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최근 스마트폰이 확산되면서, 청소년기 사회화 과정이 부모의 영향에서 벗어나 또래 친구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면서 이뤄진다는 오랜 공식이 깨지고, 혼자 있어도 행복한 청소년 세대가 처음 등장했다는 최근의 연구도 같은 경향을 지적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집단이 아닌 개인의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주된 이유가 교회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에 기인한 것인지에 대한 답은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교회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영성이 교회 내에서의 신앙에 대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반성과 개혁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는 신앙과 영성에 대한 비교리적인 이해를 뜻하고, 종교와 초월, 진리와 가치와 같은 개념들도 새롭게 해석되어야 함을 말한다. 신학과 같은 상징의 언어가 언제나 시대에 맞는 새로운 해석을 요구한다면, 미국 개신교의 지형이 바뀌는 이 시대에 그런 재해석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SBNR의 등장은 Post-Truth시대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SBNR의 현상은 미국의 전통적인 그리스도 교회를 떠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세속의 일부가 되지 않고 교회 밖의 새로운 영성을 추구하고 있고, 이들이 무시하지 못할 미국 종교 지형의 한 계층으로 등장한 현실을 말한다. 이 현상을 Post-Truth 시대의 한 모습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본다. 교회가 교리를 선포함으로써 진리를 주장할 수 있는 시대가 지났고, 진리의 가치를 공동체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도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고 보는 SBNR의 입장은 Post-Truth 시대의 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 내부엔 그 시대를 극복할 근거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진리를 객관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개인적인 것으로 보고 이를 영성의 행위로 확인하려고 한다. 명상이나, 기도나 수행의 행위를 통해 영적인 체험을 추구하고, 진리의 자리에 들어가 보고자 한다. 이렇게 진리를 믿음이 아닌 체험의 대상으로 여기고 영성의 과정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Post-Truth 시대에 가능한 진리의 담론을 모색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현상이 뉴에이지 운동으로 흐르지 않고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영성 운동으로 자리 잡는다면, 현대 교회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시대적인 반성을 불러일으키는 동력의 역할도 할 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