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스스로를 "자비롭고 은혜롭다"(출애굽기34:6)고 소개하셨다. 이것은 우리의 고통과 기도가 모두 그분께 영향을 끼치고 그분은 우리를 가슴에 담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며 우리를 기억하신다.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를 따를 때 다른 사람들의 짐을 져주고 싶어 한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라디아서6:2).
그래서 우리는 성도들 중에서 고통당한 사람들에게 전화하고 이메일도 보내며 찾아다닌다. 우리는 그들을 마음에 담게 되고 그들이 이런 사실을 알기를 원한다.
무언가 말하라. 무언가 하라. 기억하라. 이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무언가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는 말들이 모두 선하고 유익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무슨 말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가끔 우리는 무심결에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반응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 조심해야 할 세 마디의 말을 소개한다.
1) "이만하기 천만다행이다"
믿거나 말거나, 이 말은 무시무시한 다음 말의 전초일 뿐이다: "이만하기 천만다행이다. 생각해봐 두 다리가 다 부러졌으면 어쩔 뻔했어."
우리는 참으로 이상하게 서로를 격려하는 것 같다. 표면적으로 따지면 이 말이 틀리지는 않다. 모든 일이란 현재보다 더 악화될 수 있으니까. 우리가 고통을 당하게 되었고, 현재 그 고통을 겪고 있는데 '이만하기 천만다행'이라고 위로하는 사람이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완전히 생각 없이 내뱉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말하시거나 그런 말을 승인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현재 고통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최악의 경우와 비교하지 않으신다. 이제껏 그러지 않으셨다. 만일 친구들이 고통 중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더라도 그 상황에 끼어들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이렇게 경고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래, 너의 고통이 그 만큼 심각하지 않을 수는 있어... 하지만 하나님은 너의 고통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으셔."
만일 우리가 그렇게 비교하면, 우리는 우리 마음속의 고통을 주님께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스스로 그것을 푸념 정도로 간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따라서 상황이 더 악화될 수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거나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도록 부추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에 대해 말하지 못하도록 막지 않으므로 우리 또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이 일로 무엇을 가르치시려는 거지?" 혹은 "하나님께서 이 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려고 하실 거야"
하나님께서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신다거나, 그분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로마서8:28)이라는 말씀은 진부하지만 성경에 나온다. C. S. 루이스도 고통이 귀먹은 세상을 깨우고자 하는 하나님의 확성기라고 썼다.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말들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않기로 합의하자.
이 성경 말씀 이외에도 여러 말씀들이 상황에 부적절하게 오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 그런 식의 반응은 공감을 우회한다. 누군가가 "가르침을 받고" 있는 중이라면 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겠는가? 그럴 가능성은 낮다.
- 그런 식의 반응은 "언제쯤 풀리겠어?"라고 말하는 듯이 들릴 수도 있다.
- 그런 식의 반응은 고통이 답이 있는 수수께끼인양 암시한다. 하나님께서 무언가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추정해봐야 한다는 태도이다. 우주적인 스무고개 문제풀이에 도전하신 것을 환영한다! 정답을 곧장 알아내는 것이 좋다. 그러지 않으면 고통이 계속될 것이니까.
- 그런 식의 반응은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서 우리가 무언가를 해왔음을 암시한다.
- 그런 식의 반응은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게 맡겨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약화시킨다.
우리는 도와주려고 하다가 고통을 과도하게 해석해버릴 수 있다. 우리는 고통이 마치 임시방편으로 해결될 수 있는 양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실마리를 찾곤 한다. 정답을 갖고 곧장 종착점으로 가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없애주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답을 찾는 과정은 처음부터 어긋나게 되어 결말이 좋지 않게 될 것이다. 고통은 정답이 필요한 지적인 문제가 아니다. 매우 개인적인 문제이다: 내가 그를 믿을 수 있는가? 그가 내 말을 듣는가? 등의 문제이다. 고통은 관계상의 문제이다. 그래서 정직하게 주님께 말씀드리고 그분께서 자신에 대해 완전히 계시하신 경우가 예수 그리스도, 즉, '고통받는 종'을 통한 것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고통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3)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전화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보다 양호하다; 약간은 덜 상투적이니까. 하지만 자주 듣는 이 친절한 말은 우리가 그 당사자를 실제로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모르기 때문에 전화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내가 무언가 좋은 말을 해줬으니까 나중에 보자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고통 받는 사람의 필요나 상황에 대해서 실제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고 그 당사자도 그 사실을 안다.
대신에 "내가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겠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낫다. 혹은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했다가 그 일을 해주는 것이 더 낫다.
현명한 친구라면 애완견의 먹이를 더 사주든지, 설거지를 해주든지, 끼니를 챙겨주든지, 잔디를 깎아주든지, 아이들을 돌봐주든지, 집안 청소를 해주든지, 아이들에게 차를 태워준다든지, 격려의 편지를 써준다든지 등등 그리고 의료비를 도와준다든지 등등을 해줄 것이다.
이러한 사랑과 봉사의 행동은 고통당한 사람의 생활을 좀 더 편하게 만들어 준다. 그러면 식사도 단순한 식사로 그치지 않는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도 그저 그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일로 그치지 않게 된다. 그런 행동들은 사실상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당신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있다," "당신은 잊혀진 게 아니다," "당신은 내 마음에 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 우리가 창조적인 전략에 들이는 시간은 그런 행동 뒤에 놓여 있는 능력을 드러낸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가능케 한 전략적 계획을 따르는 명백한 사랑의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실제 필요를 알기도 전에 계획하시고 행동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다면서 가끔 서투르게 실수를 저지르거나, 혹은 상처를 입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가 고통당할 때 우리를 도왔던 것들에 대해 명백하게 알고 있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자 할 때 그것을 이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듣고 싶어 하는 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항상 말하지는 않는 것이다.
기사출처: https://www.biblestudytools.com/bible-study/explore-the-bible/3-things-not-to-say-when-someone-is-suffering.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