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한국교회는 종교가 권력을 쥐게 되었을 때 벌이게 될 비리들의 시현장인 듯하다. 재정비리, 성추문, 교회세습 등은 교회가 말씀의 능력보다 돈과 조직의 힘을 더 신뢰할 때 저지르는 전형적인 행태들이다. 중세 교회의 타락상이 오늘날 한국 땅에서 재현되고 있는 셈이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에서도 종교는 권력의 양상을 띠었다. 종교권력은 성전에서 장사를 하며 사회적 약자를 희생양으로 만들고 자신들의 지위를 대대로 향수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 잘못을 지적하는 말씀을 결국 죽여서 무덤에 묻었다. 그 무덤에 이중, 삼중으로 봉인을 했다. 봉인 하나하나는 성전을 이익의 도구로 삼은 일을 숨기고, 약자를 유린한 일을 숨기며, 성전을 사유화하려는 탐욕을 숨기려는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한국교회에서도 이와 같이 말씀을 무덤에 가두어버리려는 봉인들이 적발되고 있다.
하지만, 교회가 말씀대로 살지 않고 말씀을 죽이게 되면 오히려 교회가 죽는다. 교회는 말씀에 기반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요지의 비판들이 넘쳐흐른다는 점이다. 교계 언론을 통해서나 뜻 있는 사자들의 강단에서 자주 제기되다보니 일반시민들조차 그 내용을 소상히 파악하고서 일반 언론에서도 보도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교회는 왜 이런 비판을 듣지 않는가? 혹시 비판하고 가르치는 것은 교회의 고유한 권한인데, 교회 바깥에서 들려오는 말들은 그냥 '제풀에 찧고 까부는' 행태로 치부하는 것은 아닌가? 교회가 말씀에 기반한 공동체라면 말씀 자체에 대해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이 교회의 상황과 상관있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자신들의 입장을 합리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앞서면 그런 시도도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종교권력은 재정비리를 선교의 명분으로 덮고, 성추문은 모르쇠로 일관하며, 교회세습은 대기업의 경영권 승계마냥 작전으로 일관하게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예민한 비판에 대해서는 사회법정의 사법권을 동원하여 재갈을 물려버리는 것도 관행이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일반시민들로부터도 외면당하게 된다. 일반시민들이 고개를 젓고 있는데 말씀이 전파될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은 생명을 갖고 있다.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들으면 생명이 살아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말씀은 죽인다고 죽어버리지 않는다. 죽음의 현장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셨듯이 말이다. 무덤을 막고 있던 바위 문이 굴러 떨어질 때 그 무덤을 봉인했던 권력의 명분은 찢어지게 되어 있다. 교회에 대한 비판이 계란으로 바위치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비판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기를 기도하는 과정이다. 하나님은 무덤의 문을 터뜨리고 말씀을 부활시키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말씀의 승리이며 생명의 승리이다. 한국교회가 권력에 취해 말씀을 무시하던 행태를 회개하고 말씀의 능력에 의지하는 때는 오게 되어 있다. 이것은 피상적인 소망이 아니다. 그 생명의 힘은 역사적 증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