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시편 61편, 고린도후서 2:14-17, 마가복음 16:8,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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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갈릴리로 가요>라는 창작뮤지컬이 있습니다. 2016년에 처음 공연됐습니다. 김소엽 시인이 극본을 썼습니다. 무대는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합니다. 사무치게 그리운 주님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한 베드로와 요한이 발코니에 나와 지난날들을 떠올리다 새벽 별빛을 좇아 주님과 동행했던 갈릴리로 추억 여행을 떠납니다. 동이 트는 갈릴리 바다의 아침! 허탈한 마음으로 빈 그물을 씻고 있던 베드로는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어시장에서 상인들의 등골을 빼먹던 세리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열심 당원이던 시몬이 돌아섰습니다. 도대체 갈릴리 바닷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이어지는 무대는 갈릴리 가버나움 어시장터입니다. 이른 아침 고깃배가 들어와 일손이 바빠집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생선가게를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 속으로 예수님이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따라 어부들은 예루살렘의 골고다에 이르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갈릴리는 가난한 곳이었습니다. 남쪽에 위치한 사마리아나 유대 지방과 비교해 빈곤한 곳이었습니다. 가난의 이유는 로마의 수탈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세금 징수를 통해 주민들을 약탈했습니다. 이에 저항하면 공개처형인 십자가형으로 탄압했습니다. 이 갈릴리가 예수님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입니다. 그리고 그가 공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입니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기적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일어났습니다. 생긴 것이 수금(竪琴)을 닮아 구약성서에서 '긴네렛'(민수기 34:11, 여호수아 13:27)이라고 불린 이 바다는 신약성서에서 '게네사렛'(누가 5:2) 혹은 '디베랴'(요한 6:1)라고 불렸는데, 이 바닷가에 있는 항구인 가버나움, 게네사렛, 막달라, 디베랴, 거라사 등이 바로 예수님의 주요 사역지였습니다.

아버지 헤롯 대왕이 죽자 그의 세 아들이 분봉(分封) 왕이 되어 팔레스타인을 각각 나누어 통치했습니다. 그 중 갈릴리 지방을 통치하던 분봉 왕은 헤롯 안티파스였습니다. 그는 야심가였습니다. 조그만 땅을 나눠받은 분봉 왕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버지처럼 로마 황제를 위한 신도시를 만들어 황제의 환심을 사려고 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 바닷가 근처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그 도시 이름을 당시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티베리아스,' 혹은 디베랴로 명명하고 로마 황제에게 헌정합니다. 그리고 '황제의 도시'에 걸맞게 웅장하고 세련된 로마식 신전과 극장 그리고 행정관청을 세웁니다. 여기에 로마인들과 결탁한 유대인의 귀족들이 이주해 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주후 20년쯤의 일입니다.

'황제의 도시' 티베리아스는 갈릴리에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합니다. 사실 갈릴리 지역은 역사적으로 유대 지도자들의 관심 밖의 땅이었기에, 수백 년 동안 모세법의 전통 위에 자율적인 촌락 공동체를 유지하며 살았습니다. 안식일 법과 안식년 법 그리고 희년법과 과부와 고아에 대한 보호법 등은 농업과 어업을 기반으로 한 작은 마을 공동체들이 나눔과 협동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급속한 로마화는 도시화를 낳았고 도시화는 상업화를 낳았습니다. 티베리아스가 건설되면서 갈릴리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바로 이러한 갈릴리 지역에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라는 복음을 선포하며 시작됐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걸어가실 때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태 4:19). 거기서 조금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시자 그들도 곧 배와 자기 아버지를 놓아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마태 4:21-22).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이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놓아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은 갈릴리의 급속한 해체 속에서 무언가 거룩하고 참된 새 삶에 대한 깊은 갈망이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들 중 아무도 감히 골고다 언덕을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끔찍한 처형 이후 그들은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죄를 찾을 수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일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 그들은 깊은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가 골고다 언덕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삶의 한 가운데에 이미 있던 것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 때 그들에게 부활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들을 갈릴리로 부르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놓고 온 그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들은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갈릴리로 가셔서 제자들을 그리로 부르신다는 이 소식은 마가가 가장 먼저 전한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맨 마지막 장에서 빈 무덤에 있던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발라드리기 위해 올라온 여인들을 향해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마가 16:7)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마가 16:8)고 마가복음은 끝납니다. 공동번역은 이 구절을 "여자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 무덤 밖으로 나와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너무도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였다"고 번역합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과 그가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거기서 그를 뵐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라 했는데, 여인들이 아무에게도 아무 것도 전하지 못하고 말았다는 것이 마가복음의 끝입니다. '해피앤딩'으로 끝나는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마가복음의 끝은 황망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후대에 16장 9절 이하로 밝게 끝나는 새 결말을 창작해 넣었어야 할 정도로 참담하기만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왜 마가는 하필 이런 식으로 그의 복음서를 끝맺고 있다는 말입니까?

독일의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는 히틀러 암살음모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연합군이 감옥을 해방하기 두 주 전 안타깝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39살의 젊은 나이에 순교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값싼 은혜'(cheap grace)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고귀한 것인데, 교회가 '회개 없는 용서'를 남발하면서 그것을 '싸구려 은혜'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개탄했습니다. 본회퍼 목사는 한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가 '비종교적 기독교'(religionless Christianity)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기독교도 엄연히 하나의 종교인데 이게 무슨 말일까요?

본회퍼 목사에게 '종교'란 세상을 성(聖)과 속(俗)으로 분리시키는 힘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종교적이 되면 될수록, 종교에 깊이 귀의할수록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성의 영역에 바치게 됩니다. 하지만 본회퍼 목사는 성과 속에 대한 이런 이원론적 분리가 커다란 문제임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독일의 그리스도인들이 성의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동안 속의 세계는 히틀러가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본 본회퍼 목사는 이 세계 안에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영역이나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시간이 있다는 이원론적 생각 자체를 거부했습니다. 대신 우리는 그리스도를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 그리고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로 섬겨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에서, 과학자들의 실험실에서, 즉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으로 섬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교회만의 주인이 아니라 이 세계 전체의 주권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본회퍼 목사는 오늘의 세계를 '성인이 된 세계'(come of age)라고 불렀습니다. 아이들이 자라 성인이 되면 - 슬하(膝下)의 자식이 커서 성인이 되면 - 부모 곁을 떠나듯이, 유럽의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그리고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이른바 '성인이 된 세계'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며 살거나, 아니면 급박한 위기에 처했을 때에만 신을 불러냅니다. 과학자들도 모든 것을 과학의 원리로 설명하다가 아직 설명이 안 되는 틈새(gap)에서만 잠시 신을 거론합니다. (본회퍼는 이런 신을 "god of the gaps," 즉 '틈새의 신'이라 불렀습니다.) 이렇게 '성인이 된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그리스도를 종교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온 삶의 주인으로 섬길 수 있을까요? 그의 유명한 저서 『옥중서신』(Widerstand und Ergebung)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제목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는 여기서 나왔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의 서신의 다른 문장을 인용해봅니다.

"여기에 다른 종교들과 [그리스도교]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의 종교성은 곤궁에 처한 인간이 신의 권세에 호소하도록 가르칩니다. [이런] 신은 기계장치의 신(deus ex machina)입니다. [하지만] 성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약함과 고난을 가르칩니다. 오직 고난 받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습니다."

본회퍼 목사는 지금 '종교적 인간'과 '그리스도인'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종교적 인간은 인간의 지성이 막다른 골목에 부딪힐 때나, 인간의 능력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에 신을 찾습니다. 실패와 곤경에 처했을 때에 신을 부릅니다. 본회퍼는 이런 신을 '기계장치의 신'이라 불렀습니다. '기계장치의 신'이란 본래 그리스 연극에서 무대에 장치된 기계인데, 연극 도중 갑자기 튀어나와 스토리에 감추어져 있던 수수께끼를 단번에 풀어주는 장치였습니다. 이 장치는 감독이 정해놓은 순간에만 잠시 튀어나와 제 몫을 하고는 사라집니다. 이런 신은 '신'이라 불리지만 진정한 '신'은 아닙니다.

본회퍼 목사는 이렇게 인간의 '종교성'(religiosity)에 의해 만들어진 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에 대해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해결사가 아니라 고난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성서의 하나님, 즉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세상 안에서 무력하고 약한 신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입니다. 본회퍼 목사는 이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이 세상으로부터 십자가로 추방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안에서 무력하고 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는 도우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그의 권능이 아니라 약함과 고난의 능력으로 도우십니다." 본회퍼 목사가 말하는 이 하나님은 분명 전능한 한방 해결사 신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매우 당황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하나님 없이"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기계장치의 신'을 찾아나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고난의 한 가운데에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고통에 참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많은 기독교인들은 '코람 데오'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라틴어 코람(Coram)은 '면전에서 혹은 앞에서'라는 뜻이고, 데오(Deo)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Before God)라는 뜻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의 말씀에서 시편 기자도 "영원한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기를 바라며 주께서 인자와 진리로 보호해 달라고 간구합니다(시편 61:7). 사도 바울도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고린도후서 2:15)라고 말합니다. 둘 다 모두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그것은 정직하고 성실하고 거룩한 삶입니다. 우리말에도 "하늘이 부끄럽지도 않느냐" 혹은 "하늘이 지켜보는데 두렵지도 않느냐"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늘 하늘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 즉 '코람 데오'의 삶입니다.

그런데 본회퍼 목사는 단지 '코람 데오,' 즉 "하나님 앞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Without God, Before God)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순되는 말 같지만 심오한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산다고 말하지만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예수께서도 일찍이 가장 종교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 하나님이 없는 것을 개탄하셨습니다. 오히려 종교적인 사람으로부터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이 훨씬 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을 우리에게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신다고 자부하던 바리새인들 속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반면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던 죄인의 대명사인 세리들은 하나님 앞에 서 있었습니다. 저 유명한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서로 다른 기도 모습에서 그것은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만일 천국에 단 두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면 한 사람은 서기관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바리새인일 것이다." 이와 달리 당시 세리들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가는 그 때 유대인들이 드렸던 기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 남자들은 날마다 이 세 가지의 감사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첫째는 자신이 혈통으로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 둘째는 자신이 성별로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태어난 것, 그리고 셋째로 자신이 직업으로는 세리가 아닌 것을 그들은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경건하다는 바리새인의 기도는 듣지 않으시고 소위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종교적 경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값비싼 제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는 미가 선지자가 이미 분명히 말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형식과 전통이 아닙니다. 공의와 자비입니다. 위선과 자선이 아닙니다. 정의와 긍휼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하나님 없이" 산 사람들입니다. 종교적 경건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야고보도 신앙인들의 가장 큰 덕목으로 다름 아닌 경건을 꼽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경건이 무엇인지를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야고보서 1:27). 그렇습니다. 가장 심오한 경건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잃어버리면 종교는 형식이 됩니다. 위선이 됩니다. 독선이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본회퍼 목사의 이 심오한 말의 핵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세상의 "변두리가 아니라 중심에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인이 된 세계'에서 성의 영역은 변방으로 밀려났습니다. 이제 사람들에게 종교는 삶의 여러 요소 가운데 한 가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본회퍼 목사는 오늘날 이렇게 변두리로 밀려난 성의 영역에서가 아니라 온 세계의 한 가운데에서, 중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일 아침 11시부터 12시까지만, 그리고 교회당 안에서만이 아니라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그리고 이 세상의 삶의 현장 그 한 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타자를 위한 존재'이듯, 그리스도의 교회도 '타자를 위한 교회'가 되어 세상 안에서, 세상의 중심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예전에 성지순례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은 곳은 역시 갈릴리 바닷가였습니다. 주님이 직접 걸으시며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신 곳을 직접 보고 만지니 그분과 가장 가까이 있는 듯한 진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순례의 여정 중에 갈릴리 바다를 찾아갔는데, 놀랐던 것은 차를 타고 한참 동안이나 내리막길을 달려서야 비로소 이 바다가 나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크기는 가로, 즉 동서로 약 10킬로미터, 세로, 즉 남북으로 약 20킬로미터, 둘레는 약 50킬로미터입니다. 북쪽에 위치한 헤르몬 산 정상에 쌓인 만년설이 녹아 흘러들어와 바다 안에는 풍성한 생명이 넘쳐납니다. 이 물은 남쪽의 요단강을 통해 사해로 빠져나갑니다. 거기서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 바다가 지중해 해수면보다 무려 200미터나 아래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이 지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바다입니다. 가장 낮기 때문에 물이 모여듭니다. "계곡은 낮아서 물을 모으고, 바다는 더 낮아서 큰물을 담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나를 내세우고 주장하고 닫혀 있다면 내 안에 누구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도 그의 안으로 흘러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왜 갈릴리 바닷가가 예수님의 선교 현장이었는지 곧바로 이해가 됐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지상의 삶 가장 낮고 천한 곳에서 우리의 슬픔과 아픔과 고통을 대신 껴안으셨습니다. 이렇게 '낮아지려는 마음'을 불가의 용어로는 '하심'(下心)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는 마음'이 바로 하심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하나님의 그 낮아짐의 마음이 서려 있는 곳입니다. 그 낮아짐으로 세상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새겨져 있는 곳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바로 그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사도신경이 말하는 대로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우편에 앉아계시"기 전에 부활의 새벽에 그리로 서둘러 가셨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가셨습니다. 그리로 오라는 전갈 하나 남기고 총총히 새벽길을 떠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여러분의 삶의 현장, 고통의 십자가가 서 있는 이 세계의 중심은 어디입니까? 갈릴리로 가십시오. 갈릴리로 어서 가십시오. 혹 여러분도 부활절 새벽의 그 여인들처럼 "너무도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을 못하"고 벌벌 떨고 계십니까? 왜 이렇게 황망한 결말로 마가복음은 끝나는 것일까요? 도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마가복음의 기자는 우리를 이 복음서의 맨 처음부터 다시 읽지 않으면 안 되도록 인도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맨 첫 장을 펴는 순간 온 몸에 전율이 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The beginning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the Son of God, 마가 1:1). 지금 마가는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창세기 1:1).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새 창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새로운 삶과 역사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두려움에 떠는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새로운 삶으로 창조하는 하나님의 초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교우 여러분, 주의 천사가 우리에게 이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갈릴리로 가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현장, 주님의 십자가가 우뚝 서 있는 이 세계의 중심으로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주께서 세상 끝까지 여러분과 동행하실 것입니다. 아멘. (2018.4.8.)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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