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상처 입은 치유자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이사야 53:4-5, 고린도후서 1:3-6, 누가복음 10:29-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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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우리는 살면서 상처를 입습니다. 살아가는 시간과 비례해 상처는 누적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살다보면 '상대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내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내편'한테서 받는 상처가 훨씬 더 아픕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제목의 책도 있지만, 사실 아프면 '환자'지 '청춘'은 아닙니다. 아프기 때문에 우리는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꼭꼭 숨겨둡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요즘 호응을 얻고 있는 책입니다. 사회역학자인 고려대학교 김승섭 교수가 지은 책입니다. '사회역학'(Social Epidemiology)이란, 질병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원인을 밝히는 학문인데, 혐오나 차별 그리고 고용불안과 같은 사회적 상처가 어떻게 우리 몸을 아프게 하는지를 추적하고 분석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실험입니다. 취업 과정에서 차별을 받은 경험이 있는지를 측정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새로운 일자리를 경험할 때 차별을 겪은 적이 있습니까?" 대답은 '예, 아니오, 혹은 해당사항 없음' 3개 항목 중에 선택해야 합니다. 여기서 '해당사항 없음'이라는 항목은 구직 경험이 없는 응답자를 위해 만들어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취업해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직장에서 차별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예' 또는 '아니오'라고 응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직장인 상당수가 '해당사항 없음'이라고 응답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김교수는 '해당사항 없음'이라고 답한 사람들의 건강상태를 조사해보았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남성의 경우, '해당사항 없음'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취업 과정에서 차별이 없었다고 '아니오'라고 응답한 사람들과 건강에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성의 경우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해당사항 없음'이라고 답한 여성의 경우 차별을 받은 적이 있다고 '예'라고 응답한 다른 여성들보다 건강상태가 더 나쁘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번에는 다문화가정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이 질문했습니다. "학교폭력을 경험한 뒤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이 조사에서 김교수가 주목한 것은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갔다"고 응답한 학생들이었습니다. 이 학생들의 건강 상태를 조사해보았더니 이 경우에도 남녀 간에 극명한 차이가 드러났습니다. 이번에는 남학생들에게서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학교폭력을 경험하고도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갔다"라고 응답한 남학생들의 건강이 가장 나쁜 상태로 나온 것입니다. 본인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인 것처럼 넘겨버렸지만 그 경험은 실제로 그들의 몸을 병들고 아프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 연구들은 우리가 차별이나 폭력을 겪고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못할 때, 아니 애써 괜찮다고 생각할 때 실은 우리 몸이 더 아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취업 과정의 차별에 대해 '해당사항 없음'이라고 응답한 여성 노동자들이나, 학교 폭력에 대해 '그냥 넘어갔다'고 응답한 남학생들은 모두 자신이 경험한 것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거나 솔직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들이 더 아팠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몸은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은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때로는 인지하지 못하는 그 상처까지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책의 저자인 김교수는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진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회적 원인을 가진 질병은 사회적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최첨단 의료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사회의 변화 없이, 즉 인간관계의 변화 없이 개인은 절대로 건강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서양화가는 아마 반 고흐일 것입니다. 자신의 귀를 잘라 타인에게 선물했다는 '광기의 화가,' 특유의 선명한 색채와 격렬한 필치로 불꽃같은 정열을 화폭에 쏟아 부었던 '태양의 화가,' 살아생전 단 한 점의 그림 밖에 팔지 못하고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다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비운의 화가,' 그러나 사후엔 서양미술사상 가장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은 '불멸의 화가.' 네덜란드의 인상파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우리에게 이렇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고흐에 대한 영화는 계속 나오는데, 작년에는 최초로 유화 애니메이션인 <러빙 빈센트>가 개봉되기도 했습니다. 오디션을 통해 뽑힌 세계 107명의 화가들이 2년 동안 직접 손으로 그린 6만 2450점의 유화로 제작되었다 하여 이 영화는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스토리는 '자살'로 알려진 고흐의 죽음의 진실을 찾아가는 흥미로운 과정을 뼈대로 합니다. 영화 속에서 고흐의 우편물 배달부였던 조센 룰랭은 고흐의 죽음에 사회가 책임이 있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고흐가 자살한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반 고흐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었을 가능성을 더 먼저 제기한 영화는 2013년에 제작된 <반 고흐: 위대한 유산>입니다. 개봉 당시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잠시 이 영화의 트레일러를 보시겠습니다.

그런데 '미친 사람' 취급을 받던 반 고흐가 사실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그리고 또한 우리 시대의 부조리에 맞선, 예민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가장 먼저 제기한 사람은 미국의 팝 대중가수 돈 맥린(Don McLean)입니다. 그가 1972년에 발표한 곡 "Vincent," 혹은 "Starry, Starry Night"은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는 곡인데, 정작 가사의 내용은 잘 모르는 것 같아 요지를 소개해봅니다.

"별이 빛나는 밤에 / 당신의 팔레트를 푸른색과 회색으로 칠해 봐요... 언덕 위의 그림자들 / 나무들과 수선화를 그려보세요... 황금빛 곡식의 아침 들판으로 색이 바뀌고 / 고통으로 얼룩진 지친 얼굴은 / 화가의 사랑의 손길 아래 부드럽게 되지요 / 그들은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지만 / 당신의 사랑은 아직도 진실했습니다... 당신이 만났던 그 낯선 사람들처럼 / 누더기 옷을 걸치고 지쳐있는 사람들... 이젠 알아요 / 당신이 나에게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 당신의 영혼이 얼마나 아팠는지 / 그들을 자유하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를요 / 그들은 듣지 못했고 여전히 못 듣고 있습니다 / 아마... 들으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고흐는 네덜란드 개혁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아버지를 따라 한 때 목사가 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을 접고 화가가 되었습니다. 1885년에 그린 이 그림에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생전에 아버지와 불화했던 자신을 뉘우치는 화가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중앙에 커다란 성경책이 놓여 있습니다. 아버지 테오도루스 반 고흐(Theodorus van Gogh)가 읽던 성경책으로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그 옆에 있는 꺼진 촛불은 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음을 의미합니다. 두툼하고 정돈된 이미지의 이 성경책과는 달리 그 앞에 던져진 것처럼 놓인, 밝은 빛의 작고 얇은 책은 당대의 지성을 대표하는 프랑스 자연주의 소설가 에밀 졸라(émile François Zola, 1840~1902)의 소설 『생의 기쁨』(La joie de vivre)입니다. 이 책은 이 작가의 사상을 좇아온 반 고흐 자신을 가리킵니다. 성경책 오른쪽 상단을 보면 펼쳐진 곳이 구약성서 이사야 53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구절, 즉 '고난의 종'에 대한 이야기로 알려진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학비도 제대로 대주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경건하고 청빈한 삶으로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아들은 '고난의 종'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았던 자신의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돌아가신 이후에 이 아버지와 화해를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고흐의 그림이 기독교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고흐가 성경 이야기 그림을 단 세 점 밖에 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사의 꿈을 접고 화가가 된 후에는 고흐가 기독교를 버렸다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성화를 그려야만 기독교인 화가는 아닙니다. 반드시 명시적인 종교화를 그려야만 기독교 미술가는 아닙니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예술의지(Kunstwollen)는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의 세계'를 그리려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일상의 소중함과 거룩함'에 눈을 돌렸습니다. 칼뱅주의의 영향으로 이제 개신교 미술의 초점은 '예배에서 일상의 기쁨'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실제로 고흐는, 라영환 교수가 『반 고흐, 삶을 그리다』에서 강조하듯이, 개신교 화가 밀레의 그림을 특히 좋아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밀레는 주로 농민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허리를 굽혀 이삭을 줍는 여인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석양 속에 기도하는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고흐는 바로 이러한 밀레를 끊임없이 모방하고 재해석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보시는 바와 같이 고흐의 수많은 작품들 속에는 모두 노동의 신성함이라는 주제가 가득 차 있습니다. 노동을 신성한 것으로, 그리고 직업을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 보았던 칼뱅주의의 가치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어느 오두막집의 저녁식사 풍경입니다. 식탁 위 따끈따끈 감자 한 접시가 놓여 있습니다. 하루 종일 고된 노동을 마치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습니다. 이 초라한 식탁을 호롱불 하나가 마치 성스러운 후광처럼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 불은 감자 먹는 노동자들의 손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화가가 이 그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램프 등 밑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이 사람들이 접시를 드는 것과 같은 손으로 대지를 팠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이 그림은 손과 그 노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정직하게 스스로의 양식을 구했는지의 이야기입니다." 고흐는 막연히 노동하는 사람들을 동정하거나 연민하지 않았습니다. 당대 초기 인상주의 화가들이 주로 도시나, 부르주아지들의 사치나 쾌락을 그린 것과 대조적으로 고흐는 노동하는 사람들의 근면하고 성실한 삶, 단순하고 소박한 삶, 그리고 자신의 노동으로 거둔 소출이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신의 은총임을 알고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했던 그런 신앙의 삶을 그린 것입니다.

고흐는 실제 목사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학수업을 받고 한 탄광촌에 들어가 설교자로 사역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달랐습니다. 단지 앵무새처럼 교리만 외치는 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고통당하는 광부들에게 고흐는 자기 옷과 음식과 돈을 다 내주고 광부 생활을 자처했습니다. 그는 농부를 그릴 때에도 농부처럼 살았습니다. 매순간 자신의 전부를 걸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고흐를 부담스러워 했습니다. 교회는 이런 고흐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는 실제로 미쳐가고 있었습니다. 미치도록 사랑했고, 사랑 때문에 그는 더욱 미쳤습니다. 그의 비극은 아마도 하나님과 이웃을 너무 고지식하고 진지하게 사랑했다는 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처투성이 고흐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스무 군데 이상 거처를 옮기며 살았습니다. 평생 걸어 흙먼지가 뒤덮인 그의 구두입니다. 나중에 철학자 하이데거가 이 구두를 가지고 글을 쓰고 논쟁이 벌어지면서 이 구두는 '세계에서 가장 철학적인 구두'가 되었지만, 정작 화가는 이 구두 그림이 "땅에 대한 애착과 그 땅에 뿌리를 박고 질박하게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찬사"라고 말했습니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수많은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성경 이야기를 직접 그리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대신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려 애썼습니다. 그래서, 안재경이 그의 책 『고흐의 하나님』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의 캔버스에는 하나님의 형상은 등장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흔적은 있습니다. 그는 "종교는 사라지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시다"는 빅토르 위고의 말을 좋아했습니다. 고흐에게 하나님은 아름다움의 원천이었습니다. 고흐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일상 속에 계시는 분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특히 가난한 자들과 함께 상처 받는 존재였습니다. 고흐도 이 하나님처럼 가난한 자들과 함께 상처 받는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고흐를 같은 네덜란드 출신의 영성가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불렀습니다. "Wounded Healer" - 참 인상적인 말입니다. 나우웬은 현대인의 상처에 누구보다 공감했고, 그 상처를 통해 이웃과 하나님에게 다가가고자 했습니다. 상처는 우리가 살면서 불가피하게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타자에 대해 눈을 뜨게 하고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주는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우웬은 그 좋은 예일대학 교수직을 버리고 남미 페루의 한 빈민가에 있는 중증장애인 공동체(L'Arche Daybreak)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비록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이었지만 서로를 돌보는 이 친밀한 공동체 안에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치유된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 속에서 나우웬은 '스스로 가련해지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강보에 싸인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처럼 고통을 당하시고 인생의 아픔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는 제자들의 배신과 부인이라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처참한 고통 속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을 때 그 무엇으로도 형언할 수 없는 깊은 단절과 고독을 경험하셨습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가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고 나우웬은 말합니다. 그 분은 상처를 알기에 우리를 정말로 치유할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모두 당신 앞에 상처를 내려놓으라는 부름에 귀 기울여야 하며,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치유를 경험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나우웬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상처 입은 치유자'인 것처럼 우리들도 '상처 입은 치유자'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파하는 사람들과 같이 아파하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내 상처도 있습니다. 내 아픔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우웬은 "우리 자신이 입은 상처로 인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원천이 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자신의 아픔 속에만 매몰되지 않고 내 아픔을 통해 이웃에게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을 찾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고흐의 그림 <사마리아인>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항상 놓치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마리아인이 '상처 받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엄밀히 말해 그는 강도 만난 유대인을 도와주지 않아도 됐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들은 오랫동안 유대인들로부터 극심한 모멸과 차별 그리고 폭력을 경험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주전 722년에 앗시리아라는 제국이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킬 때, 이들은 이후 이스라엘이 다시는 반란을 꿈꾸지 못하게 만들려고 자기의 남자들과 사마리아 지역의 여인들을 강제로 결혼시키는 혼혈정책을 실시합니다. 이후 남유다의 백성인 유대인들은 같은 야곱의 후손인 사마리아인들을 지독히 멸시하고 차별하고 학대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사마리안 여인의 이야기에서 왜 그 여인이 처음에 물을 달라는 낯선 유대 남자 예수님에게 그렇게 적대적으로 대했는지 우리는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유대인을 도왔습니다. 그들로부터 상처를 받았지만, 아픔을 겪어보았기에 강도 만난 죽어가는 그 사람이 겪는 아픔이 남의 일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습니다. 이 선한 사마리아인이야말로 '상처 입은 치유자'였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인생을 살다보면 상처를 받습니다. 아프기 때문에 우리는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또 상처 받았을 때 이를 애써 부인하거나 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우리 몸이 상합니다. 이제 우리는 상처를 미화할 필요는 없지만, 이미 받은 상처에서 도망치지 말고 그것에 대해 용기를 내서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아픔의 이야기를 말하고 들어주고 지지하고 격려하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교회가 그런 공동체입니까? 그런 치유와 희망의 공동체입니까? 아니면 그 반대입니까? 상처를 '준' 사람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성찰하지 않습니다.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상처를 '받은' 사람은 그 경험을 자꾸 되새김질합니다. 내가 왜 상처를 받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합니다. 아프기 때문입니다.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희망은 언제나 '상처 받은 사람들' 쪽에 있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 그 상처를 딛고 치유자가 될 때에만 세상은 비로소 바로 서는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김승섭 교수의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 말미에는 미국의 한 초등학교에서 행한 인종차별 실험이 소개됩니다. 아이들에게 눈 색깔로 우월하고 열등한 사람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갈색 눈이 우월하고 파란 눈이 열등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은 눈 색깔에 따라 주눅이 들기도 하고 차별을 하기도 했습니다. 얼마 후 이번에는 그 반대로 가르쳤습니다. 상황은 금세 역전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사실은 피해자의 경험을 해본 아이들은 '우월한' 집단이 되어서도 '열등한' 집단에게 너그럽더라는 것입니다. 차별을 받는 소수자가 되어본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에 더욱 조심할 줄 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영화 <러빙 빈센트> 속에서 반 고흐는 이렇게 독백합니다. "난 내 예술로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싶어요. 그들이 이렇게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깊은 사람이군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군요." 교우 여러분, '상처 입은 치유자' 고흐처럼 이렇게 '마음이 깊은 사람,' '마음이 따뜻한 사람'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 그 상처를 딛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치유자가 되기로 용기를 낼 때 우리 가정과 사회에는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바로 그 평화를 이루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로 오셨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대로 우리의 하나님은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시편 147:3, 이사야 30:26)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상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게 하여 고쳐 주"시는 분입니다(예레미야 30:17). 그리고 오늘 읽은 신약서신서가 증언하듯이,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고린도후서 1:3-4). 바로 이 위로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환난 중에 있는 모든 자들을 능히 위로하는 자들로 부르십니다. 그 부름에 응답하여 이 땅에 희망을 주는 '상처 입은 치유자'들로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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