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편 116:1-6 -
오늘 예배는 무용예배로 드립니다. 이런 무용예배는 이화대학교회 교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고 은혜입니다. '기도'를 주제로 하는 오늘 무용은 몸과 춤과 빛으로 선포하는 하나의 설교입니다. 이에 앞서 잠시 같은 주제로, 말로 선포하는 설교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분이셨습니다. 기도는 그분의 삶의 중심이었고 일상이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규칙적으로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소통하는 '영의 사람'(Spirit Person)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는 첫 번째 성서의 증언은 그가 세례를 받으실 때입니다. 누가복음 3장(21-22절)입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도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12-13절)에는 제자들을 부르고 또 그 중에서 열둘을 사도로 택하는 중차대한 일을 하시기 전에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성서에 나오는 최초의 철야기도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실 때에도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의 일입니다. 모든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떡을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마태 14:19, 마가 6:40, 누가 9:16, 요한 6:11), 즉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후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게 아니라 그 전에 먼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작은 양식 앞에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 기도가 기적을 낳았습니다. 그 기도는 믿음의 기도였습니다. 확신의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굶주린 자신의 백성을 결코 내버려두시지 않으시는, 선하고 자비로운 분이라는 것에 대한 철저한 신뢰의 기도였습니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푼 이후에도 기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44-46절)과 마태복음 14장(22-23)에 의하면 예수님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는 큰 무리를 작별해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고 날이] 저물매 거기 혼자 계셨"습니다. 무리를 보내는 동안 제자들도 재촉해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시고 홀로 남아 기도하셨습니다. 그 엄청난 일을 하신 후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단 둘이만 있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새벽기도도 하셨습니다. 특히 갈릴리의 온 동네를 다니시며 전도여행을 하실 때 그러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28-39절)에 의하면, 예수님이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들을 고치시고 또 많은 귀신들을 내쫓으시니 이 소문이 순식간에 갈릴리 사방에 퍼졌습니다. 그러자 날이 저물어 해가 질 때면 예수님이 머무시던 집 앞에는 온 동네의 병자들이 찾아왔고 예수님은 이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다 하신 예수님은 성서를 보니 "새벽이 아직도 밝기 전에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최초의 새벽기도 기록입니다.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나면 피곤하실 만도 한데, 주님은 그 새벽에 기도하러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분에게 기도는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단둘이 소통하는 가장 소중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뒤를 따라가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라고 간청해야 비로소 다른 마을로 길을 나서곤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틈만 나면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셨다는 구절은 누가복음 5장(15-16절)에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널리 퍼지자 수많은 무리가 주님의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몰려 왔지만 주님은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는 말처럼, 우리 보통 사람들은 나를 찾는 사람들이 많을 때 그것에 신이 나 거기에 전력을 다하는 법인데, 예수님은 그럴 때에도 오히려 물러나 한가하고 고요한 곳에서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병자들을 고치실 때에는 언제나 먼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마가복음 7장(32-35절)에는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길 간구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무리를 떠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한적한 곳으로 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에바다," 즉 '열리라'고 하시니 그가 나음을 받았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다' - 그것이 주님의 기도였습니다. 청각 장애로 말을 더듬는 그 병자를 긍휼히 여기신 주님은 그 병자가 겪었을 고통에 대한 연민으로 아마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을 겁니다.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도 비통한 마음으로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38-44)에는 예수님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기사가 나오는데, 나사로의 누이들이 동생의 죽음 앞에 슬피 우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속으로 비통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이제 무덤 돌을 옮겨 놓으니 주님은 먼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이렇게 기도하신 후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그가 소생하여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확신과 감사가 주님의 기도 안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자신의 고난을 예고하시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요한복음 12장(23-30절)을 보면, 마침내 고난을 받을 때가 왔음을 인지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신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들도 주님처럼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어서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마음의 고통을 솔직히 표현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지만 다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피하지 않겠다는 기도였습니다.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와 같은 기도입니다.
누가복음 22장(39-44절)에는 우리에게 더 많이 알려진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가 실려 있습니다. 이 기도는 무릎은 꿇고 드린 간절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얼마나 평소에 규칙적으로 기도하러 산에 가셨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구절입니다. 참으로 기도는 주님의 일상이었습니다. 감람산에 이르러 주님은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기도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전적인 신뢰와 전적인 의존의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가 얼마나 절박하고 간절한 기도였는지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그렇게 간곡한 기도였습니다.
주님은 부활의 영광을 예고하는 변화산에서의 사건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장(28-29절)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는데,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고 했습니다. 그의 영광스런 변화 역시 기도 가운데 이루어진 은총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주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할 것을 예고하실 때에도 그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1-32절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밀을 '까부르다'는 말은 밀을 키질하여 알곡과 껍질을 분리하는 작업을 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껍질이 섞인 밀에서 순수한 밀을 골라내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과 정성이 필요합니다. 사탄이 바로 그렇게 집요하게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게 하려고 시도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돌이킨 후에는, 마치 비가 온 뒤에 땅이 굳듯이, 자신의 형제들, 곧 예수님의 제자들을 더욱 굳게 결속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제자들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기도였습니다.
이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주님은 마지막 유언을 남기시면서 우리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은 한 장 전체가 예수님의 '고별기도'로 알려진 유명한 장입니다.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 마지막으로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드린 간절한 기도인데, 그 내용의 핵심은 '일치'입니다. 하나됨입니다. 17장 21절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오늘날 세계교회 일치운동, 즉 에큐메니컬 운동의 모토가 된 바로 그 구절입니다. 주님은 평소 서로 늘 다투고 싸우는 제자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다투고 분열하는 존재인가 봅니다. 주님의 고별기도는 하나님과 당신이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도, 그리고 우리들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간구였습니다. 고별기도, 즉 유언기도란 이 땅에 남기고 싶은 가장 중요한 한마디의 기도인데, 주님은 끝까지 우리 모두의 일치를 위해, 남과 북 그리고 동과 서로 나뉜 이 세계의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 자신의 손과 발을 묶어놓고 못을 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드릴 수 없는 기도입니다. 누가 23:34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용서의 기도입니다. 무지와 편견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자에 대한 연민과 자비의 기도입니다. 신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 달려서도 기도하셨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태 27:46, 마가 15:34)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규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입니다. 단 한 순간도 떨어진 적이 없이 늘 친밀하게 소통하고 의지하던 그 하나님마저 자신을 버리신 것에 대한 예수님의 처절한 아픔과 고통과 고독이 묻어나오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한 번 더 기도하셨습니다. 이 땅에서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 23:46). 이 기도를 마치시고 숨지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생애는 이렇게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났습니다. 주님은 기도하는 분이었습니다. 항상, 쉬지 않고, 규칙적으로, 홀로,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슬플 때나 비통할 때,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기적과 치유를 베푸시기 전에 그리고 후에, 시련을 앞두고, 또한 시련의 한복판에서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이렇게 기도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주님은 온 몸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모르는 우리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먼저 첫 번째로 주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려고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께 은밀히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마태 6:5)고 하시며,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지 말고 대신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 6:6)고 약속하였습니다. 평소 주님이 사람들로부터 뚝 떨어져 한적한 곳에 나가 하나님과 가지셨던 은밀한 기도의 교제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세상의 문제로부터의 도피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직시하고 대면하는 용기입니다.
둘째로 주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의롭다 여기지 말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기도를 드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이 주신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의 비유(누가 18:9-14)를 보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던 바리새인은 자신은 죄인들이나 세리와 달리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바친다고 자랑스레 기도한 반면,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까? 주님은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즉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면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로 주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6:7) 이미 한 말을 자꾸 되풀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태 6:8). 그러면서 이어서 우리에게 기도의 모범으로 것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마태 6:9-13, 누가 11:1-4).
네 번째로 주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그 기도가 응답받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마가 11:24). 의심하고 떠보는 기도가 아니라, 담대한 믿음으로 내가 구하는 것이 이미 받은 줄 믿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믿음이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을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실로 주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마태 7:7, 누가 11:9)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태 7:8, 누가 11:10)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섯 번째로 주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합심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 18:19-20). 우리가 마음을 합해 기도한다면 무엇을 구하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기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로 주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낙심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비유로 한 과부의 이야기를 드셨습니다(누가 18:1-8). 어느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이 있었습니다. 최악의 재판관입니다. 그 도시에 아무 힘도, 아무 연고도 없는 한 과부가 살았습니다. 재판장은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는 이 과부의 요청을 무시했습니다. 하지만 성서를 보니 혼잣말로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며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과부의 청을 들어줍니다. 얼마나 끈질기게 그 재판관을 괴롭혔으면 그 청이 이루어졌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땅의 재판장도 그러한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과 은밀한 기도의 교제를 나누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롭다 뻐기지 말고 낮고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중언부언하지 말고,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아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믿음과 신뢰를 드리는 기도를 드리십시오. 내 기도가 반드시 응답 받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합심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그 기도가 이루어짐을 믿고 끈질지게 기도하십시오.
오늘 무용의 주제는 "Prayer" 즉 '기도'입니다. 이화여대 무용과의 김명숙 교수님이 안무하셨습니다. 한국무용과 기독교 신앙이 만날 때 어떤 아름다운 고백과 예술이 나올 수 있는지 보시게 될 겁니다. 김명숙 교수님은 지금 이화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우리 하나하나가 그리고 우리가 모두 함께 하나님에게 간절히 기도하고 용기 있게 나아간다면 반드시 이 어려움을 이기고 이 세상에 빛과 희망으로 다시 우뚝 설 수 있음을 믿고 그것을 오늘 무용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이화만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일터가, 그리고 우리의 나라도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우리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절망을 털어내고 함께 희망의 빛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무용은 모두 네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장은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도가 형상화되었습니다. 제2장은 "고뇌와 절규 속에서"입니다. 갑자기 닥친 시련과 고난 속에서 절규하는 우리의 몸부림이 잘 표현되었습니다. 제3장은 "간절한 호소"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십자가를 향해 우리가 드리는 지극히 간절한 기도가 아름답게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제4장은 "희망의 빛을 향하여"입니다. 김명숙 교수의 무용에서 빛은 특별합니다. 어쩌면 천상의 세계에 와 있는지도 모르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빛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며 우리를 고난에서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그 강렬한 빛이 이 무대와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밝혀줄 겁니다.
말씀선포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입으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 몸으로, 아름다운 춤으로, 그리고 찬란한 빛으로 선포됩니다. 아멘. (2018.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