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7일 남북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의 순간들을 뒤늦게 인터넷을 통해 보면서 큰 감동과 함께 마침내 한반도에 분단의 역사를 끝내고 평화를 정착시킬 기회가 찾아왔다는 확신까지 들었다. 그러나 그 후 급속도로 진행된 지역 국가 정상들의 만남과 한반도의 미래를 예측하는 한국과 미국의 언론보도를 보면서 뭔가 빠진 부분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곧 분단의 대립을 겪었던 고통이라는 한반도 평화의 역사적인 맥락, 그리고 그 고통이 세계사의 짐을 짊어진 대가였다는 부분이다. 이와 관련해 누구보다 간절한 소망을 남겼던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떠올렸고, 그 책을 꺼내 들고 분단시대를 다룬 마지막 부분을 훑어 읽었다. 그에게 한반도의 역사가 고난의 역사였던 것처럼, 분단은 그 역사의 일부였다. 분단을 극복할 방법을 평화를 추구하는 운동에서 찾았고, 이것을 고난의 짐을 진 씨알들의 사명이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사실 미국에 살면서도 미국의 언론이 다루는 제3세계의 문제는 오래 전부터 거의 읽지 않고 산다. 참기 힘들 정도의 피상적인 분석만을 일삼는 건 보수나 진보적인 언론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그 이유를 역사의식의 부재라는 미국 특유의 정서에서 찾을 수 있다. 개인의 고통은 이해하지만 민족과 같은 집단의 고난에 대한 이해를 잘 하지 못한다. 예컨대 아프리카나 팔레스타인의 문제를 현실정치나 경제적인 문제로 다룰 뿐, 그들의 아픈 역사와 고난의 체험은 근접하지도 못하는 언론기사를 보게 된다. 대신 역사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이해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그것은 비단 언론만의 문제가 아니라, 서구의 근대를 거치면서 고난이나 한과 같은 인간 경험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능력이 사라졌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거기에 미국중심적인 사유나 실용주의 정신이 합쳐지게 되면 전형적인 미국의 언론이 만들어진다.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의 언론에선 회의적이고 북한의 의도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는 기사들을 많이 보게 된다. 다소 진보적이라 평가받던 오바마 행정부의 인물들이 지금 그런 기사들을 만들어내고, 오히려 극우적인 성향을 보이던 폭스뉴스에서 북미회담에 대해 호의적인 보도를 하고 있는 아이러니를 목격하게 된다. 실제 미국 정치의 보수와 진보가 세계의 평화라는 가치를 놓고 대립했던 기억은 없다. 미국의 이익만이 있었을 뿐이다. 북미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평화를 위한 결의를 한다고 해도 미국 내에서 어떤 저항에 부딪힐지 알 수 없다. 미국사회엔 한반도 평화의 저해 요소로 작용하는 또 다른 변수가 있다. 바로 뿌리 깊은 반사회주의 정서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그동안 체질화된 사회주의에 대한 반감에 의해 좌우된 면이 있다. 이는 미국의 보수 기독교계에서 북한에 대해서 특별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북미정상회담에 대한 미국 주류 언론의 회의적인 보도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세력은 악하고, 진실되지 못하고, 결국 믿을 수 없다는 학습된 무의식과 무관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국제관계에 관심이 없이 선동적이고 호전적인 수사만 쏟아내던 트럼프 대통령이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주인공이 되리란 기대는 어느 누구도 하지 못했다. 역사가 합리적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어도, 지금 트럼프를 응원하고 있는 나의 모습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물론 트럼프가 종교적인 회심을 통해 한반도 평화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을 갖게 된 건 아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성공적인 ICBM실험이 미국의 선택을 요구했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의 완성을 선언하고 평화를 위한 협상을 선제적으로 제안하지 않았다면, 미국이 먼저 한반도의 종전과 평화를 꺼내들지 않았을 것이다. 이전 미국의 정권들이 한반도의 평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던 이유는 결국 한반도의 평화가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미국의 전략은 북한과 같은 '불량국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핵무기를 보유한 불량국가는 더 이상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미국의 선택은 선제적인 공격 아니면 협상과 타협 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한반도에 평화가 그 동안 정착하지 못한 이유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최근 남북과 북미관계에 큰 장애물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한반도의 분단은 냉전체제의 산물이었고 그 세계사의 짐을 남북의 국민들이 고통스럽게 지고 왔다는 사실을 미국의 언론에선 듣기 힘들다. 판문점 선언 이후 남북의 정상들이 주변 국가들을 찾아다니며 이해와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에서 그동안 한반도의 평화를 성취하기 힘들었던 이유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최근 한반도 평화에 대한 한국 내에서의 논의도 종전과 평화의 문제를 역사적인 성찰을 배제한 채 현실 정치와 경제적인 논리로만 판단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보인다. 평화가 필요한 이유로 제시되는 논리는 주로 경제적인 번영과 연결된 것들이다. 하지만 번영을 위해 제시되는 방법은 주로 남한의 자본주의를 북한에 심어놓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들이 많아 보인다. 북한이 경제적 지원과 발전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지만, 어떤 형태의 지원과 발전이 북한에 필요한 것인지 예단할 수 없다. 북한을 자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의 평화는 한국역사에 대한 성찰과 함께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도 수반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승리를 자축하는 방식의 한반도 평화는 분단과 분열을 지속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한반도 평화에 어떤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 애써 찾아 말하지 않는다면 분단과 고난을 그저 불행했던 과거로만 이해하고 끝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여기서 다시 함석헌을 생각하게 된다.
함석헌은 판문점 선언을 분단된 역사의 고난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했을 것이다. 그는 현재 진행되는 논의에서 전문가들의 목소리만 들린다고 비판할 것 같다. 분단의 고통을 가슴에 안고 살아온 씨알의 목소리를 요구했을 것이다. 전문적 지식의 계산된 목소리가 아니라, 평화의 땅에서 어떤 인간으로 살아야 할지를 묻는 예언과 비전의 목소리다. 함석헌에게 한반도의 역사는 삐뚤어진 역사였다. 평화를 예감하는 이 순간을 그는 역사를 한 번쯤 바로 세워볼 꿈을 꾸는 기회로 여길 것이다. 그 기회는 현실만큼이나 이상을 펼치는 기회다. 그 이상은 고난을 번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의미를 찾는 일이다. 함석헌은 20세기 한반도 역사의 고난을 평화를 외칠 사명으로 연결시켰다. 그에게 이 사명은 한반도 내부에서 그칠 수 없는 세계적인 것이었다. 아직도 세상에 고난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많은 민족들과 함께 평화를 만들어나가는 사명인 것이다. 함석헌에게 그 주체는 고난을 감당해온 민중이었고, 민중의 고난이 이데올로기의 대립이었기 때문에 평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추구할 가치는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새로운 가치였다. 그래야만 한반도에서 낡고 삐뚤어진 역사를 바로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민중이 어디에 있고, 이상을 찾는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한반도의 평화는 분단된 역사의 고난 속에서만 제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세상에는 아직도 민중이라고밖에 불릴 수 없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평화가 이상으로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땅도 많다.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의 평화는 함석헌의 말대로 세상을 향한 사명을 감당할 기회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기회, 사람이 우선되는 사회를 꿈꿀 기회, 평화를 세상의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외칠 기회다. 그런 기회는 말로만 찾을 수 있는 비현실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함석헌 선생은 고난의 역사관을 자신의 믿음이자 기도라 표현했다. 기도가 없는 믿음이 없고, 기도가 아닌 믿음도 없다. 또 그런 기도의 기회는 자주 찾아오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