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이사야 61:1-3, 사도행전 2:1-4, 누가복음 4:16-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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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오늘 읽은 복음서의 본문은 예수께서 자기의 고향인 나사렛을 방문했을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누가는 이 사건을 예수님의 공생애 맨 처음에 위치시켰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맨 처음에 놓는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더욱더 그것이 가장 중요한 내용임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에 시작하여 토요일 해질 때 끝납니다. 유대인들은 해가 질 때 하루를 시작하는 독특한 관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회당의 대표자로부터 성서낭독과 강해를 부탁받은 것 같습니다. 당시 유대교 회당의 일반적인 예배 순서는 먼저 시편 찬가를 한 뒤, '테필라'(Tepillah), 즉 기도를 하고, 이어서 '토라'(Torah), 즉 모세의 법과 이어서 예언서를 읽은 후, 이에 대한 강해를 한 다음 축복의 기도로 마칩니다.

예수님에게 주어진 예언서는 이사야서였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예수님은 그 책을 펴서 61장을 찾으셨습니다. 소위 '제2이사야'로 알려진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원래 바빌론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사람들에게 선포된 말씀이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은 선 채로 성서를 낭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강해, 즉 설교는 앉아서 하셨습니다. 유대교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서서 읽고, 그에 대한 인간의 해석은 앉아서 합니다. 겸손의 표현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그랬다간 설교자는 교인들에게 건방지다고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어떻게 내 앞에서 설교를 앉아서 한담!' 하지만 유대인들의 시각은 '내 앞에서'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였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사야 61장 1-2절 원문에서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라는 구절을 삭제하고 읽으셨습니다. 아마도 '주의 은혜의 해'와 '하나님의 보복의 날'이 예수님 당시의 상황과는 잘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사야와 마찬가지로 다음의 네 부류의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표명하셨습니다. 첫째 가난한 사람들, 둘째 포로 된 사람들, 셋째 눈 먼 사람들, 그리고 넷째로 눌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라 당시의 실제적 사회상을 반영합니다. 당시 갈릴리의 급속한 상업화로 많은 농민들이 빈곤계층으로 급속히 몰락하고 있었습니다. 큰 부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심각한 영양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이 실명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아프리카에 가보십시오. 비타민 A의 부족은 쉽게 실명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억눌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들에게 '주의 은혜의 해'가 선포된다는 구절을 읽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대해 딱 한마디의 강해, 즉 설교를 하십니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누가 4:21, 공동번역). 이 말씀이 듣고 있는 청중의 조상들에게만이 아니라 지금 바로 그들에게 이루어졌다는 선포였습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짧은, 단 한 문장의 설교입니다. 세상의 모든 설교자가 부러워하는 설교입니다. 저도 이렇게 설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어떤 성경구절을 읽고 '이 말씀이 여러분이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습니다' 하고 내려올 수 있다면 설교는 참 쉬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입니다. 성령강림절에 어울리는 제목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읽으신 이사야 61장이나 이를 전하는 누가복음 4장 내용의 대전제가 바로 '주의 영이 임하다'입니다. 사실 누가복음에서 '주의 영'은 그 복음서 전체를 끌어가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시작은 예수님의 세례 받음부터입니다. 3:21-22에 "백성이 모두 세례를 받고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고 기도하는데,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내려 오셨다"고 했습니다. 광야의 시험도 주의 성령이 주도한 것입니다. 4:1에 "예수께서 성령이 충만해서, 요단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시험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이후 4:14에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4:18에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펼치시고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바로 이 말씀을 낭독하심으로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자살이 많은 도시가 런던입니다. 눈여겨 볼 사실은 영국인의 자살률과 안개가 비례한다는 점입니다. 안개가 오래 지속될 때 자살률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런던에는 강한 바람이 필요합니다. 안개를 몰아내주는 것은 강한 바람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설악산 대청봉에 올랐을 때의 일입니다. 아름다운 산세와 끝없이 펼쳐진 동해바다를 보러 올랐으나 운무 때문에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아 크게 실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강한 바람입니다. 운무를 몰아내주는 것은 강한 바람입니다. 1983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요트 경기인 America's Cup이 하루 동안 연기된 적이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준비는 완벽하게 갖추어졌습니다. 그런데 경기가 치러지기 위해 꼭 필요한 것 한 가지가 없었습니다. 바람이 한 점도 불지 않았던 것입니다. 항해를 하는 데 필요한 것은 힘찬 바람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 앞에서 시야를 뿌옇게 가로막는 온갖 안개와 운무가 낄 때가 있습니다. 이를 몰아낼 줄 수 있는 것은 세찬 바람입니다. 인생이라는 항해에서 우리의 배를 움직이게 해주는 것은 강력한 바람입니다. 아무리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가득해도 바람이 불지 않으면 인생이라는 돛단배는 항해를 할 수 없습니다.

성서는 '주의 영,' 혹은 '성령'을 바람에 비유합니다. 성령은 히브리어로 '루아흐'(ruah)입니다. 루아흐는 영, 호흡, 혹은 바람을 가리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의 '영'인 성령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참여해 "수면 위에 운행"하고 계셨고(창 1:2), 하나님의 '호흡,' 혹은 생기(生氣)인 성령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을 생령(生靈, 생명체)이 되게 하실 때에 그 코에 불어넣으셨으며(창 2:5), 하나님의 '바람'인 성령은 노아의 방주가 떠 있던 땅의 물을 줄어들게 하실 때 하나님이 땅 위에 불게 하셨습니다(창 8:1). 이 성령은 신약성서에서 '프뉴마'(pneuma)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성령은 예수님을 잉태하게 하셨고(마태 1:20, 누가 1:35),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비둘기같이 내려와 예수 위에 임하셨으며(마태 3:16, 마가 1:10, 누가 3:22),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어 40일간 시험을 받게 하셨고(마태 4:1, 마가 1:12, 누가 4:1), 또한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그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으로, 그리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으로 거기 모여 있는 각 사람 위에 임하셨습니다(사도행전 2:2-3). 이처럼 성서에서 성령은 새로운 창조를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생명의 바람입니다.

우리말에 '허파에 바람이 들어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없이 웃는 사람을 빗대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눅이 들고, 정체되고, 침체되고, 나른하고, 권태 속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영혼에 바람이 들어가야' 합니다. 주의 영이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기, 즉 생명의 기운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글자 그대로 '신바람,' 즉 하나님의 성령 바람이 가득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신명'나는 삶, 즉 흥겨운 신바람과 멋이 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바람, 즉 성령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첫째로 이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바람입니다. 요한복음 3:8에서 예수님은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새번역)고 말씀하십니다.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나는지 모르는 게 바람입니다. 자기가 불고 싶을 때 부는 게 바람입니다. 자기가 불고 싶은 곳으로 부는 게 바람입니다. 바람의 특성은 '자유함'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은 자유롭습니다. 인간의 교리나 제도 안에 가둘 수 없는 게 성령입니다. 교회의 울타리 안에만 머물지 않는 게 성령입니다. 때문에 크리스천들은 예배에서 이 성령이 우리에게 불어달라고 '간청'(invoke)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주술로 불러내는 것(conjure)이 아닙니다. 혹은 고안하거나 발명하는 것(contrive)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에게로 불어와 달라고 우리가 '간절히 청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특징은 자유로움이기 때문에 성령이 거하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도 자유로움입니다. 여러 교회에서 '성령 충만,' '성령 충만' 하는데, 요즘 교회에서 '성령 충만'하다는 신령한 사람들을 보면 하나도 자유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앞뒤가 꽉 막힌 경우가 많습니다. 고정관념에 똘똘 뭉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변화와 갱신과 오히려 거리가 먼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것이 정말 '성령 충만'일까요? 성령의 바람이 정말로 가득한 사람은, 바람을 어디에 묶어 둘 수 없는 것처럼, 어디에 안주하거나 정착하지 않습니다. 제도든, 관습이든, 취향이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갈 길을 재촉하면 그것을 따라갑니다. 주저 없이, 미련 없이 새 길을 향해 떠납니다. 아브라함처럼 나그네의 순례길을 떠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해야 합니다(갈 5:25). 즉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새번역).

둘째로 성서는 모든 바람이 다 성령의 바람이 아니며 그 바람을 시험(test)하라고 말합니다. 내가 받은 영이 '주의 영'(성령)이 아니라 '마귀의 영'(악령)은 아닌지 성경은 묻고 분별하라 합니다. 요한1서 4:1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자기가 성령을 받았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다 믿지 말고 그들이 성령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십시오. 많은 거짓 예언자가 세상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공동번역). 성경은 영들을 '테스트'하라고 합니다. 성령인지 악령인지 구별하라고 합니다. 독일의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은 "오늘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한 짧은 논문에서 독일의 신학생들이 교회 안의 영들을 '테스트'하라고 촉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말한 '오늘'은 1933년에 히틀러가 집권했을 때의 오늘입니다. 그가 말한 '교회'는 나치의 집권을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해석한 당시 독일의 주류교회였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말할 때는 그것은 '모든 것을 믿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것'은 믿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즉 무엇을 믿는 것은 무엇을 믿지 않는 것과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 6:24)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란 곧 선택을 의미합니다. 내가 무엇을 믿기로 선택한다면 무엇을 믿지 않아야 하는지 분명히 결단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받은 영이 '성령'인지 '악령'인지 테스트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요한1서 4장은 이렇게 답을 줍니다. 2-4절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을 이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시인하는 영은 다 하나님에게서 난 영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은 다 하나님에게서 나지 않은 영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적대자의 영입니다"(새번역).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왔음을 시인하게 하는 영이 하나님이 영이고 그것을 부인하는 영이 적대자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신'(flesh)이 무엇입니까? '살과 피'를 의미합니다. 즉 인간 고통의 삶의 현장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바로 그 역사의 한복판에 오셨다는 것, 살짝 왔다 간 것이 아니라 그 살과 피의 밑바닥, 즉 십자가까지 왔다는 것, 바로 그것을 시인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영이 곧 주의 영입니다. 사람의 생각이나 지혜 혹은 철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시인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영이 곧 주의 영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런 주의 영이 임하였을 때 이사야 예언자가, 그리고 예수님이 선포하신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세 번째로 우리는 성령의 바람이 일정한 방향으로 불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은 자유하시나 그 바람에는 일정한 방향이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면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 포로 된 사람들, 눈먼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육신의 현장 밑바닥을 향하게 됩니다. 성령의 바람은 그곳을 향해 붑니다. 사람들이 '진보,' '진보' 하는데 진보란 앞으로 나아가는 운동이 아닙니다. 진보란 바닥을 향하는 운동입니다. 여러 사람이 넘어져 있는데 혼자 앞서 나가는 것이 진보가 아닙니다. 진보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자유로운 바람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데, 그 자유롭게 하심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육신의 한 가운데, 가난과 억압과 고통과 능욕의 현장 한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게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 지친 삶의 현장에서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는 용기를 주시는 게 다름 아닌 '주의 영'입니다.

지난 20세기 교회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오순절'(Pentecostal)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지 50일째 되는 날, 즉 오순(五旬)이 되는 날에 일어난 성령강림사건을 기념해 개인의 성령 체험을 중시하는 기독교운동을 말합니다. 오늘날 전 세계 거의 5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이 영적 운동은 가톨릭 다음으로 가장 큰 교세를 이루고 있으며, 지금도 지구상에서 가장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유일한 개신교입니다. 한국에는 이 지상에서 가장 큰 개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도 이 '오순절' 소속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근대 성령운동이 한 가난하고 무식한 흑인노예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윌리엄 조셉 시모어(William Joseph Seymour, 1870-1922)는 미국에서 막 해방된 흑인노예의 아들로 1870년에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지독한 가난과 계속 이어지는 백인들의 인종차별과 특히 기성교회의 천대를 받고 자랐습니다. 그는 너무 가난해서 학교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 경제공황이 닥쳐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그는 로스앤젤레스 빈민가 한 마구간에서 흑인들에게 하늘로부터 직접 내려오는 성령의 은사와 체험을 설교했습니다. 그로부터 오늘의 오순절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백인교회의 문턱에서 번번이 쫓겨났던 그는 그런 교회의 제도나 직분을 통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성령과 직접 교통하며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설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방언(方言), 즉 습득한 일이 없는 언어를 무아의 상태에서 말하는 것이나 신유(神癒), 즉 신의 힘으로 병을 고치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방언이나 신유보다도 흑백의 인종장벽 제거가 더 성령의 은사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보여주는 확실한 징표라고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20세기 초에 시작된 근대 성령운동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권위적 교리'나 '전통적 예배의 냉랭함'에 반발해 일어난 것으로서, 결코 탈(脫)역사적인 영성이 아니라 '살과 피'로 이루어진 고난의 역사 한복판에서 이루어지는 실천적인 영성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바람은 자유롭게 하는 바람입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保惠師, 요한 14:16, 26; 15:26; 16:7), 즉 '진리의 영'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사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요한 16:13)실 것입니다. 그 진리의 바람은 덧없는 것들에 묶여 있는 집착의 고리를 끊어주는 바람입니다. 항해할 줄 모르고 마냥 정박해 있는 배의 닻을 끊어버리는 바람입니다. 때로는 광풍으로, 때로는 미풍으로, 박힌 돌처럼 조금도 움직일 줄 모르는 우리를 뿌리째 뽑아버리는 바람입니다. 지치고, 권태롭고, 답답하고, 출구가 없는 우리들의 삶에 생기, 신바람, 새 소망, 새 목적, 새 비전, 새 힘을 불어넣어주시는 바람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바람은 김삿갓의 방랑기가 아닙니다. 발 닿는 대로 아무 데나 유랑하는 '바람끼'가 성령의 바람이 아닙니다. 성령의 바람은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심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침체 되고, 나태나고, 구태의연하고, 정체되고, 변화가 없는 우리에게 새 바람을 불어넣어 우리를 이끌어 내심에는 분명한 목적과 방향과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심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심입니다. 포로가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언하고, 눈먼 사람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는, 그런 주의 은총의 해, 즉 희년(禧年, Jubilee)을 선포하게 하시기 위한 자유의 바람이 성령의 바람인 것입니다.

그 바람을 맞아 일어난 사건이 오순절 다락방 사건입니다. 그 바람을 맞아 일어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오늘 우리가 인생의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예배시간에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빈손으로, 빈 마음으로 오직 한 가지를 간절히 청해야 할 것입니다. '주의 영을 간청'(invocation of the Spirit)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예배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나눈 '평화의 인사'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청한 것입니다. "오소서, 성령이여! 메마르고 더러워진 우리 삶에 단비를 내리소서. 우리 죄를 씻기시고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소서. 사랑의 불을 우리 안에 붙여 주시어 우리의 냉담함을 태워버리소서. 주님의 따뜻한 사랑으로 우리를 녹이시고 방황하는 우리 발을 인도하소서."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영, 주님의 영, 거룩한 영을 간청하십시오. 천지를 창조하실 때 불어넣으신 그 '루아흐'를 간청하십시오. 하나님의 숨, 하나님의 생기, 하나님의 바람을 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런던 시내의 안개를 쫓아버리는, 설악산 대청봉 앞의 운무를 날려 버리는, 그리고 날마다 우리 앞에 자욱한 저 미세먼지를 깨끗이 날려버리는, 그래서 우리 인생의 돛단배를 바다 위로 힘차게 나아가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힘찬 바람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이 교회와, 그리고 우리 이화에 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시는 그 보혜사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에 이르는 복된 교우님들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8.5.20.)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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