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사야 40:28-31, 에베소서 2:14-16a, 요한복음 5:1-9 -
폴 마이어라는 사람이 금붕어를 가지고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항의 한 가운데 유리벽을 세우고 한 쪽에는 금붕어를, 다른 쪽에는 굶주린 메기를 넣었습니다. 메기는 먹이들을 보고 쏜살같이 돌진하여 잡아먹으려 합니다. 그러나 유리벽에 부딪치고, 부딪치고, 또 부딪칩니다. 그것을 수없이 반복하다가 결국 단념하고 맙니다. '나는 저 금붕어를 먹을 수 없다. 나는 저 벽을 넘을 수 없다.' 메기에게 그 정도의 지능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유리벽을 들어냅니다. 이제 메기는 언제든지 맛있는 금붕어를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메기는 유리벽이 있던 곳 근처에 가서는 획 돌아서고, 획 돌아서곤 합니다. 거기 더 이상 유리벽이 없는데, 그 앞에서 돌아서고 또 돌아섭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말입니다. 이 메기에게는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의식이 머리에 박혔습니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해 봐야 안 되더라'는 경험이 온 몸을 사로잡았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는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데스다 연못 사건'입니다. 이 이야기는 공관복음에는 없고 오직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명절에 (아마도 오순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양의 문'(Sheep Gate)이라는 이름의 문이 있었습니다. 양이 많이 드나들어 붙여진 이름인데, 구약시대에 이 문으로 들어간 양들은 속죄제사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그 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이름의 연못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어로 '베데스다'(Bethesda)는 '자비의 집'(House of Mercy)이라는 뜻입니다. 무슨 자비를 말하는 걸까요? 거기에는 다섯 개의 행각(行閣)이 지어져 있었는데 그 안에는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 그리고 중풍 환자 등,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래 전부터 전해오던 한 전설 때문이었습니다. 가끔 천사가 연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물이 움직일 때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깨끗이 낫는다는 전설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이 베데스다 연못을 '간헐적으로 물이 끓어오르는 온천'이라고 소개하는 안내 책들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쓴 책이 아닌가 합니다. 온천물은 질병을 치료하는 약효를 가지고 있어 병자들에게 신비한 기적의 샘물로 인정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베데스다는 온천도 아니고 연못도 아니며 단지 빗물 저장고에 불과합니다. 예수님 오시기 약 2백 년 전 마카비의 혁명이 있었습니다. 외세의 지배로부터 잠시 예루살렘을 탈환한 유대인들은 성전을 정화하면서 대규모의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해 커다란 급수시설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래서 겨울에 내리는 빗물을 모으는 저장고를 만듭니다. 이곳이 처음에는 희생 제물인 양을 파는 시장 가까이에 있어서 '양의 못'이라고 불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못에서 희생 제사에 쓸 양들을 씻었습니다. 이후 예수님 시대에 헤롯이 예루살렘 성전을 개축하면서 베데스다 못도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헤롯은 거기에 다섯 개의 행각을 세우고 로마의 공공목욕탕처럼 멋지게 꾸몄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레 병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깨끗한 물을 마시고 씻는 것이 치료의 거의 전부였습니다. 베데스다는 그렇게 병자들이 모여 몸을 씻으며 신적인 자비를 구하는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데스다가 간헐천이 아니고 빗물 저장소에 불과하다면, '물이 가끔 움직인다'는 성서의 보도는 무슨 뜻일까요? 베데스다 못은 북쪽 저수조와 남쪽 저수조, 두 개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는 분리벽이 있었고, 물은 북쪽 저수조에서 남쪽 저수조로 흐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북쪽 저수조에 일정한 양의 물이 차면 수문을 열어 남쪽 저수조로 흘려보냈는데, 그 때 물이 움직이는 것을 본 병자들에 의해 거기에 신비한 의미를 부여하여 연못 밑바닥에서 물이 끓어오른다느니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한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어라"(요한 5:2-4)는 구절을 괄호 안에 넣어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유명한 사본에는 이 구절이 아예 빠져 있기도 합니다. 성서는 이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전설적이고 미신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그 미신적인 전설을 믿고 38년이나 낫기를 기다리던 병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38년! 한 인간에게 그것은 너무도 긴 세월입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말도 있는데, 38년이나 질병에 시달렸다니 그 사람과 그 가족의 삶이 얼마나 피폐해지고 망가졌을까요? 더구나 그 당시에는 유대인 남성의 평균수명이 겨우 29.5세에 불과하던 시절이니 질병으로 38년을 시달린 그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을지는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그가 10대에 병에 걸렸다면 그는 이미 쉰이 가까운 나이였을 것이고, 만약 20대에 걸렸다면 예순이 다 되었겠지요. 그는 글자그대로 '한평생' 동안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일 때만 기다리며 '자비의 집'이라는 베데스다 앞에 살았습니다. 사실 거기에는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치료가 안 되는 만성적인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마지막 희망을 걸고 찾아간 곳이 베데스다였습니다. 행여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심지어 유대인으로서의 신앙심까지 버리고 찾아간 곳이 베데스다였습니다. 사실 베데스다에는 이방인들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거기에는 소위 '치유의 신'이라는 아스클레피우스의 신전과 이른바 '치료의 성소'라는 아스클레페이온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이방신 앞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우상숭배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었지만 오랜 질병으로 인해 '죄인'으로 취급받아 공동체로부터 배척당하고 성전 제사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내몰린 이들이 갈 곳은 거기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인생의 막장'에 어느 날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38년 된 그 병자에 주목하셨습니다. 그가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질문입니다. 낫고자 하지 않으면 그가 거기 왜 그 고생하며 오랜 세월을 앉아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질문은 이 병자의 속마음을 깊이 헤아려본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실패를 거듭하면 희망을 갖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절망의 상태가 오래되고 그것이 일상이 되어버리면 희망은 희미해지고 오히려 변화에 대한 두려움만 남는 것이 인간인 것 같습니다. 그 병자도 처음에는 자신이 언젠가는 반드시 나을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겠지만 번번이 경험한 실패와 좌절 속에서 자신에게는 결코 자비와 행운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깊은 절망감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38년이나 되는 긴 세월이 흐르면서 그 병자의 마음속에는 더 이상 아무 희망도 남지 않고 단지 습관적으로 베데스다 행각 앞에 앉아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낫기를 원하느냐?"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시기 전 먼저 영혼의 아픔을 치유하셨습니다.
병자는 이렇게 답합니다. "선생님, 그렇지만 저에겐 물이 움직여도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가는 동안에 딴 사람이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7절, 공동번역). 동문서답입니다. '낫기를 원하느냐' 물었으면 '그렇다' 혹은 '아니다'라고 답하면 될 것을, 그는 왜 자기가 지금까지 낫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 자신이 행운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는지 변명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고 자기보다 빠른 사람이 그 행운을 채갔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그의 이 말속에 베데스다 연못의 전설에 숨어있던 무서운 진실이 폭로됩니다. 그것은 병이 나으려면 무섭게 경쟁해야 하고, 그 많은 경쟁자 중에서 오직 1등만 병이 낫는다는 사실입니다. 병이 낫는 것도 성적순이었습니다. 오직 1등에게만 행운이 주어졌기 때문에 아무도 서로 돕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자비의 집'이라는 베데스다에는 자비가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서바이벌 게임과 같은, 끝없는 경쟁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데스다는 끊임없이 실패자를 양산하고 있었습니다. 병자들이 마지막 기대와 희망을 안고 찾아온 곳이지만 오히려 깊은 절망과 무자비한 경쟁만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 아니라 무자비한 폭력의 소굴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베데스다는 오늘 우리의 현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무한한 경쟁의 세상, 오직 일등만이 성공하고 나머지 모두는 패배자가 되는 세상, 행복이 성적순인 세상, 바로 그 세상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는 베데스다 연못 앞에서 물이 움직이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며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뛰어 들어 행운을 움켜쥐려는 존재들로 살아갑니다. '일등만이 살아남는다'는 베데스다의 전설을 신봉하며 그 신화를 찬양하며 누구보다 먼저 그 연못에 뛰어 들어가려고 세상 모든 사람들과 끝없이 경쟁하는, 그 병자들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도 넘은 일입니다. 1986년 1월 15일 새벽에 당시 00중학교 3학년이던 한 여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전교 1등을 하던 학생이었습니다. 당시 신문에 공개된 그 학생의 유서는 오로지 경제성장과 입시과열로 치달았던 우리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H에게"라고 시작되는 이 유서의 제목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이었습니다. 후에 같은 제목의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고, 같은 제목의 소설이 발표되기도 했으며, 같은 제목의 노래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32년 전에 그 소녀가 쓴 유서를 다시 펼쳐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매년 2백 명이 넘는 우리의 아이들이 성적과 입시 경쟁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유서의 내용입니다.
"난 1등 같은 것은 싫은데, 앉아서 공부만 하는 그런 학생은 싫은데, 난 꿈이 따로 있는데, 난 친구가 필요한데, 이 모든 것은 우리 엄마가 싫어하는 것이지. 난 인간인데 난 친구를 좋아할 수도 있고, 헤어짐에 울 수도 있는 사람인데 어떤 땐 나보고 혼자 다니라고까지 하면서 두들겨 맞았다. 나에게 항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기라고 하는 분, 항상 나에게 친구와 사귀지 말라고 슬픈 말만 하시는 분, 그 분이 날 15년 동안 키워준 사랑스런 엄마라니 너무나 모순이다.... 매일 경쟁, 공부밖에 모르는 엄마... 난 로보트도 아니고 인형도 아니고, 돌멩이처럼 감정이 없는 물건도 아니다.... 공부만 한다고 잘난 것도 아니잖아?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해 이 사회에 봉사,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면 그것이 보람 있고 행복한 거잖아. 꼭 돈 벌고, 명예가 많은 것이 행복한 게 아니잖아. 나만 그렇게 살면 뭐해? 나만 편안하면 뭐해?... '전교 0등, 반에서 0등, 넌 떨어지면 안 된다. 선생님들이 널 본다. 수업시간에 넌 항상 가만히 있어야 한다. 넌 공부 잘하는 학생이니까 장난도 치지 마라. 다음번에 0등 해라. 왜 떨어졌어? 친구 사귀지 마. 공부해! 엄마 소원성취 좀 해줘. 전교 1등 좀 해라. 서울대학교 들어간 딸 좀 가져보자. 그렇게 한가하게 음악 들을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공부해.' 매일 엄마가 하시는 말씀들. 자기가 뭔데 내 친구 편지를 자기가 읽는 거야. 그리고 왜 찢는 거야.... 난 눈이 오면 한껏 나가 놀고 싶고, 난 딱딱한 공해보다는 자연이 좋아. 산이 좋고, 바다가 좋고. 하긴 지금 눈이 와도 못 나가는 걸....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 난 그 성적순위라는 올가미에 들어가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삶에 경멸을 느낀다...."
1989년에 강우석 감독은 이 유서의 제목과 동일한 제목의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배우 김보성 씨와 이미연 씨가 주연을 맡았지요. 원작 소설은 임정진 작가가 집필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2등은 없다, 오직 1등만이 살아남는다'는 폭력적 신념이 진짜로 우리의 아이들을 어떻게 살해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인 봉구는 비록 성적은 뒤떨어지지만 자신의 취향을 키워나가며 활발하게 학교생활을 합니다. 그에 비해 은주는 수시로 전교 수석을 차지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부모의 집착 때문에 늘 성적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립니다. 그러다 은주는 순수한 마음의 봉구에게 끌립니다. 잠시 현실을 벗어나 야외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은주와 봉구... 그러나 다음 시험에서 은주는 전교 7등으로 밀려나고 냉랭한 부모의 시선을 견디다 못해 자살합니다. 은주의 장례식 날, 장례식에 참여하려는 학생들에게 수학 선생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장례식에 갈 시간에 다른 학교 경쟁자들은 수학 문제를 하나 더 풀고 있다며 "그런 감상은 때려치우라"고 말합니다. 이 영화는 성공의 이름으로, 경쟁의 이름으로, 그리고 승리의 이름으로 우리의 교육현장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무서운 폭력과 학대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역설적인 것은, 이 영화에 열광하고 함께 울었던 1980년대의 청소년들이 훗날 부모가 되어 자신들의 자녀들을 사교육의 지옥으로 몰아넣은 주역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 기자가 전하는 2천 년 전 베데스다 연못의 이야기를 오늘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읽어야 합니다. 한평생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저을 때 1등으로 뛰어들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미신에 온 희망을 걸고 하루하루를 버티던 그 병자는 "네가 낫고 싶으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동문서답으로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아 나을 수 없었다고 변명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이 사람의 대답에 동문서답으로 응답하십니다. 그 병자의 답변에 부응한다면 예수님은 '그래 내가 천사를 불러주마'라든지, 아니면 '내가 너를 들어서 제일 빨리 연못에 넣어주마'라고 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천사를 부르지도 않았고, 물을 움직이지도 않았으며, 그 사람을 연못에 넣어주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Stand up, take your mat, and walk!) 참 이상한 일입니다. 병자를 고치실 때 하시던 그 흔한 '네 병이 나았다'는 선언도 없으셨습니다. 복음서의 다른 기사들처럼 침으로 진흙을 이겨 바르거나 하는 상징적인 행위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일어나서 38년이나 깔고 앉아 있던 그 낡은 거적대기를 들고 걸어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연못을 향해 걸어가라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베데스다 연못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데스다의 전설과 신화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말고 과감히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에게만 자비가 베풀어지고 나머지 모두는 패배자가 되는 그 가짜 '자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의 진정한 자비가 다스리는 새로운 삶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데스다의 자비는 '무자비의 자비'였습니다. 사실 그것은 폭력이었습니다. 오늘도 세상은 베데스다의 전설과 미신을 신봉합니다. 심지어 교회마저 이 미신과 신화를 복음이라 강변하며 설파합니다. 교인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도와서 남들보다 먼저 그 연못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로또의 주인공이 되게 해달라고 빕니다. 어떤 성직자들은 자기가 그 물이 움직이는 때를 안다고 말하면서 자기에게 오면 그 연못에 먼저 넣어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은 연못을 가지고 장난을 치지 않으셨습니다. 모두가 불행하게 되는 그 연못의 허상을 깨주셨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공멸로 향하는 그 무한경쟁의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가 충만한 새로운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그 삶으로 일어나 가라고 우리의 병든 마음과 육신을 고쳐주셨습니다.
자비가 무엇입니까? 성서가 말하는 '자비'는 영어가 말하는 "mercy"처럼 단지 범죄자에게 최대한의 관용을 베푸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자비는 히브리어로 '라하밈'인데 이 말의 어원은 어머니의 자궁입니다. 신약성서에서 자비는 그리스어로 '스플랑크논'인데 이 역시 생명의 출산이 이루어지는 자궁에서 그 말이 나왔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자비는 타인의 고통과 상처 그리고 슬픔이 너무나 생생하고 강렬하게 다가와 나의 내장이 뒤집어질 정도로 그 아픔에 공감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말에도 정확히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애달프다'와 '애끓다'입니다. 우리말로 '애'는 창자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애달프다 혹은 애끓다라는 말은 창자가 끊어질 듯 아픈 상태를 말합니다. '단장'(斷腸)이라는 말도 이와 비슷한데, 상대방으로 말미암아 몹시 슬퍼서 '내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승자에게만 주어지는 특혜가 아니라 모든 생명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입니다. 그 자비가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모두가 서로 연대하고 상생하는 행복한 은혜의 세상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베데스다 연못 앞에서 38년이나 되는 긴 세월을 좌절과 원망 속에 보낸 그 병자는 아마도 그 어항 속의 메기처럼 반복되는 실패와 고통 속에서 '나는 할 수 없다,' '나에게는 하나도 되는 게 없다'는 절망의 유리벽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의 앞에 유리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으로 세상의 모든 막힌 담을 허무시고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에베소서 2:14-16). 그러므로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더 이상 베데스다 연못 앞을 서성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 앞에 침상을 깔고 앉아서 언제 물이 동할까 노심초사하며 남들보다 거기 먼저 뛰어들려고 노심초사 피를 말릴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가 행복하지 않은 그 '공멸을 향한 경주'에 더 이상 연연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어나 걸으십시오. 이제 떠나십시오. 발길을 돌리십시오. 38년이나 신봉해온 우리의 오랜 미신과 전설에서 벗어나십시오. 그것과 결별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모두가 행복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가짜 자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가 다스리는 평화와 상생과 공존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낫고 싶으냐?" "낫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여러분의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으십시오. 주님을 따라 힘차게 걸어가십시오. 그분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길이신 그분을 따라 진리와 생명의 길로 날마다 힘차게 걸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2018.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