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12:1~4, 에베소서 2:19-22, 요한복음 14:4-6 -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포이에마, 2014)이라는 제목의 책을 유익하게 읽었습니다. 청어람 아카데미 대표로 있는 양희송씨가 낸 책입니다. 아시겠지만 '가나안 성도'란 '교회에 나가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뜻하는 말입니다. 재미있게도 '가나안'을 거꾸로 읽으면 '안 나가'가 되지요. 그래서 '안 나가'를 뒤집어 나온 '가나안'이란 단어에 '성도'를 붙여서, 오늘날 제도권 교회 밖에서 신앙의 참 모습을 찾는 일군(一群)의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지금 한국사회 안에서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따르기 위해 교회를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제도 교회를 떠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성 교회 밖으로 나가는 '가나안 성도'들은 이른바 '교회 쇼핑족'과는 다릅니다. 이들이 제도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교회성장을 우상처럼 섬기는 교회를 견딜 수 없어서입니다. 다니던 교회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공동체가 아니어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몰상식한 일들을 견딜 수 없어서, 그러니까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아서'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밝히는 사람들 가운데 약 10% 정도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 '가나안 성도'의 수는 무려 100만 명가량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가나안 성도' 현상을 일시적이거나 우발적인 개인적 돌출행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무엇이며 또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근원적으로 묻고 있는, 평신도들의 광범위한 저항행위로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가나안 신앙'을 '성 안의 신앙'이 아니라 '길 위의 신앙'으로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가나안 성도'들은 어쩌다가 길을 잃은 자들이 아니라,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길을 걷는 것임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로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간혹 잊고 있는 게 있습니다. 기독교가 본래 순교자들의 종교, 나그네들의 종교, 즉 '길 위의 신앙'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였고, 모세가 나그네였으며, 엘리야도 나그네였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에 아예 나그네의 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철없이 그를 따르겠다고 나서던 어떤 젊은이에게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머리 둘 곳조차 없는"(마태 8:20, 누가 9:58) 길손임을 일러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회심한 바울은 일생동안 시리아로, 소아시아로, 그리스로, 그리고 로마로 떠돌이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모범을 보여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거리의 사람들'이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청교도 시인 존 번연(John Bunyan)이 『천로역정』이라는 책에서 크리스천의 생애를 나그네로, 순례자로, 그리고 이민자로 표현한 것은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성서의 하나님이 바로 '나그네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특정 장소의 신이 아니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언제나 유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보다 한 발 앞서서 산으로, 들로 옮겨 다니시던 나그네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가나안에 정착하고 난 후에 두고두고 겪은 시련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가나안 토착종교인 바알종교와의 대결이었습니다. '소유'를 뜻하는 '바알'이라는 이름의 신은 '텃세'의 신이었습니다. 특정 지역과 주민을 지배하는 '터줏대감' 신이었습니다. 때문에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훼 하나님을 그와 같이 만들려고 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유혹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예언자들이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솔로몬이 거창한 성전을 세워 거기에 당신을 '모시려' 할 때에 달가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순례자의 하나님, 나그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맨 첫 번째 책인 창세기는 모두 50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제1장에서 11장까지입니다. 여기에는 천지와 인간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고 바벨탑과 노아의 홍수 이야기 등이 실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우주가 탄생하고 인류가 생겨나 끊임없이 발전해 가는데 인간의 문명이 점차 파멸로 귀결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12장부터 50장 끝까지 창세기의 무대는 장대한 우주의 파노라마에서 돌연 소수의 족장들의 방랑기로 전환됩니다. 바로 팔레스타인 땅 위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 족장들의 이야기로 갑자기 축소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의 이야기 말입니다.
이 극적인 장면의 전환이 시작되는 본문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12장 1절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은 원래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 살았습니다. 이 지역은 당시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생각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지였습니다. 여기서 출발한 아브라함은 정처 없이 떠돌다 팔레스타인의 가나안 땅으로 들어옵니다. 이곳은 당시 세계의 변두리였습니다. 변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인간 문명의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불러내신 것입니다.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났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그리고 자기의 결정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무어라 평가할 지 상관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하나님의 구원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파멸로 귀결되던 지점에서 아브라함의 순례로부터, 즉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아브라함의 '길 위의 신앙'으로부터 하나님의 새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창세기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인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순례는 하나의 새로운 '세계 종교'가 출현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20세기의 대표적 철학자 중 한 사람인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그의 유명한 저서 『종교론』 (Religion in the Making)에서 (제1장 6절 '인간의 향상' 편) 이 세계에는 두 가지 종류의 종교가 있는데 하나는 '부족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 종교'라고 구분한 적이 있습니다. 부족 종교의 목표는 보존(保存)입니다. 가지고 물려받은 것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족 종교에서는 신의 눈치 보기와 신과의 거래가 중심이 됩니다. 이런 종교 아래서 신앙인들은 자기네들끼리의 사교에 머뭅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세계 종교'는 여행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떠나 세계를 순례하면서 고등종교로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이런 세계 종교의 목표는 보존이나 신과의 거래가 아니라 신의 의(義)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의 의로움에 비추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의 한국사회 안에서 '교회 밖 가나안 성도'들의 문제가 제기되었다면, 그것은 한국교회가 아브라함의 순례로부터 획득한 세계성과 보편성을 상실하고 자기의 유익에만 급급한 하나의 부족 종교로 전락했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순례자는 영어로 '필그림'(pilgrim)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어원은 라틴어의 '페르 아그룸'(per agrum)인데, 그 뜻은 '들판을 가로질러'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우리는 어떤 성스런 목적을 갖고 대지를 걷는 나그네의 모습을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순례란 자동차에서 내리는 것입니다. 탈 것에서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두 발로, 영혼의 나침반을 따라 '대지를 걷는 것'입니다. 걷되, '천천히 걷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는 '속도'에 집착하는 시대입니다. 사실 속도, 즉 "speed"라는 말처럼 인간 문명의 병든 곳을 정확히 짚어주는 말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영어권에서는 마약을 "speed"라고 합니다. 체코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그의 소설 『느림』에서 속도와 기억, 그리고 속도와 망각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길을 가다가 무언가를 생각하려고 하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하지요. 이럴 때 어떻게 하십니까?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늦춥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각해내기 위해서입니다. 느림과 생각은 하나라는 말입니다. 반면에, 길을 가다가 자신이 겪은 어떤 끔찍한 일이 떠오른다고 하지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빨리 그 생각에서 달아나기 위해서입니다. 빠름과 망각은 하나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빠르면 잊게 됩니다. 빠르면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스피드는 곧 망각입니다. 스피드는 곧 '생각 없음'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유대인으로서 지난 20세기에 나치의 폭력을 몸소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나치의 그 끔찍한 학살과 폭력이 인간의 '생각 없음,' 곧 '사유하지 않음'에서 나온 것임을 폭로했습니다. 그의 유명한 저서 가운데 하나는 악명 높았던 전범 아이히만(A. Eichmann)의 재판과정을 추적하여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인데, 여기서 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유명한 말로 우리의 정신을 일깨웠습니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적 악행은 일부 광신자나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들이 저지르는 범죄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국가에 그저 순응하며 사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것을 아렌트는 발견했습니다. 아이히만은 처음부터 악마적 존재로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 없음'이, '사유하지 않음'이 그를 히틀러의 반인륜적 범죄의 하수인으로, 즉 '괴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우리는 걸어야 합니다. 걷되, 천천히 걸어야 합니다. 그 느린 걸음이 상처 받은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고, 스스로 파멸의 길로 향하는 우리의 문명을 돌아보게 할 겁니다. 사실 우리의 인생길은 '도로'가 아닙니다. 도로는 질주(疾走)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 중 특히 고속도로는 어느 한 지점에서 다른 한 지점으로의 이동만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거기에는 시작과 끝만 존재할 따름입니다. 과정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오직 쫓고 쫓기는 추격전만 있을 뿐입니다. 뒤차에 쫓기고, 옆 차에 쫓기고, 그러다가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쫓깁니다. 지금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의 문명이 그렇지 않나요? 하지만 우리의 인생길은 도로가 아니라 오솔길과 같습니다. 그 길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기도 하고, 진흙탕 길도 있으며, 힘들게 오르다가 쉬이 내려갈 수 있는 곳도 있습니다. 그 길을 걸으십시오. 걷되, 천천히 걸으십시오. 그 걸음이 나를 치유하고 이 시대를 치유할 것입니다.
스페인에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라는 순례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였던 '성 야고보의 순례길'입니다. 이 순례길은 과거에 예루살렘과 로마에 이어 유럽의 3대 순례지로 손꼽혔는데, 오늘날에는 이베리아(Iberia) 반도 끄트머리에 있는 '산티아고 데 꼼포스텔라 성당'까지 이어진, 수백에서 수천 킬로미터의 여러 다른 길들을 가리킵니다. 한국 사람들은 보통 프랑스의 생장(Saint Jean)에서 출발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부지방을 걷는 약 800킬로미터의 여정을 가장 선호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에서 신의주까지의 먼 길인데, 다 걷는 데는 약 한 달의 기간이 걸립니다. 이 순례길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몇 년 전 개봉한 영화 를 한번 보시면 좋습니다. 배우 마틴 쉰(Martin Sheen)이 주연했는데,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조난당해 사망한 아들을 대신해 그 길을 완주하며 생전에 이해하지 못하고 다퉜던 아들을 이해하고, 또 잃어버린 자기 자신과도 만나 진실한 화해를 이루는, 한 아버지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 순례길을 다녀오신 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순례길 곳곳에는 '알베르게'(Alberge)라고 하는 이름의 숙소들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 가면 소박하지만 잠을 잘 수도 있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구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례자들은 처음에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들을 잔뜩 싸서 등에 지고 걷는다고 합니다. 나름대로 줄이고 줄여서 꼭 필요한 것들만 담는다고 했지만 어느새 가방은 묵직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몇 개의 알베르게를 거치면서 순례자들은 비로소 '버리는 법'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한 알베르게에서 다른 알베르게까지 오직 빵 두 쪽과 물 한 모금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버리고 비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우리의 인생길 역시 그렇게 버리고 비우는 길임을 깨닫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비우게 될까요? 우리가 순례를 떠난다면 우리는 그 길 위에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버리게 됩니다. (이주연 목사의 「산마루 서신」에서) 첫째로, 길들여진 습관에 대한 익숙함입니다. 둘째로, 과거의 업적에 대한 도취입니다. 셋째로, 이미 획득한 소유에 대한 집착입니다. 그리고 넷째로, 미래에 대한 불안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순례의 길 위에서 하나님의 미래에 적합한 새 사람으로 다시 창조되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의 시편 제120편에서 134편까지의 열다섯 편의 시편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등의 중요한 절기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는데 그 때 불렸던 노래입니다. 하지만 그 옛날 순례길은 결코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우리들에게 여행이란 자동차나 비행기를 이용하여 멋진 호텔에서 새로운 음식을 먹으며 잘 쉬는 것을 의미하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순례는 고행(苦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위해 그들은 걷고 또 걸어야 했습니다. 잠은 좁은 방에서 여럿이 칼잠을 자야 했습니다. 그것도 여의치 못하면 마구간에서 자거나, 심지어 길에서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청해야 했습니다. 그 옛날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을 잔 것처럼 말입니다. 참으로 고단하기 짝이 없는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두려워하며 걷기만 하는 순례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즐거움의 노래를 부르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오늘 우리 예배의 입례찬송처럼 "참 즐거운 노래를" 힘차게 부르며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이 '성전으로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열다섯 편 가운데 유명한 것은 시편 121편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1절). 순례자는 먼저 자신의 목적지가 높은 산 위에 있는 예루살렘임을 밝힙니다. 하지만 그 길이 순탄치 않음을 심히 염려합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사실 이는 우리가 인생길에서 가지는 염려와 같습니다. 불안과 근심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최선의 대책을 세웁니다. 재산을 모으고 종신보험, 실손보험 등 여러 가지 보험을 듭니다. 하지만 시편의 순례자는 우리와 조금 다른 대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2절입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우리는 우리의 지혜와 능력을 최대한 동원해 대책을 세우지만, 시편의 순례자는 '아닙니다. 나의 도움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라고 노래합니다. 참으로 깊은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이어서 시편의 순례자는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어떻게 주시는지를 노래합니다. 3-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우리는 길을 가다 헛발을 디뎌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는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5-6절입니다. "...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나의 '오른쪽'은 나의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 바로 그 나의 가장 듬직한 곳에서 하나님이 해와 달의 환난으로부터 나를 보호하시기 위해 그늘을 만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의 순례자는 이 아름다운 노래를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7-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시편 121편의 기자는 이렇게 우리의 인생이 순례의 길이며, 이 길은 위험이 가득한 길인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걸어가는 자는 반드시 안전하게 목적지에 다다를 것이라는 확신을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우리는 순례자입니다. 오늘 읽은 교독문처럼 우리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시편 39:12)입니다. 우리 모두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고"(시편 119:19), 실로 우리는 이 땅에서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베드로전서 2:11)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우리는 "본향 찾는 자," 즉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는 자(히브리서 11:14, 16)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순례를 멈추지 마십시오. 길 위를 걷는 것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순례는 신앙의 본질입니다. 아니 신앙 그 자체입니다.
물론 특정한 장소를 찾아가는 것만이 순례는 아닙니다. 김기석 목사(청파교회)의 말처럼 매일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에 도달하려는 갈망을 품고 산다면 우리는 그를 순례자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땅 위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거룩함을 향한 여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속된 세상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서에서 '거룩'은 무언가 '구별된 것,' 그리고 '성별(聖別)하여 드린 것'을 뜻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라고 했습니다. 이 시대의 풍조와 가치와 유행에 순응(順應)하지 않고 거기서 스스로를 구별하여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성별해 드리는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하는 거룩입니다. 그 삶이 바로 순례(巡禮)입니다. 우리는 그 순례를 통해, 즉 우리가 매일 먹고, 일하고, 사람들을 사귀고, 쉬고, 잠자는 모든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現存, presence)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종교적으로만 거룩한 삶이 아니라 온 삶을 거룩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날마다 떠나야 하는 신앙의 순례입니다. 조이스 럽(Joyce Rupp)은 "순례자의 기도"라는 기도시에서 이것을 잘 표현했습니다. "제 영혼의 보호자시여, 오늘 하루 길 가는 저를 인도하소서. 해를 당하지 않도록 지켜 주소서. 주님과, 주님의 땅과, 주님의 온 가족과 관계가 더욱 깊어지게 하소서. 제 안에 주님의 사랑이 강건하여져서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제가 주님의 평화의 임재가 되게 하소서. 아멘."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한국사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른바 '가나안 성도' 현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 너머의 교회'를 과감히 상상해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조그만 터전에 안주하려는 유혹을 이기십시오. 길들여진 습관의 익숙함을 버리십시오. 과거의 업적에 대한 도취에서 벗어나십시오. 이미 획득한 소유에 대한 집착을 떨구어 버리십시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리고 비우십시오. 교회생활 오래했다고 신앙 수업을 다 마친 것처럼 종교적 안일함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성경공부 좀 했다고 하나님의 신비를 다 아는 것처럼 우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순례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늘의 본향을 향하는 순례자들입니다.
그리고 나그네의 하나님이신 우리의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거룩한 새 생명의 길을 가는 길손들을 축복하십니다. 시편의 말씀처럼,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시편 84:5, 공동번역). 의심 많은 도마가 예수께서 가시는 길이 어떤 길인지 몰라 자신을 길을 갈 수 없다고 했을 때 주님은 "내가 곧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요한 14:6)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곧 길입니다. 그가 가는 길이 곧 새 생명의 길입니다. 그 길을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장막이나 성전에 정주(定住)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그네들과 함께 움직이는 하나님입니다. 이 순례자의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그네와 같은 여러분의 인생길 위에 동행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아멘. (2018.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