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욥기 34:29-30, 고린도전서 6:19-20, 요한복음 7:53-8:11 -
마더 테레사의 서거 10주기를 맞은 2007년에, 테레사 수녀가 자신의 고해신부에게 보낸 미공개 편지 약40통을 모아 엮은 한 권의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Come Be My Light, 우리말로는 『나의 빛이 되어라』로 번역되었는데 세상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인도 콜카타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평생 헌신한 '빈자의 성녀(聖女),' 그 공로로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하고 로마교황청으로부터 복자(福者)로 추대된 테레사 수녀가 평생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가지고 괴로워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노벨평화상 시상식장에서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 속, 우리가 만나는 가난한 사람들, 우리가 주고받는 웃음 속 등 모든 곳에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석 달 전 자신의 고해신부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내면의 괴로움을 토로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나 커서 예수님을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기도하려 해도 혀가 움직이지 않아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녀가 폐기되기를 원했던 이 40여 통의 편지 안에는 '어둠,' '외로움,' '고통'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마치 모든 게 죽은 것처럼, 내 안에 너무나 끔찍한 어둠이 있습니다.... 내 영혼에 왜 이렇게 많은 고통과 어둠이 있는지 말해주십시오." 과연 어느 무신론자의 평론대로 "테레사 수녀 역시 '종교가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임을 보여준" 것일까요? 아니면 신앙인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신앙 속의 어두움'(darkness within faith)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것과 용기 있게 맞서도록 격려한 것일까요?
사실 이러한 '신앙 속의 어두움'은 테레사 수녀가 처음 토로한 것은 아닙니다. 시편 22편의 기자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편 22:1). 시편 28편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시편 28:1). 테레사 수녀가 느꼈던 신의 침묵에 대한 고통은 드디어 시편 83편 기자의 입을 통해 울려 퍼집니다.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시편 83:1). 시편 109편의 기자도 이렇게 하늘을 향해 절규합니다.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시편 109:1).
지난 주일에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 감독의 영화 <사일런스 Silence>를 함께 보셨습니다. '영화와 함께 하는 주일 오후'의 첫 번째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일본의 대표적 소설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가 1966년에 출간한 소설 『침묵(沈默)』입니다. 이 소설로 그는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이모와 어머니의 권유로 열한 살에 세례를 받은 작가는 평생 그리스도교의 시각으로 동서양의 관계를 고찰한, 즉 '경계'를 사유한 문학인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존재하는가?'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외면하는가?' '의지가 박약해 종교적 신념을 지킬 수 없는 자들을 배교자라 비난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을 가지고 작가는 일본의 막부(幕府, 바쿠후) 시대 가톨릭 탄압의 현장으로 들어갑니다.
"로마 교황청에 한 가지 보고가 들어왔다. 포르투갈의 예수회에서 일본에 파견한 페레이라 크리스트반 신부가 나가사키(長崎)에서 '구멍 매달기' 고문을 받고 배교(背敎)를 맹세했다는 것이다. 이 페레이라 신부는 일본에 체류한지 33년이 되는데, 주교(主敎)라는 최고 중요한 직책에 있으면서 사제와 신도를 통솔해 온 성직자이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선교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페레이라와 같은 교회의 지도자가 교회를 배반했다는 사실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교황청은 페레이라의 배교라는 교회의 불명예를 씻기 위해 일본 잠복 선교 계획을 승인합니다.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 로드리고 신부 등 세 명의 신부는 자신들의 스승인 페레이라 신부가 눈부신 순교가 아니라 이교도 앞에서 개처럼 굴종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일본에 몰래 들어가 이 사건의 진상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자 합니다. 소설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작가 엔도 슈사쿠가 이 소설을 발표한 것은 1966년이었습니다. 그전 2년 동안 그는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적에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어머니의 권유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기독교에 관한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병에서 회복되자 우선은 '밝은 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나가사키 관광여행을 떠났습니다. 어느 초 여름날 저녁, 나가사키에 있는 오우라 성당에서 붐비는 관광객들을 피해 한 작은 목조건물에 들어갔을 때 그는 거기서 동판에 새겨진 '후미에'(踏み絵)와 만나게 됩니다. 후미에란 일본의 에도 시대에 에도 막부가 금지령을 내렸던 기독교 신자('기리시탄'이라고 함)을 색출해내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 혹은 거기에 사용했던 목조판 또는 금속제의 판을 말합니다. 작가가 본 후미에는 피에타 상 동판이었습니다. 즉 십자가에서 내려진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끌어안은 '슬픔의 성모' 상 동판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후미에를 보았던 것은 그 때가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생애 처음으로 동판을 둘러싼 나무 부분에 후미에를 밟았던 사람들의 발가락 자국을 보았습니다. 이후 길을 걸을 때나 일을 할 때 문득문득 그 발자국들이 마음속에 떠올랐습니다. '저 검은 발가락 자국을 남겼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자신이 믿는 것을 자신의 발로 밟았을 때 그들은 도대체 어떤 심정이었을까?'
다시 소설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고작 그림일 뿐이다. 밟아라." "한 번 밟는다고 믿음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밟아라." "살짝만 밟아도 된다. 그럼 풀어주마." "절하는 것보다 훨씬 쉽지 않느냐. 밟아라" "그저 형식일 뿐이다. 밟아라." 그리스도인임이 발각된 일본의 '기리시탄'들과 체포된 로드리고 신부는 이와 같은 끊임없는 회유와 협박에 시달립니다. "신부님,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화는 밟지 않습니다. 그것을 밟기보다는 이 발을 잘라 버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순교를 택한 신도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부님, 저희들은 나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우리에게 주십니까?"라고 원망하는 신도들도 있었습니다. 로드리고 신부에게는 이른바 이 '겁쟁이' 신도들의 한탄이 예리한 바늘이 되어 그의 영혼을 찌릅니다. 박해가 시작된 지 어언 20년, 어두운 일본 땅에 많은 신도들의 신음이 가득 차고 사제들의 붉은 피가 땅을 적시고 교회의 탑이 붕괴되어 갑니다. 그런데도 왜 하나님은 자신에게 바쳐진 이렇게도 참혹한 희생을 보면서도 아직 침묵하고 계시는 겁니까? "하나님, 나는 당신의 침묵의 무게가 두렵습니다. 저는 지금 허공에 기도하고 있습니까?" 로드리고 신부는 절규합니다.
그 때 페레이라 신부가 그 앞에 나타납니다. 한 때 존경하는 스승이었고 고해성사 신부였으나 지금은 배교자가 된 페레이라 신부가 그 앞에 나타납니다. 로드리고 신부가 후미에를 밟는 것을 거부할 때마다 신도들이 대신 죽어나가는 상황 앞에서 페레이라 신부는 이렇게 로드리고 신부를 설득합니다. "당신이 구할 수 있는 영혼만 생각하시오. 당신 앞에서 죽어간 이들은 신앙을 가지고 죽은 게 아니라 당신을 위해 죽은 겁니다. 당신이 그들에게 고통을 줄 권리가 어디 있습니까? 그 고통은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당신만이 끝낼 수 있습니다." 결국 로드리고 신부는 그 악명 높은 '구멍에 거꾸로 매달기' 고문 현장 앞에 섭니다. 페레이라 신부를 결국 굴복시키고 말았던 바로 그 고문입니다. 오물을 넣은 구멍 안에 몸을 묶어서 거꾸로 매답니다. 피가 머리로 역류하면 그 고통은 처음에는 완만하지만 서서히 극에 달하여 마지막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에 이릅니다. 의식은 혼란해지고, 고통에 못 이겨 몸은 벌레처럼 몸부림치게 됩니다. 이미 거기에는 순교의 영웅적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추한 고통과의 장시간의 투쟁만이 전개될 뿐입니다. 자신을 대신해 그렇게 죽어가는 신도들 앞에서 결국 로드리고 신부는 후미에를 밟기로 합니다. 소설의 클라이맥스 부분입니다.
"신부는 발을 들었다. 발이 저린 듯한 무거운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형식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작가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한 다음에도 닭이 울었음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을까요?
이제는 배교자의 신분으로 일본인 사형수 사와노라는 자의 이름을 받고 그의 처와 살도록 강요받은 로드리고 신부는 하루하루 한시도 쉼이 없는 철저한 감시 속에서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의 삶을 회상합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의 침묵과 싸웠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나도 네 곁에서 고통 받았다. 나는 침묵한 적이 없다." "저도 압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평생 침묵했어도 오늘까지 내게 한 모든 일들이 당신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그 침묵 속에서 당신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작가 엔도 슈사쿠는 그가 죽기 4년 전인 1992년에 『<침묵>의 소리』(동연, 2017)라는 제목의 책을 펴냅니다. 1966년 원작 『침묵』에서 자신의 의도는 '신이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소설의 제목 때문에 독자들이 '신은 침묵하고 있다'고 오독(誤讀)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원작의 배경과 내용을 설명한 책이었습니다.
소설 속에는 키치지로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살기 위해 끊임없이 배교하고 다시 돌아와 끊임없이 용서를 구하는 인간입니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면서 이 키치지로라는 인물에 자신을 가장 잘 투영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침묵』을 읽은 많은 독자들도 "키치지로는 저 자신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다고 합니다. 베드로도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혀 있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저가 위험한 곳인 줄 알면서도 그는 거기를 찾아갔지만 막상 주위로부터 추궁을 당하자 베드로는 신념을 버렸습니다. 작가는 이 베드로를 생각하며 키치지로를 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입니다. 도망갔지만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배반한다는 것은 나만의 체험이 아니라 인간 모두의 체험입니다." 작가는 '후미에의 발가락 자국'은 단지 신앙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보편적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신앙만이 아니라 인간은 육체적인 폭력에 의해 자신의 신념이나 사랑을 쉽사리 굽히기도 합니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이 기독교를 넘어서 보편적인 울림을 주는 이유는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이 겪은 박해보다 더한 박해를 받은 우리나라의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이렇게 넓고 깊은 울림을 주는 훌륭한 작품들이 많이 나오면 참 좋겠습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의 말씀(요한 7:53-8:11)은 언뜻 오늘의 설교주제와 쉽게 연결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성서학자들에 의해서 '음행하다 잡혀 온 여인이 용서 받다'라는 소제목이 붙여진 이 복음서의 이야기는 "너희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는 예수님의 유명한 말씀으로 종교를 떠나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성서에서 유일하게 '배교'(背敎, apostasy)의 문제와 연관된 본문입니다. 성경의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그 시작과 끝이 괄호나 꺽쇠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본래 요한복음의 원전에 있던 것은 아니라는 표시입니다. 원래 이 이야기는 「히브리복음서」나 「사도계율서」와 같은 외경(外經)에 들어 있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널리 사랑받고 읽혔던 이 책들은, 하지만 신약성경이 27권의 정경(正經)으로 정해질 때에 그 안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기독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박해가 끝나고 서기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종교로 격상될 때에 '배교자'의 문제가 대두하게 됩니다. 그 엄혹한 박해의 시절에 순교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배교한 사람들은 더 많았습니다. 살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십자가에 침을 뱉고 또 그것을 발로 밟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기독교 신앙이 합법화되자 그들이 다시 교회의 문을 두드리며 용서를 청한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교회는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근거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39권의 구약성서와 27권의 신약성서를 다 훑어보았지만 배교자를 어떻게 처리하라는 가르침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신약성경 27권 안에 들어오지 못한 「히브리복음서」나 「사도계율서」에 '간음한 여인을 용서한 예수님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알려졌고, 그 이야기는 배교자의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훌륭한 근거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배교는 일종의 교회에 대한 간음 행위와 같은 것이니까요. 그래서 지금의 요한복음 7장 52절과 8장 12절 사이에 이 이야기가 끼어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배교자들을 용서하고 또 품으려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은 있었습니다. 또 다시 배교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히브리복음서」와 「사도계율서」에서 이 이야기를 가지고 올 때 원문에는 없던 한 마디 말을 맨 끝에 추가해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이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는 마지막 문장입니다. 성서를 꼼꼼하게 읽는 분이라면 지금의 요한복음 8:11이 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셨을 겁니다. 그 여자를 돌려 치려던 폭도들이 다 물러가자 예수님이 묻습니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그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 여인에게 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이어서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고 말씀하신 걸까요? 앞뒤가 안 맞습니다. 「히브리복음서」나 「사도계율서」의 원문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로 끝납니다. 교회는 배교자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가지고 오면서 거기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 마디 추가해 넣었던 것입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이번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할테니 다시는 배교하지 말아라!'
예수님이 이 여자에게 무죄를 선언하셨다는 해석을 어색하게 느끼실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찌됐든 이 본문은 "음행하다가 잡혀 온 여인이 용서 받다"라는 소제목이 붙을 정도로 간음이라는 대죄(大罪)를 저지른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냐 하는 판단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2천 년 전 상황을 잘 모르고 하는 해석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서 간음을 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예수님 앞에 끌려왔습니다. 끌고 온 사람들이 묻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요한 8:5). 이래도 저래도 덫에 걸리는 교묘한 질문입니다. 쳐 죽이지 말라고 하면 모세의 법을 어기는 것이고, 쳐 죽이라고 하면 로마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한 예수님 자신의 메시지와 어긋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몸을 굽혀 땅바닥에 무언가를 쓰셨고, 사람들이 다그쳐 묻자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누구일까요? 창녀일까요? 막달라 마리아일까요? 바람난 여인일까요? 다 아닙니다.
구약성서 신명기 22장에는 이른바 '순결에 관한 모세의 법'이 나옵니다. 부정(不淨)을 저지른 사람들을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지, 네 가지의 유형이 나옵니다. 먼저 이미 결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정을 통했을 때에는 둘 다 교살형에 처하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여자라면 그 여자의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겔을 지불하고 아내로 삼으면 벌이 면제됐습니다. 그런데 약혼녀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셋째로, 약혼한 여자가 들에서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면 그 남자만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들에서는 여자가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여자는 무죄로 간주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넷째로, 만약 성 안에서 약혼한 여자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남자와 여자 둘 다를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 앞에 끌려와 돌에 맞기 직전인 이 여인은 이 네 유형 중 어디에 속할까요? 네 번째입니다. 누군가의 약혼녀로 성 안에서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 남자와 여자 둘 다 투석형에 처해야 하는데 남자는 어디다 풀어주고 이 여자만 끌고 온 것일까요? 그들은 이미 흥분한 폭도들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관심은 이 여자가 누구일까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 여자가 몇 살이나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약혼은 보통 여자 아이가 8-9세에 이루어졌습니다. 12-13세가 되어 초경(初經)을 하면 바로 결혼을 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앞에 끌려온 이 여자는 겨우 10살 전후의 여자 어린이입니다. 간음을 하기에는 이른 나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 본문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소제목이 붙여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음행하다 잡혀 온 여인이 용서받다'가 아니라 '성폭력을 당한 여자 어린이가 구원받다'로 되어야 합니다. 폭도들이 다 돌아가고 난 후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여자여(gune/lady),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예수님은 경칭을 사용하셨습니다. 오늘의 어감으로 바꾸어보면 '숙녀 아가씨, 무서운 아저씨들 다 어디 갔어요?' 정도가 됩니다. 두려움에 떨던 그 여자 어린이가 울먹이며 답합니다. "예수님,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우리 어린이, 아무 것도 잘못한 것이 없어요!' 예수님은 이 여자 아이에게 무죄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간음한 여인에 대한 용서'가 아니라 '무고한 자에 대한 정죄의 금지'가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2:7의 예수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소설 『침묵』에 대한 비판 가운데 페레이라 신부나 로드리고 신부가 배교한 것이 그들의 신앙이 깊지 못해서라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작가는 박해 시대의 그 참혹한 고문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과연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의 신앙이 깊다느니 얕다느니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얕은 것은 배교자들의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배교자들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의 사람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라고 말합니다. 작가는 순교를 신앙의 극치라고 가르치면서 박해를 견디는 것이 천국에 가기 위한 조건이라고 가르치는 종교는 가혹한 종교라고 비판합니다. 그런 종교는 강자들만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그런 종교의 신은 자신을 배신했다고 벌을 주는 무서운 신, 진노하는 신, 처벌하는 신입니다. 하지만 소설 『침묵』 속의 하나님은 자비의 신이었습니다. 소설 『침묵』 속의 기독교는 순교자들만의 신앙이 아니라 순교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의 신앙이기도 했습니다.
'신은 진정으로 존재하는가?'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존재하는가?'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외면하는가?' 신앙인들에게 이것은 두려울 정도로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이 질문과의 처절한 사투 끝에 로드리고 신부는 '침묵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한다. 밟는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다." 로드리고 신부는 결국 하나님의 자비와 존재를 깨닫습니다. 사실 성체란 훼손한다고 훼손되는 게 아닙니다. 거룩함은 짓밟는다고 더럽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절절한 고통이 고스란히 담긴 테레사 수녀의 편지들.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며 기도하려 해도 말이 나오지 않는"는 테레사 수녀의 그 끔찍한 고통이 담겨진 편지들, 생전에 비밀에 부쳐졌던 편지들, 그런데 그 편지들이 공개되자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자신은 요지부동의 확고한 신앙을 가졌다는 사람들보다 테레사 수녀와 동일한 질문을 가지고 고뇌하던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준 것입니다. 그렇게 테레사 수녀는 '신앙 속의 어두움' 속에서 내면의 처절한 고뇌를 통해 의심하는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따뜻한 위로자가 되었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내게는 왜 한 점 의심도 없는 신앙심이 없을까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계신지, 계신다면 왜 침묵하시는지 묻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점의 의심도 없이 완벽하게 믿는다고 자처하는 신앙은 자기 의로움과 위선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의심하고 고뇌한다는 것은 건강한 신앙인의 징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우 여러분,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도 내 곁에서 함께 고통 받고 있는 하나님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계속되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복된 신앙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2018.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