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왕기하 5:1-14, 디모데후서 3:14-17, 누가복음 4:16-30 -
자동차 사고를 당해 하늘나라로 가게 된 세 사람이 천국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친구나 가족이 당신을 애도하면서 당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소?" 첫 번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는 아주 유능한 사람이었으며 훌륭한 아버지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두 번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는 아주 좋은 아내였으며 아이들의 미래를 바꾸어 놓은 훌륭한 교사였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마지막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앗, 저 사람 움직인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언제가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가게 될 텐데,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으십니까? 그 사람 어떤 사람이었다고 그들에게 기억되길 원하십니까?
저는 오늘 아침,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라고 기억되고 있는 성서의 한 인물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직위보다도, 그 어떤 이름보다도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명칭을 받은 한 사람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오늘 읽은 구약성서 열왕기하 5장에는 나아만(Naaman)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시리아의 군사령관이었습니다. 당시의 시리아는 정치적, 군사적 강국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이 나라의 제2인자였고, 왕(벤하닷)이 아끼는 인물이었으며, 성서를 보니까 존경을 받는 한 용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만 나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에는 나병, 즉 한센병은 더 이상 불치의 병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것을 문둥병이라 하여 아주 흉측한 병으로 알았고, 치유가 불가능한 병이라 인식되었습니다.
나아만은 세상의 권세와 부귀영화를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건강을 잃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안타까웠고, 얼마나 간절히 낫기를 소원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농담으로 '나아만'이라고만 성서에 소개된 이 사람의 성(姓)은 필시 '다오'였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이름과 성을 합치면 이 사람의 전체 이름은 '나아만 다오'가 됩니다. '나아만 다오!' 그는 병만 낫는다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시중을 들고 있는 한 소녀가 엘리사(Elisha)라는 사람을 그에게 소개했습니다. 그 소녀는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 노예로 잡아온 아이였는데, "주인어른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한 예언자를 만나 보면 좋겠습니다. 그 분이라면 반드시 주인어른의 나병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모든 방법을 다 써본 나아만은, 이 말을 들은 즉시 여행허가를 받기 위해 자기 왕에게 보고합니다. 시리아의 왕은 나아만을 매우 아꼈기에 이를 흔쾌히 허락해줍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는 친서까지 내려주면서 나아만을 이스라엘로 보냅니다.
한 가닥 희망의 끈을 잡게 된 나아만은 엄청난 선물을 가지고 이스라엘로 내려옵니다. 성서를 보니 은 열 달란트, 금 육천 개, 옷 열 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왕의 친서를 이스라엘 왕에게 전달합니다. 이 편지에는, "나의 신하 나아만을 보내니 그의 병을 고쳐 주시오"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그 편지를 읽고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절규합니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신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이렇게 무턱대고 사람을 보내 나병을 고쳐달라고 하니, 이건 분명히 트집을 잡아 전쟁을 일으키려는 속셈이다." 정말로 난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엘리사가 들었습니다. 엘리사는 예언자(預言者)입니다. 히브리어로 '나비'라 불리는 예언자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짐작하여 말하는[豫言] 점쟁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예탁하고 있다가[預言] 왕 앞에 전달한 자입니다. 이 예언자 엘리사가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 나아만이라는 사람을 내게 보내 주시오.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그에게 알려주겠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군마와 병거를 이끌고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의 집 문 앞에 당도합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위풍당당했겠습니까. 약소국 이스라엘의 눈으로 볼 때에 이 모습이 사실 위협적이고 오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때 엘리사가 하는 행동을 좀 보십시오. 지금 자기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강대국 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군 최고사령관이 먼 길을 찾아와 자기 집 문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직접 나가 그를 정중하게 맞이하기는커녕 성서를 보니 엘리사는 자기 사환을 시켜 이렇게 단 한 마디를 전합니다.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시오." 이건 정말 대단한 외교적 결례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칫하면 자기 나라를 전쟁의 참화로 몰아갈 수도 있는, 아주 무책임하고 위험한 행동입니다. 당시 시리아가 어떤 나라입니까? 엘리사는 자기 나라의 왕과 백성을 불쌍히 여겨서라도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무서운 게 없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나아만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즉시 발길을 돌렸습니다. 무예가 출중한 자기 수하들을 보내 엘리사를 즉시 베어버리라 명령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는 화가 나 돌아서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적어도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나를 정중히 맞이하고, 그의 신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 위에 직접 안수하여, 나병을 고쳐 주어야 도리가 아닌가?"
이 말 안에 나아만이 내심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는지가 잘 드러납니다. 그는 엘리사에게 두 가지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자신을 정중히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강대국 군사령관의 행차에 걸맞은 화려한 환영식은 없어도 '적어도' 엘리사가 직접 나와 정중히 자신을 맞이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둘째로, 더욱 중요한 것은, '신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 위에 직접 안수(按手)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안수기도와 같은 특별한 종교적 제의를 원했던 것입니다.
안수기도란 기도하는 자가 기도 받는 자의 몸에 손을 얹든지 혹은 만지든지 하면서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 안수는 하나님의 '신적인 은혜의 전달'이라는 개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이른바 '영력이 뛰어난 목사'에게 안수기도를 받기 위해 신도들이 줄을 서기도 합니다. 그러다 종종 사고가 나기도 합니다. 언젠가는 한 목사님이 생후 31개월 된 자기 딸의 몸에 마귀가 붙어있어 안수기도를 해야 한다며 손바닥으로 가슴과 등을 마구 때려 숨지게 하기도 했지요.
나아만은 엘리사가 신의 치유의 은총을 전달할 수 있는, '영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 먼 길을 한 걸음에 달려 왔을 겁니다. 그래서 이 신통한 예언자가 자신의 상처 위에 직접 손을 얹고 그의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기도해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처방이 무엇이었습니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교우 여러분, 혹시 요단강에 가보셨습니까? 제가 성지순례를 간 적이 있었는데 큰 기대를 하고 요단강을 찾아갔다가 크게 실망한 적이 있습니다. 잘 아시지만 요단강은 만년설이 녹지 않는 해발 2,743미터의 헤르몬산에서 발원하여 갈릴리 호수를 거쳐 해발보다 396미터나 낮은 사해까지 이르는, 직선거리 약 100킬로미터의, 그리고 평균 폭이 약 30미터의 강입니다. 그런데 그게 말이 강이지, 가보니 조금 큰 개천입니다. 한강만 보고 살았던 저에게 요단강은 실개천이었습니다. 더구나 제가 갔던 지점은 물도 깨끗하지 않았고 몸을 담글 정도의 충분한 물도 흐르지 않았습니다.
이런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니요! 나아만이 화가 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까짓 걸 하라고 나를 여기까지 불렀단 말인가!' 발길은 돌렸지만 나아만은 분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그가 그대로 돌아갔다면 시리아는 곧바로 이스라엘을 침공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나아만에게는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부하가 하나 있었습니다. 역시 사람은 참모를 잘 두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장군님, 장군님은 병만 나으면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인데, 그 예언자가 이보다 더한 일을 하라고 했더라도 하시지 않았겠습니까? 몸이나 씻으라고 하는데, 밑져야 본전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한번 시키는 대로 해보시지요.' 듣고 보니 그랬습니다. 손해 볼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분을 참고 엘리사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었습니다. 일곱 번 씻었습니다. 그러자 성서를 보니 "그의 살결이 어린 아이의 살결처럼 새 살로 돌아와, 깨끗하게 낫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엘리사가 성서에서 어떻게 불렸는지 아십니까? 당대의 사람들이 그를 어떤 사람으로 부르고 기억하였는지 아십니까?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로 불렸습니다. 성서에서 '하나님의 사람'(Man of God)은 하나님의 택하여 쓰는 일꾼, 혹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자(使者)를 의미합니다. 사실 천사장 가브리엘(גַּבְרִיאֵל)도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성서에는 모두 72번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모세(역대하 30:16, 에스라 3:2), 다윗(느헤미야 12:24, 12:36), 하난(예레미야 35:4), 스마야(열왕기상 12:22, 역대하 11:2), 그리고 엘리야(열왕기상 17:24, 열왕기하 1:12)와 엘리사가 그렇게 불렸습니다. 그 중 엘리사가 압도적으로 많이 그렇게 불렸습니다(열왕기하).
요즘 우리나라에서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되고 있는 개신교 이단사이비 종파의 수장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신적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성서에서 하나님의 사람은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사는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특별한 사람이나 특별한 의식을 거치지 않으시고도 직접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빠졌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나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나아만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포기했습니다. '신을 대신하는 신적인 사람'인 양 행세하지 않았습니다. 안수기도라는 특별한 종교적 예식도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어떤 마법사가 나아만의 병을 맡았다면 그는 필시 값비싼 암소 수 십 마리를 잡아 전 왕실이 참여하는, 며칠 동안의 특별 제의를 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병이 나으면 나아만은 병이 나은 이유가 엘리사의 영적인 능력, 혹은 엘리사가 베푼 특별한 종교행사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나아만을 요단강으로 보냈습니다. 요단강은 작고 초라한 강입니다. 평범한 개천입니다. 요단강물도 그저 평범한 물입니다. 오색약수도, 유황 온천수도 아닙니다. 아무 약효도 없는 밋밋한 물입니다. 그 물에 그저 목욕이나 하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사는 평범한, 너무도 평범한 처방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너무도 평범해서 신의 임재나 신비한 효험을 기대할 수 없는, '처방 아닌 처방'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엘리사는 병을 고치는 능력은 특별한 영적 능력의 소유자나 아주 특별한 종교적 예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나아만에게 알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기적의 근원이, 은총의 발원지가 어디인지 깨달을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서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인 척 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빠져서 하나님이 드러나게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렸던 것입니다.
병을 고쳐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권은 그 분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위 브로커나 중개인을 통하지 않고서도 직접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중간에 서서 하나님과 병자 사이를 매개하는 사제들의 실력에 의존하지 않으십니다. 목사나 사제들의 학력이나 영력이나 기도에 의존하지 않으십니다. 이 분이 엘리사의 하나님입니다. 이 분이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급진적인 선언입니다. 열왕기하 5장의 이야기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신의 은혜를 독점하고 매점매석하려는 모든 종교에 대한 영원한 비판의 본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열왕기하 5장의 본문을 훗날 예수님께서 매우 중요하게 언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성서 누가복음 4장을 보시면,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안식일에 자신의 고향마을 나사렛의 한 회당(synagogue)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마을마다 회당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사람들은 여기에 모여 자신들의 조상이 체험한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듣곤 했습니다. 회당의 지도자가 회당에 모인 사람들 중 한 사람을 지목하면, 그 사람은 모세오경이나 예언서의 한 구절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몇 마디 이야기했습니다. 성서에 대한 일종의 주석이나 강론이었을 것입니다.
그 날 예수께서는 이사야 61장을 찾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실 이 본문은 사람들이 너무도 익히 알고 있던 내용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주신 희년(禧年)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이었기에 사람들은 이 약속이 언젠가는 반드시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이 본문을 읽고 또 읽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이사야 본문을 읽으신 다음에 이렇게 딱 한 마디의 강론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 이루어졌다." 이 말씀이 앞으로 언젠가 어떤 미래의 시점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바로 이루어졌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 사람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우리말로 바꾸면, '저 아이 김 씨 집 자식 아니여? 우리가 그 집안 내력과 식구들을 다 아는데, 거기서 무슨 특별한 것이 나오겠는가?'
자신의 말씀에 감탄하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조금은 화가 나신 것 같습니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는 그 두 가지 예화를 소개하십니다. 하나는 엘리야 시대에 3년 6개월이나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 한 이방인 과부를 도우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로 나아만의 이야기입니다. 엘리사 시대에 많은 나병환자들이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나병환자 중에는 단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이방인인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고침을 받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듣던 청중들이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예수님을 동네 밖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 밀쳐 떨어뜨려 죽이려 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말씀에 무슨 문제가 있었기에 청중들이 설교자를 죽이려할 만큼 화가 났던 것일까요?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자존심을 건드리셨습니다. 민족적 자존심을 건드리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의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만이 선민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을 매개로 세상에 구원과 은총을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세상을 잇는 특별한 사제요 은혜의 중개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뭐라구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하지 않고서도 이방인들에게도 은혜를 주신다구요? 청중은 예수님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이, 그리고 예수님이 한 결 같이 하신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특별한 사람이나, 어느 특별한 시간이나, 어떤 특별한 장소나, 혹은 어느 특별한 단체에 의존하지 않으시고 자유로이 섭리 가운데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의 독점 파기,' '은혜의 매점매석 파기'입니다. 물론 성직자는, 그리고 교회라는 조직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임재하심과 은혜주심의, 눈에 보이는 상징이고 도구입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은 아닙니다. 교회는 은총의 통로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은총을 독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증언하는 하나님은 우리와 직접 대면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나 목사나 제도나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통해 하나님에게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콘, 즉 성상이 곧 하나님은 아니듯이, 그것들도 하나님은 아닙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산은 물이 아니고, 물은 산이 아닙니다. "사람은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바르트). 이 세계 안에 있는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불완전한 것들이 절대화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이런 정신이, 바로 이런 얼이 살아 있어야 기독교가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어떤 종교 지도자를 신처럼 믿고 가산을 다 팔아 남태평양의 피지 섬에 수 백 명씩 이주하여 여권도 뺏기고 노예처럼 살아가는 그런 일들이 이 땅에서 더 이상 반복되지 않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강대국 시리아 제2인자의 병을 고친, 당대 최고의 종교지도자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이스라엘 왕의 신임까지 한 몸에 받아 '왕의 남자'도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병을 고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아만의 치유가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빠졌습니다. 하나님이 드러나도록 자신을 물러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까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가장 영예로운 이름으로 불리고 우리에게 기억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교우 여러분, 신약성서는 모세와 다윗과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은 큰 인물들에게만 붙이던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명칭을 우리 모두를 향해 붙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디모데전서 6:7-12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富)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이제는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성경도 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디모데후서 3:16-17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경애하는 대학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게 될 때, 우리의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들이 우리에 대해 뭐라 말하는 것을 듣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 아무개'였다고 기억되는 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필연적으로 누군가, 혹은 어떤 집단과 관계를 맺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누구의 사람이 되고, 또 어디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었다고 사람들 마음속에 남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묘지 비문에 '하나님의 사람 아무개'라고 기록되기를 바랍니다. 누구의 오른 팔, 어느 계보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평생 동안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한"(미가 6:8)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2018.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