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하나님은 영이시니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시편 46:7-11, 에베소서 2:14-18, 요한복음 4:3-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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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복음성가 가운데 '우물가의 여인처럼'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그 때 주님 하신 말씀, 내 샘에 와 생수를 마셔라. 오, 주님 채우소서. 나의 잔을 높이 듭니다. 하늘 양식 내게 채워주소서, 넘치도록 채워주소서."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유명한 '사마리아 여인'에 관한 노래입니다. 이 노래에 의하면 사마리아 여인은 '헛되고 헛된 것들을' 구한 여인입니다. 지금까지 이 여인에 대한 기존의 해석들도 이 여인은 "여러 남자를 바꿔 치운 방종한 여인"이고 "개인적인 애정에 목말라 하는 여인"입니다. 어떤 성서학자는 이 여인이 "오직 결혼 문제에만 관심이 쏠려 있는 대표적인 인물"(J.R. Hill)이라고 말했고, 다른 학자는 "죄가 있으며 혐오감을 느끼게 하며, 업신여김을 당할 만한 여인"(Gien Karssen)이라고 불렀습니다.

한국의 한 영화감독도 언젠가(2004년) <사마리아>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내용은 어른들과 원조교제를 하는 한 어린 소녀와 그 소녀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영화로 감독은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까지 수상했습니다. 그런데 왜 '원조교제' 이야기를 다룬 영화의 제목이 하필이면 '사마리아'였을까요? 팔레스타인의 사마리아 땅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을 이 한국인 영화감독의 머릿속에는 도대체 언제부터 '사마리아' 하면 성적 방종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랐을까요?

요한복음 4장의 본문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새 번역 성경으로 읽어나가겠습니다. 3절과 4절에 예수께서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기로 하셨다. 그렇게 하려면, 사마리아를 거쳐서(through) 가실 수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가나안'(Canaan)이라고도 불리는 팔레스타인 땅은 남부의 유대 땅, 중부의 사마리아 땅, 그리고 북부의 갈릴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남쪽 유대 땅에 계시다가 북쪽 갈릴리 땅으로 가시려고 합니다. 하지만 중부의 사마리아 땅을 거쳐서 갈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들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상종도 하지 않는 철천지 원수지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길을 가다 어떤 화를 당할지 몰랐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밖의 이방인 땅으로 우회하여 갈릴리로 가곤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하나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오시기 922년 전에 이 나라가 둘로 갈라졌습니다. 우리처럼 남북으로 분열됐습니다. 이유는 솔로몬 왕(B.C. 973-922)의 사치와 무리한 공역(公役)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지혜의 왕'으로 알려져 있는 솔로몬 왕은 사실 폭군이었습니다. 그는 나라의 안녕을 위해 이방나라들과 정략결혼을 일삼았는데, 그 결과 왕비는 7백 명이었고, 후궁은 3백 명이었습니다. 도합 1,000명의 부인과 살았습니다! 그 많은 부인들을 위해 임금은 많은 왕궁을 지었고 게다가 예루살렘 성전까지 지었습니다. 이를 위해 백성들에게 막대한 세금과 강제노역을 부과했습니다. 결국 그가 죽자 쿠데타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여로보암 장군이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10지파나 이끌고 나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수립하고 수도를 '사마리아'로 천도했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겨우 나머지 2지파를 가지고 예루살렘에 남아 남왕국 '유다'로 잔존했습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200년 동안이나 분단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주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Assyria) 제국에 패망합니다. 앗시리아는 이 땅을 '사마리아 주(州)'로 명명하고 인종혼합 정책을 실시합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의 아이들이 앗시리아에 보복전쟁을 하지 못하도록 아예 씨를 말리려 합니다. 메데와 페르시아 지역의 남자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사마리아 땅의 이스라엘 여인들과 강제로 혼인시킨 것입니다. 이때부터 남쪽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하기 시작했습니다. 혼혈이라고 천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들을 '창녀'라고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유다 왕국도 주전 587년에 바벨론 제국에 멸망하여 약 50년의 포로생활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지만, 성전을 재건할 때 사마리아 사람들을 완전히 배제했습니다. 새 나라의 건설에 아예 참여시키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이 때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체제에 대항하여 자신의 땅 세겜에 있는 그리심 산(Mt. Gerizim) 위에 자신들의 성전을 건축하고 모세5경만을 성서로 채택하는 유대교를 정착시켰습니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유대인들이 주전 135년에 사마리아를 침공하여 그리심 산 성전을 파괴하고 사마리아인들을 살육했습니다. 이와 같이 같은 조상을 가진 하나의 민족은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예수님 오실 때까지 반목하고 갈등하며 살았습니다.

다시 본문입니다. 예수께서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기로 하셨다. 그렇게 하려면, 사마리아를 거쳐서 가실 수밖에 없었다." 이 말씀을 들은 2천 년 전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이 이방 땅으로 우회하지 않고 '일부러' 그 위험한 사마리아 땅 안으로 들어가신다는 것을 금방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저자 요한은 도입부부터 팽팽한 긴장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5절과 6절입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Sy'char)라는 동네에 이르셨다. 이 동네는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곳이며 야곱의 우물이 거기에 있었다." 요한은 '야곱'이라는 이름을 두 번이나 언급합니다. 야곱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스라엘의 조상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으로 갈라지기 이전의 공동의 조상입니다. 수가라는 동네는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준 땅," 즉 세겜에서 가까운 곳이며 거기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곳은 이스라엘의 민족분열과 동족상잔의 역사에서 매우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길을 가시다가 피로하여 아무 동네에나 우연히 들어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에게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시간은 정오쯤이었습니다.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우물가에 나왔습니다. 이 여인이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운, 그래서 "헛되고 헛된 것들"을 구한 여인이라는 기존의 해석들은 이 여인이 물을 길으러 나온 시간을 그 근거로 듭니다. 보통 여인들은 이른 아침에 물을 길으러 나오는데 이 여인이 뜨거운 대낮에 홀로 물을 길으러 나왔다는 것은 그가 남의 눈을 피하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여자였을 거라는 추정입니다. 하지만 무리한 해석입니다. 집에 물이 떨어지면 몇 번이라도 우물가에 나와야 하지 아닐까요?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가서, 그 자리에는 예수님과 그 여자밖에 없었습니다. 그 옛날 공공의 장소에서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난, 매우 어색한 상황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답합니다.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9절) 말속에 가시가 박혀 있습니다. 낯선 남자에 대한 단순한 경계심 그 이상의 적대감이 느껴집니다. 이 여인의 답변을 영어로 읽어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How is it that you, a Jew, ask a drink of me, a woman of Samaria?" 단순하게 한 외간남자에 대한 경계심이 아닙니다. 어떻게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뻔뻔하게 물을 달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고 천대할 때는 언제고, 어디 와서 감시 물을 달라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분노와 적개심이 분명히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려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은사를 알고, 또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며,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10절). 하지만 모멸감에 떠는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사사건건 반박하기 시작합니다. 여인은 "선생님, [보아하니] 선생님에게는 두레박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떻게 나에게 생수를 구해 주시겠습니까?"(11절)라고 힐난합니다. 하지만 이내 속마음을 드러내고야 맙니다. "선생님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한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는 우리에게 이 우물을 주었고, 그와 그 자녀들과 그 가축까지, 다 이 우물의 물을 마셨습니다"(12절). 그녀는 "우리 조상 야곱"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한 사마리아인이 유대인 앞에서 '우리는 원래 같은 조상을 가진 한 민족 아니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은 힐난조지만, 말속에는 같은 민족으로 인정받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묻어나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13-14절). 그래도 여인은 아직 못 알아들었습니다. 민족의 원수를 만났으니 무슨 말을 해도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수님과의 대화를 잘라버립니다. "선생님, 그 [좋다는] 물을 나에게 주셔서, 내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게 해주십시오."

담벼락처럼 가로막힌 이 여인의 마음 앞에서 예수님은 갑자기 화제(話題)를 바꾸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너라"(16절). 요즘 같으면 이랬다간 논점 이탈이라고 비판받겠지만, 여인은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답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회심의 반격의 기회를 잡으셨습니다.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이 옳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제대로 말하였다"(18절). 이 구절은 이 여인이 도덕적으로 방종한 여인이라고 주장하는 기존의 해석들이 결정적 근거로 내세우는 구절입니다. 하긴 예수님의 말씀이니 이것보다 더 좋은 근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는 2천 년 전 상황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 옛날, 그 가난하고 척박한 시골 동네에서 이 여인은 '개인적인 애정'에 목말라 여러 남자와 살았던 여인이라기보다 '형사취수혼'(兄死取嫂婚, levirate marriage)의 희생자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형사취수혼, 즉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부양하던 풍습 말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부여 때 시행된 적이 있는데, 이 제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재산상속과 관련이 있습니다. 형이 죽으면 형의 재산을 그 부인이 못 가지고 나가게 하기 위해 시동생이 형수를 데리고 사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사랑하는 남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죽자 시동생과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불행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그 집안의 아들들이 계속해서 죽어나갔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지금 남편의 다섯 번째 동생과 살고 있지만 그 남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남편이 아니니 그 여인은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1세기 팔레스타인의 마릴린 먼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여성을 온전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 잔인한 가부장제의 희생자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뜬금없는' 남편에 대한 질문은 결국 여인의 마음 문을 열게 했습니다. 철옹성과 같이 닫혔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19절입니다.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tahev)이십니다."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모세가 말한 예언자 '타헤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 신명기 18:15). 타헤브는 메시아로서 '다시 오실 분'이고 '회복시키시는 분'인데, 다윗의 가문에서 오는 기름 부음 받은 왕이라기보다 모세와 같은 예언자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예언자 '타헤브'를 만난 것입니다. 고통과 절망의 삶 속에서 언젠가 오실 거라 굳게 믿던 메시아를 눈앞에서 만난 것입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그동안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묻고 또 물었던 질문을 예수님께 던집니다. 신약성서를 통틀어 인간이 예수님에게 드린 질문 가운데 그 시대의 문제와 아픔을 가장 핵심적으로 요약한 질문입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 위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20절).

여기서 '우리 조상'은 사마리아인들입니다. 그리고 '이 산'은 그리심 산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대항해서 사마리아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성전을 세운 그리심 산 말입니다. 하지만 '선생님네 사람들,' 즉 유대인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즉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지는 예배만이 유일하게 합법적이고 정당한 예배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이에 대해 무어라 하시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이 여인이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결코 "오직 결혼 문제에만 관심이 쏠려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살던 시대의 문제와 아픔을 깊이 공감하고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을 찾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무엇이었을까요? "여자여, 나의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 위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데서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다"(21절). 이중부정입니다. '이 산 위'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닙니다. 즉, 그리심 산 성전도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도 아닙니다. 사마리아인의 성전도 아니고, 유대인의 성전도 아닙니다. 둘 다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24절,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영(pneuma)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23절).

'하나님은 영(靈)이시다'라는 말씀이 무슨 말일까요? 사람들은 보통 '영'은 육신이나 물질이 아닌 것, 즉 정신(spirit)이나 혼령(ghost)을 생각합니다. 성경은 '프뉴마'(πνεύμα, Pneuma)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 말은 '바람,' '호흡,' '생명,' '영,'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은 바람처럼 자유하시다'로 읽힐 수가 있습니다. 여인의 질문은 유대인들의 주장처럼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 예배인가였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거기에 참여할 수 없는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민족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 편에 서 계신가 하는 것이 질문의 요지였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하나님은 영이시다'였습니다. '하나님은 바람과 같이 자유로운 분이시다'였습니다. 어느 특정한 장소나 체제에 묶여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붑니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막을 수도 없고 내 맘대로 통제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만 계시지 않고, 그렇다고 그리심 산 위에만 계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사이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은 사마리아인들의 삶과 아픔 그리고 고통 속에도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여인은 즉시 위로를 받았습니다. 평생을 고통 받아온 문제에서 비로소 놓임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벅찼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가 사람들에게 소리쳤습니다.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 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29절) 여기 이 여인의 말 중에서 "와서 보십시오"(Come and see)는 이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선교의 기본 패러다임이 된 말입니다. 사람들을 초대해서 '와서 보게' 하는 것이 오랫동안 선교의 기본방법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사마리아 여인의 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동네사람들이 와서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39절에, "그것은 그 여자가, 자기가 한 일을 예수께서 다 알아맞히셨다고 증언하였기 때문"이라고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여기서 이 여인이 예수님에 대해 '증언'했다는 요한복음의 표현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오직 세례요한과 사마리아 여인에게만 쓰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안에 생명이 있었는데,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절)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6-7절)고 했습니다. 바로 이 세례요한과 동격의 증언자가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으니 "그것은 그 여자가, 자기가 한 일을 예수께서 다 알아맞히셨다고 증언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서의 저자가 이렇게 높게 평가하는 인물을 왜 그동안 교회는 그렇게 천시했을까요?

이제 예수님을 와서 본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께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시기를 청하므로, 예수께서 이틀 동안 거기에 머무르셨다"(40절)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어디에 '머무시다'(to stay)는 표현은 '구원을 받다'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사마리아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 여인의 증언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민족이 분열된 지 900년, 강대국의 침략과 강제혼인과 동족상잔과 끝도 없이 이어진 증오의 역사 끝에 사마리아 전체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회복된 것입니다. 그 여인의 증언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네에서 양식을 사서 돌아온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는 남들이 하였는데, 너희가 수고의 결실에 참여하게 되었구나"(38절). '저주의 땅'이었던 사마리아를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의 근원지로 바꾼 이는 바로 사마리아 여인이었습니다. 신약성서학자 최영실 교수의 말처럼, 이 여인은 복음서를 통틀어 예수님과 가장 진지한 신학적 대화를 나눈 여인이었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광복 73주년이 다가옵니다. 우리에게 8.15는 광복(光復)의 영광이었지만 동시에 분단의 슬픔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70년이 넘게 남과 북은 동존상잔의 전쟁을 거쳐 오늘날까지 반목과 증오의 역사를 살았습니다. 하지만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선언>이 말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종'(에베소서 2:13-19)으로 이 땅에 오셔서, 분단과 갈등과 억압의 역사 속에서 평화와 화해와 해방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누가복음 4:18, 요한복음 14:27).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시고, 인간들 사이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해방시켜서 하나 되게 하시려고 고난을 받으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나 다시 부활하셨습니다(사도행전 10:36-40).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시면서 하나님이 그들을 자녀로 삼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5:9). 그러므로 같은 피를 나눈 한 겨레가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대립하고 있는 오늘의 이 현실을 극복하여 통일과 평화를 이루는 일은 한국교회에 내리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우리가 감당해야 할 선교적 사명(마태복음 5:23-25)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골로새서 3:15). 그러므로 분열된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메시아 앞에 내어놓고 간절히 그 해답을 구한 사마리아 여인처럼, 우리도 이 민족의 아픔과 상처를 주 앞에 내어놓고 평화와 치유와 통일을 위하여 일하는 평화의 사도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루시는 이 하나님(에베소서2:16) 안에서 남북이 각각의 사상과 이념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하나의 새로운 민족으로 거듭나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와 생명의 축복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2018.8.12.)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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