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한국연구재단이 8월 18일 서초문화예술회관에서 주최한 <인문학 콘서트>에서 이삼열 대화문화아카데미 이사장이 특별강연을 했다. 주제는 "평화의 인문학적 성찰: 평화체제의 실현은 가능한가?"였다. 강연의 요지는 '한반도 평화체제의 실현을 위해서는 성급한 통일논의를 보류하고, 평화협정과 함께 남북이 서로의 주권과 국호 영토를 존중하는 기본조약을 동서독처럼 체결하는 것이 필수조건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평화체제에 관해 남북 정부나 시민사회 간에 전개될 논의에서 참고하길 바란다. 원고는 2회로 나누어 연재한다.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이 북한의 참가로 남북대화의 계기를 만들면서 한반도 평화에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을 가져온 평화 올림픽이 되었다. 분단 70여 년 동안 남북 사이에는 평화를 위한 회합과 논의가 수없이 있었지만 이번처럼 정상 간의 신뢰 분위기 속에서 기적적인 합의와 진전을 가져온 적은 없었으며, 평화는 이제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며 우리 민족의 한결같은 꿈과 희망이 되었다.
평화는 누구나 바라며 누리고자하는 가치이며 목표이지만, 평화를 달성하는 길은 쉽지 않고, 그 방법이나 과정도 간단치 않다. 전쟁과 폭력, 갈등과 지배가 난무해온 세계 역사 속에서는 평화를 그리며, 꿈꾸는 일조차 소설이나 종교적 기원에서나 가능한 유토피아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핵무기와 대량 살상 무기가 산재하는 과학 기술시대에는 독일의 사상가 칼 프리드리히 폰 바이재커(Karl Friedrich von Weizsaecker)의 말처럼 "평화는 인류의 생존 조건"이 될 수밖에 없다. 평화가 깨어지면 인류의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핵무기까지 등장한 한반도에서 평화는 우리 민족의 생존 조건이 되는데, 어떻게 평화를 만들고 유지해갈 것인가에 대한 연구나 성찰은 너무나 빈약하고 무지하다. 학자들의 논의도 대부분 미국에 의존하는 한미동맹 강화에만 매달려 있으니, 근본적이며 자주적인 평화 연구와 논의는 무시되거나 소외되어 왔다.
한반도에서 평화가 지속적이며 항구적인 것이 되려면, 평화사상가 요한 갈퉁(Johan Galtung)의 주장처럼, 단순히 물리적 전쟁이나 폭력이 없는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뿐 아니라, 갈등과 모순, 억압과 차별 같은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까지 없애는 적극적 평화 (positive peace)가 구축되어야 하는데, 이 작업과 과정은 엄청난 개혁을 수반하는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이제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선포한 평화체제의 길을 헤쳐 나가려면, 평화의 개념과 방법에 대한 철학적 논의와 함께, 평화를 저해해온 반 평화적 현실과 구조에 대한 역사적 반성 등 심도 깊은 인문학적 성찰이 요구된다. 이 글이 한반도 평화의 인문학적 성찰에 한 기여가 되길 바란다.
1. 남북, 미북 정상회담과 한반도 평화
역사적인 4.27 남북 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은 70여 년 동안 얼어붙었던 한반도의 적대적 분단과 대결체제를 극복하고, 화해와 상생, 공동의 번영과 발전을 기약하는 평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천우신조의 기회를 만들어 냈다. 더구나 그 한 달반 뒤 싱가포르에서 열린 6.12 미북 정상회담과 싱가포르 선언은 6.25 전쟁이후 지금까지 정전상태의 적대관계를 유지했던 미국과 북한의 관계를 새로운 협력관계로 전환시키며, 남북한의 평화체제를 보장하겠다는 약속과 희망을 심어주기도 했다.
작년 말까지도 미국과 북한은 서로 핵단추를 자랑하며 선제공격과 보복타격으로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으름장을 놓으며 말싸움을 계속해, 4월 위기설이니, 9월 위기설이니 하면서 한반도 전쟁 분위기를 조장해 왔다. 북한은 6차 핵실험과 화성 16호 발사의 성공으로 핵무기를 실은 대륙간탄도탄(ICBM)을 미국 본토에까지 날려 보낼 수 있다는 실력을 과시해 보였으므로, 미국은 이제 자국의 안보를 위해 군사적 해법(military option)이냐 평화적 협상(negotiation)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미국은 북한의 핵시설 요지인 풍계리나 동창리 등 몇 곳을 선제공격을 통해 폭파하는 군사적 해법을 여러 가지로 검토했으나, 북한의 대응 전략이 만만치 않고, 한반도의 남북한 주민을 수십만 내지 수백만 희생시킬 수 있다는 위험부담 때문에 트럼프(Trump) 행정부는 군사적 해법은 협박용으로만 언급했을 뿐, 실제 적용은 할 수 없었다.
미국의 국가이익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은 트럼프 대통령은 부시(Bush), 오바마(Obama) 전 대통령이 유지해온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정책을 지속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제재(sanction)만 강화하며 북핵 개발을 관망하여 핵전쟁의 위기까지 초래한 정책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 정책을 포기하고 비용이 덜 드는 해결책을 선택하는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엄청난 비용과 희생이 따르는 군사적 해법을 저울질하면서도, 평화적 타협안을 선택한 트럼프 대통령의 실용주의적 결단은 한반도 평화와 세계평화에 커다란 공헌이었으며, 그대로 실천된다면 노벨상을 몇 번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위대한 업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과연 이 위대한 역사적 선언인 판문점 선언과 싱가포르 선언이 선언문 그대로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4.27 판문점 선언과 6.12 싱가포르 선언의 핵심적 내용은 놀랍게도 동일한 구조와 과제를 담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 발전시켜 화해와 공존, 공영의 새로운 협력관계를 만들자
둘째는 군사적 대결을 종식시키고, 긴장을 완화함으로 전쟁위험을 없애자
셋째는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맺음으로써 단계적 군축과 비핵화를 실현하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수립하자
한마디로 하자면 적대관계의 해소와 개선을 통해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비핵화는 평화체제를 만드는 프로세스에 포함시켰다. 싱가포르 선언이 미군 전사자 유골송환이라는 제4항을 따로 두었지만, 제3항까지의 내용은 판문점 선언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내용과 문장으로 되어있다. 양측 정상회담에 참여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고집스런 의지와 주장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싱가포르 선언에서는 미국의 주장과 원칙대로 '완전한 비핵화'(complete denuclearization) 정도가 아니라, '완전하며 검증가능하고 불가역적인 핵 폐기'(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가 선언문에 표현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런데 결과는 판문점 선언과 똑 같은 '완전한 비핵화'에 머물고 있다. 여기에 많은 추측과 비판이 오가고 있지만, 이 사실 하나를 놓고,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김정은의 일방적 승리였다느니, 트럼프의 완패, 혹은 트럼프가 김정은의 술수에 속아 넘어갔다는 등의 비난으로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반도에서 핵전쟁의 가능성을 없애고 평화체제를 실현시킬 수 있는 대전환의 토대와 틀을 만들었는데, 비핵화의 과정과 방법을 놓고 시비를 걸며 성패를 논하는 것은 마치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않으려는 편견과 독단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4.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절의 두 번 정상회담을 잇는 세 번째 남북정상 회담이었다. 2000년 6.15 선언과 2007년 10.4 선언에서도 한반도 평화를 향한 중대한 합의가 있었고, 1991년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채택한 '남북의 불가침과 화해협력을 위한 합의서'에서도 적대관계를 극복하고 평화적 공존과 협력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는 길이 열려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남북 양측의 신뢰와 실천 의지가 부족했고 정권이 바뀌면서 국회 비준이 안 된 합의서나 공동선언은 휴지장이 되고 말았다.
이번 판문점 선언이 이제까지 고위급 회담이나 정상회담이 합의한 선언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결정적 차이점과 비약적 발전은 제3항, 즉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여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자는데 있다. 남북관계 개선이나 긴장완화, 불가침 선언, 교류 협력은 이미 이전에 여러 번 반복해 언급했지만 평화협정을 통한 평화체제 수립까지 선언문에 담지는 못했다. 공고한 평화 상태를 만들자는 주장까지 하면서(91년 합의서) 미국의 동의를 얻지 못해, 북한이 주장한 평화 협정을 맺자는 주장을 못했다.
2000년 6.15 선언은 평화체제 문제를 다루지 않고 남북 연합, 연방제등 통일 방법에 치중한 선언문이었으며, 2007년 10.4 선언에는 "정전 상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자는데 인식을 같이 한다"고는 했지만 종전선언만 언급하고 평화협정을 거론하지 못했다. 미국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2018년 판문점 선언이 중요한 도약을 이룬 것은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하면서 미국이 "평화 협정을 통한 평화 체제"를 허락하는 대가적 협상을 통해 이루어진 성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필자는 80년대 중반부터 평화협정을 맺어야 평화체제의 구축이 시작되고 평화적 통일이 가능해진다고 주장해왔고, 평화협정 체결 후 안보와 신뢰가 확인되면 미군철수와 전작권 반환도 시행할 것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88년 통일과 평화선언'에 반영시켰다. 그 후 시민사회, 종교계의 평화운동은 군축과 평화협정 서명을 전개했고, 촛불시위에서는 한 목소리로 "싸드(THAAD) 반대, 평화 협정 체결"을 외쳤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외침은 정부정책에 반영되지 못했는데, 6.25 전쟁 이후 정전협정 65년 만에 남북정상이 처음 공식적으로 평화협정을 함께 주장한 것은 일대 전환이었다. 평화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과제와 프로세스를 정상들이 밝힌 것도 역사적인 일이었다.
이제 문제는 정상회담이 합의했다는 평화체제의 개념과 정의가 무엇이며 이를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를 밝히는 데 있다. 선언문의 영문 번역이 peace regime, 혹은 peace structure로 번역되고 있는데, 필자의 견해는 평화체제의 원뜻에 따라 peace system으로 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평화 체제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평화 상태나 지배구조가 아니라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과 원인을 아예 없애고, 증오와 갈등, 차별과 억압 같은 구조적 폭력을 제거함으로써 화해와 상생을 가능케 하는 사회구조와 평화의 문화가 정착되는 어려운 과정을 통해 구축될 수 있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2. 왜 평화 체제인가?
평화체제란 말은 아직 평화학이나 평화연구자들 사이에도 학술적으로나 이론적으로 개념이 명확히 규정된 용어는 아니다. 평화가 확실하게 보장되며 완전하게 실현될 수 있는 체제라는 뜻이지만, 어떤 조건이 얼마만큼 충족되어야 평화체제인가라는 데는 일치된 견해나 판단기준이 없다.
그러나 필자는 80년대 중반부터 강연이나 글을 통해 이 말을 운동개념으로 썼으며, 무엇보다 한반도의 적대적 분단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운동 목표로 평화체제를 내세웠다. 80년대 5공화국의 통일방안인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이나 6공화국의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에서 주장하는 평화정책은 평화정착이었다. 학자들의 논의도 평화정착론에 집중했다. 정부에서 평화정착 대신에 평화체제라는 용어를 쓴 것은 92년 말 유엔 가입 후 노태우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이 처음인 것으로 기억된다. 어떤 개념과 경로로 용어가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필자는 그 당시 근본적인 구조개혁이 없는 평화정착론을 비판하며 진정한 평화 실현을 위해서는 평화체제가 수립되어야 한다는 이론을 폈다. 『씨알의 소리』 1990년 5월호에 실린 "한반도의 평화체제와 군축의 방향"이라는 글에서 평화정착과 평화체제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 글은 같은 해 국토통일원 발간 『통일 연구』지에 재수록되었다.)
"정부가 내놓은 평화정착안은 진정코 평화를 실현하는 방안이라고 할 수 없다. 평화를 실현하는 방안은 한반도에서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길이다. 평화의 체제란 것은 전쟁과 폭력의 원인이 되는 공격성과 증오심, 무력의 대결을 없애야 할 뿐 아니라,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고, 평등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수립해야 이뤄지는 것이다.
남북이 불가침 조약을 맺고 상호 인정하며 유엔에 동시 가입을 하는 것은 현상을 안정화(stabilize)시키는 데는 도움이 된다. 이산가족이 오가고, 경제협력과 학술교류가 이뤄진다면 한반도에서는 평화정착이 이뤄졌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평화는 아니며, 평화의 체제에서는 더욱이 멀다. 남한에서는 계속 미군이 주둔하고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고, 한미합동 군사훈련이 북한을 적으로 놓고 대대적으로 행해지며, 북한에선 조소 합동작전과 대남작전이 입체적으로 진행되는 현실은 반평화적 분단과 대립의 지속이며, 평화의 실현이 아닌 위장 평화의 정착일 뿐이다. 무력대결의 폐기와 군비의 감축이 없는 평화정착은 전쟁상태나 냉전의 지속일 뿐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평화학자 디터 셍가스(Dieter Senghaas)는 전쟁 준비와 핵무기 경쟁을 계속하고 있는 유럽의 동서 냉전체제를 70년대 당시에 위협체제(Droh System)라고 불렀고, 평화체제라는 용어는 쓰지 않았지만, 필자는 이 개념을 한반도에 적용하여 위협체제의 대안으로 평화체제(Friedens System)라는 용어를 써보았다.
1991년 고위급 회담을 통해 성사된 "남북의 화해와 불가침 교류 협력 합의서"는 어느 정도 평화정착을 이루는 데는 기여했다. 상호인정과 교류협력이 제한적으로나마 시행되었고, 비핵화 선언과 남북한이 UN에 동시 가입해서 전쟁 위험이 줄어들었으므로 평화 정착의 길은 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쟁상태를 종식시키는 군축이나 평화체제를 합의하지 못하고 적대적 군사 훈련과 무기경쟁을 지속시키는 정전체제로는 평화가 실현될 수 없었으며, 전쟁위협과 공포, 안보의 불안과 긴장의 격화 속에서 살아야 했다. 92년 유엔 동시 가입 후에도 남한은 중국, 소련과 국교를 맺었으나, 북한은 미국, 일본과의 국교승인을 거부당했고, 소련 공산권의 붕괴와 해체로 경제원조와 시장을 잃은 북한이 극도의 경제적 고통을 당하게 되자, 체제의 몰락을 막기 위해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무릅쓰며, 핵개발에 나서게 되었다. 평화체제의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93년에 북한은 핵확산 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한다.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국제적으로도 남한과 도저히 경쟁할 수 없다고 판단한 북한은 핵무기를 갖는 것만이 유일한 체제 보장의 길이라고 믿고 전력투구하게 된다.
핵시설을 폭격하는 외과적 수술론과 서울 불바다론으로 다시 전쟁 위기에 치닫게 되자, 94년에 지미 카터(Jimmy Carter) 전 대통령이 급히 방북해서 김영삼, 김일성 양 정상의 회담을 주선하지만, 김일성 주석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무산되고, 후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선군정치를 실시하며 핵무기와 미사일 실험을 강화하게 된다. 평화 체제의 보장 없이 북한은 남한의 흡수통일이 두려워 핵무기와 더 멀리 가는 미사일 개발에 매달리고, 남한은 북한의 남침과 공산화 통일을 막으려 한미군사훈련과 전략 무력의 강화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하려는 94년의 제네바 회담이 경수로 제공을 조건으로 합의(agreed framework)를 만들어내지만, 작업은 부진했고 부시정권의 "악의 축"(axis of evil) 규정으로 북한이 2002년에 고농축 우라늄(HEU) 추출을 재개하자 실패하고 말았다. 다시금 6자회담을 통해 2005년 9.19 성명으로 포괄적, 단계적 해결이 되는 듯 했는데, 마카오 은행 (Banko delta Asien)에서 북한이 달라를 불법 유출했다는 이유로 미국이 대북 금융제재를 실시함으로써 파기되고 말았으며, 드디어 북한은 2006년 10월에 첫 핵폭탄 실험을 강행하게 된다.
핵개발과 장거리 로켓발사를 막기 위해 미국 부시 정부와 북한의 협상은 계속되었고, 한때 (2008년 6월) 북한이 5MW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하는 등 비핵화의 시늉을 보였으나, 합의는 깨어지고 약속은 파기되어 경제제재를 수없이 당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북한은 핵무기와 대륙간탄도 미사일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북한으로서는 평화협정 제안이 거부당하고, 평화체제의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2001년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몰아치고, 북한 붕괴론과 참수작전 등 군사적 대결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핵무기를 완성하지 못하면 파멸의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정전상태를 계속하며 군비경쟁을 강화하는 반 평화적 대결과 적대적 분단체제 속에서는 결코 안정된 평화가 올 수 없으며, 평화 협정으로 전쟁을 종식시키고, 적대관계를 공존과 협력 관계로 전환해 증오와 갈등이 없는 평화체제를 구축해야만 참 평화가 올 수 있고 통일의 길도 열릴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