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믿음의 발자취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이사야 60:1-3, 디모데전서 3:14-16, 요한복음 17: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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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오늘은 우리 대학교회가 창립된 지 8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화 대학교회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특별한 교회입니다. 그 특별한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하 양현혜 지음, 『빛과 소망의 숨결을 찾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교회 70년사(1935년-2005년)』[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5]를 참조함.)

대학교회는 처음에 연합교회로 출발했습니다. 이화여전과 연희전문의 대표들이 모여 두 학교가 하나 되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종교 교육상 좋겠다는 합의에 따라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대학교회의 본래 이름은 '힘을 모아 일을 이룬다'는 뜻의 협성교회(協成敎會, Union Church)입니다. 최초의 담임목사는 당시 연희전문 교목이었던 장석영 목사였습니다. 장 목사의 회고입니다. "1935년 9월의 마지막 주일 새로 건축된 이대 에머슨 홀[지금의 중강당]에서 양 대학의 교장, 교수, 직원, 학생들과 가족들 그리고 기타 인사들 수백 명이 모여 대학 연합교회 예배를 성대히 거행했다." 1894년 태어난 장 목사는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에게 교육을 받으며 민족의식에 눈 떴고, 보성중학을 졸업한 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이후 미국의 유니온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연희전문의 교수 겸 교목으로 있다가 대학교회를 맡게 되었습니다. 일제 말기에 그는 조선총독부 학무부에 의해 불온사상의 선동자요 배일(排日)교육의 지도자라는 낙인이 찍혀 연희전문 교수직에서 해임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해방 후에는 미군정 최고고문관으로 활동했고,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을 창설하여 초대 학장이 되었으며, YMCA 총무로도 활동하다가, 마지막에는 이화여대 교수 및 교목으로 봉사하셨습니다. 장석영 목사는 늘 설교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그의 신령한 도를 애모(愛慕)할 것, 그리고 진리에 순종하여 심령을 깨끗하게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협성교회가 만들어지고 대학교회로서 예배공동체를 꾸려가고 있을 때 조선에서는 신사참배가 강요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일제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총독부는 거의 광란에 가까운 탄압정책을 실시했습니다. 학생들은 후방 전투대나 근로대로 동원되었기 때문에 학교는 정상적인 수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제는 심지어 모든 종교교육과 예배도 금지시켰습니다. 결국 협성교회는 1942년 12월 마지막 예배를 끝으로 폐쇄되고 맙니다. 탄생한 지 7년 만입니다. 당시 일제의 기독교 탄압은 유별났습니다. 학교 건물에 부조(浮彫)된 십자가가 눈에 거슬린다고 새벽에 일본군을 동원해 본관 건물 지붕 머리에 새겨진 십자가를 쪼아 파괴했습니다. 교정에 심은 무궁화나무가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고 뿌리째 뽑아버렸습니다. 기숙사를 수색하여 찬송가와 성경책을 압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화'라는 이름이 너무 민족적이라면서 교명을 '경성여자전문학교'로 강제 변경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이화의 학생들은 신앙의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공식적인 교회의 모임은 폐지되었으나 특히 기숙사생들을 중심으로 정기적인 예배와 비밀 기도모임을 꾸려갔습니다. 결국 학생들의 이런 신앙 열정의 힘으로 해방이 된 이후 1946년 10월 22일에 협성교회가 다시 문을 열 수 있었습니다. 협성교회의 두 번째 담임목사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인 이환신 목사였습니다. 청빈한 현대 한국적 선비로 기억되는 이환신 목사는 특별히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일상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설교했습니다.

하지만 교회 재건의 기쁨도 잠시, 6.25 전쟁의 발발로 대학교회는 다시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1950년 6월 27일, 전쟁 이틀 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이화는 즉시 휴교조치를 취하고 기숙사생 전원을 고향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1.4 후퇴 때 기나긴 피난민의 행렬에 끼어 대구와 부산으로 남하했습니다. 당시 문교부는 피난지 수도 부산에서 '전시하교육특별조치요강'이라는 것을 발표했습니다. 서울에 있던 학교들이 피난지에서 단독으로 개교하는 것이 어려우자 전시연합대학을 열도록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화는 본교생의 교육을 직접 담당하려는 마음으로 단독개교를 했습니다. 이에 따라 대학교회도 1951년 11월에 부산에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피난시절의 대학교회는 '천막교회'였습니다. 전기와 수도 그리고 난방이 잘 되지 않는 허름한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화의 교수들과 학생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특별예배와 같은 절기예배를 더욱 정성껏 드렸습니다. 그리고 주일학교는 결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대학교회는 부산 피난시절 이화 신앙생활의 중심축이었습니다. 이 시절에 특기할 일은 대학교회가 처음으로 「주보」를 편찬한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첫 주보는 1952년 3월 16일에 발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주보」를 보시면 대학교회 명칭이 더 이상 '협성교회'가 아니라 '대학교회'로 사용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이유는 피난지에서 이화는 단독개교를 하였지만 연세는 '전시연합대학'에 참여함으로써 양교의 협력으로 운영되던 '협성교회' 체제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1951년 11월 이래 대학교회는 이화만의 대학교회로 운영되게 되었습니다. 힘겨웠던 부산 피난시절에 대학교회 살림을 맡아 1958년까지 섬긴 이는 김종필 목사였습니다. 그는 이화여대 교목 겸 교수로서 처음으로 대학교회의 담임목사를 맡았습니다. 김종필 목사는 설교 때마다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뜻 없이 교회에 출입하는 습관적인 신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려는 노력 속에서 믿음이 성장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곤 했습니다.

1953년 7월, 휴전과 함께 이화도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돌아와 보니 많은 학교 건물이 파괴되어 교사(校舍)의 재건이 시급했습니다. 당장 필요한 것은 채플을 드릴 수 있는 건물과 체육관, 그리고 학생식당과 기숙사 등이었습니다. 온 힘을 모아 학교를 재건한 끝에 1956년 이화의 랜드마크인 대강당이 완공되었습니다. 그 해는 이화창립 7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였습니다. 전쟁 후 모든 것이 부족하기만 하던 시절, 이화의 지도자들은 채플을 드릴 수 있는 대강당을 한국 최대가 아니라 동양 최대 규모로 지었습니다. 대강당의 봉헌식에는 대통령도 참석하여 축사를 했습니다. 이후 대학교회는 기념예배나 졸업예배 등 특별한 행사가 있을 경우 대강당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서울로 올라온 후 대학교회는 틀을 정비하고 착실히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본격적으로 아동부를 중심으로 주일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합니다. 또 성가대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대학교회가 얼마나 성가대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는가 하면 성가대원들을 위해 주일날 학교버스를 따로 운행할 정도였습니다. 1953년의 한 주보를 보니 당시 학교버스는 주일아침 9시 10분에 동대문에서 출발하여 신설동-혜화동-종로2가-남대문-시청앞-광화문-서대문-굴레방다리를 거쳐 학교로 성가대원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주일학교와 성가대에 이어 가장 중요한 일은 1957년에 장년부 성경공부반을 조직하여 교회의 새로운 동력을 만든 것입니다. 장년부 성경공부반의 강사는 김활란 장로를 비롯하여 장석영 목사, 현영학 교수 등이 수고했습니다. 당시 한국교회에서는 '남성은 말씀을 전하고 여성은 봉사한다'는 성역할분담이 관행처럼 지배하고 있었는데 여성인 김활란 장로가 설교를 하고 성경공부를 지도하는 일은 오직 대학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조찬선 목사가 부임하여 1964년까지 대학교회를 담임했습니다.

1960년대는 대학교회가 자신의 역사 속에서 가장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쳤던 시기입니다. 장년부 성경공부반은 그 햇수를 거듭하면서 피폐해진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더욱 불태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열정을 실천하기 위해 먼저 이대 근처에서 가가호호를 방문하는 축호(逐戶)전도를 실시했습니다. 김활란 장로가 앞장섰습니다. 사실 이 지역에서 김활란 총장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가 직접 대문을 열고 들어가 집회에 참석할 것을 권유하면 거부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결과로 인근 대신교회와 신현교회가 크게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장년부 성경공부반은 보다 체계적인 전도를 위해 '금란전도협회'를 결성했고 이것이 후에 '다락방전도협회'를 세워 이화 선교의 새 역사를 만들어 가게 됩니다. 금란전도협회의 집중적인 전도에 힘입어 1961년에 대신교회와 금란교회가 성전을 봉헌하게 됩니다. (이 중 금란교회는 오늘날 10만이 모이는,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감리교회가 되었습니다.) 1960년대의 대학교회 선교에서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파키스탄에 선교사를 파송한 일이었습니다. 이는 한국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해외선교사 파견입니다. 서구교회로부터 복음을 받은 지 겨우 80년 만에 그 사랑의 빚을 갚은 놀라운 역사가 우리교회를 통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때 이화가 파송한 선교사가 전재옥, 조성자, 김은자 교수입니다. 1960년대에는 대학교회의 명물인 부활절 새벽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부활절 새벽예배는 기독교학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대강당 앞 49계단에 모여 대학교회 성가대와 함께 찬양을 드리고 예배를 드렸는데, 새벽안개가 낀 날이면 그 모습이 마치 천사들과 같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부활절 새벽예배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학교회가 착실한 내적 성장과 활발한 외적 선교를 펼치던 1960년대에는 마경일 목사와 한준석 목사가 담임목사를 맡았습니다. 두 분 다 이화여대 교목이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공동기도문은 마경일 목사가 담임하던 시절 대학교회 「주보」에 실렸던 기도문입니다. 한 주일에 한 시간 드리는 예배이지만 그것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한준석 목사는 구약성서신학 전공자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이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설교를 많이 남겼습니다.

1970년대는 대학교회의 역사에서 또 다른 시련의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는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을 공포하고 절대 권력을 영구화하려던 때였습니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침묵했지만 대학교회는 깊은 고뇌 속에서 시대의 위기에 어떻게 신앙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지 모색했습니다. 대학교회 「주보」에는 김지하 시인의 시가 실리기 시작했습니다. 1974년 12월 15일에는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한 동아일보 보도입니다. "이화여대 교수, 학생 및 일반신도 150여 명은 15일 오전 11시경 대학교회에서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를 갖고 구속자의 조속한 석방과 공정한 재판이 진행되기를 기도했다." 1975년 들어 정부가 독재에 항거하는 동아일보에 광고 게재 금지조치를 내리자, 대학교회는 1975년 2월 3일 월요일자 동아일보 제4면에 이화여자대학교 대학교회의 이름으로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라는 고린도전서 1:27의 말씀을 게재하며 대학교회가 모금한 성금을 동아일보사에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김흥호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했습니다. 그 시절에 대한 김 목사의 회고입니다. "[나는] 한 달에 한 번만 성서 강해 설교를 하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을 청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강사에게 강사료를 지불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나 초청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돈을 받지 않을 사람을 초청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내 친구인 안병무 박사에게 돈을 받지 않고 한 달에 한 번씩 반년 동안을 부탁하였더니 쾌히 승낙하였다." 김흥호 목사는 김동길 교수와 현영학 교수에게도 같은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의 회고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대학교회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은 박정희 정권에서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대학교회의 강사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안병무 선생은 그들이 [정말]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주일마다 정보부, 보안부, 경찰국, 서대문경찰서, 이화주재 파출소에서 7, 8명씩 나와 맨 앞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나오지 말라고 하였으나 그들은 계속 나왔다." 그렇게 시달리던 김 목사는 뜻밖에 이렇게 자신의 회고를 마무리합니다. "[그런데] 대학교회가 반체제 교회가 된 이후 교인들이 그것도 젊은 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맡을 때 175명이었던 교인수가 반년이 지나갈 때는 3-4백 명이 넘어서고 일 년 후에는 4-5백 명이 넘어서 내가 그만 둘 때는 1,450명 정도로 늘어나게 되었다." 교회가 오히려 부흥한 것입니다. 김흥호 목사는 대학의 문이 닫히고 지성의 소리가 끊길 때 이화를 지키고 있는 것은 대학교회였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김흥호 목사는 기독교 목사이면서도 유불선(儒佛仙)을 꿰뚫는 사상과 앞날을 내다보는 예언자적 풍모로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켰습니다. 그의 설교는 동양철학의 눈으로 기독교를 해석하고 또 기독교의 눈으로 동양철학을 바라봄으로써 인간 존재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 신앙의 성숙으로 이끌어간 명설교자였습니다.

김흥호 목사를 뒤이어 1985년에 박원기 목사가 부임했습니다. 박원기 목사는 대학교회에 대한 독특한 시각과 바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학교회가 지성공동체 안에 있는 교회이기에 신앙과 이성이 조화될 수 있는 목회를 해야 하며, 또한 다른 교회가 갖지 못한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을 살려 감성과 지성이 균형 있게 성장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한국교회에 기여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박원기 목사는 상대적으로 대학교회에 친교와 공동체성이 약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교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려 애썼고 대학교회가 자율적인 평신도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박원기 목사가 이임하고 1988년에 서광선 목사가 새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서광선 목사는 대학교회가 한국교회에 기여할 수 있는 특별한 3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첫째는 대학교회가 초교파적 교회이면서 동시에 세계적인 선교를 지향한다는 점, 둘째는 평신도 중심의 교회라는 점, 그리고 셋째는 교육적이고 실험적인 교회라는 점입니다. 서광선 목사는 대학교회가 이 세 가지 가능성을 잘 살려 한국교회에 새로운 신앙공동체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이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1990년대 들어서 대학교회에서 주목할 일은 교회건축을 위한 계획이 수립되고 이것이 실행에 옮겨진 것입니다. 사실 대학교회 만의 고유한 공간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1963년 김활란 장로 시절부터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재정부족이라는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중강당과 대강당에서 예배드리던 시절에 아동부와 중고등부는 학교 이곳저곳에 흩어져 예배를 드려야 했고 이들을 돌보던 선생님들의 고충은 매우 컸습니다. 따라서 대학교회의 독자적인 건물을 확보해야 할 필요성은 오래 전부터 제기되었고, 교인들은 정성스럽게 건축 헌금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건축을 시작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주식회사 '영안모자'의 백성학 회장이 교회 건축비를 희사할 용의가 있다는 뜻이 전해져 1994년 윤후정 총장이 백 회장을 학교에 초대함으로써 대학교회 건축안이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임에 정의숙 이사장이 함께 했습니다. 드디어 2000년의 5월 31일, 이화창립 114주년을 기념하는 날에 이 대학교회 건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봉헌예배가 거행되었습니다. 대학교회가 생긴 지 65년 만의 일입니다.

대학교회 건물은 신학적으로나 예술적으로 특별합니다. 건축의 핵심적 공간 이미지는 '세상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예배당 건물을 지층으로부터 상부로 떠 있는 형상으로 구현했습니다. 저층부 기단은 세상에 속해 있지만 상부의 구조는 속세에 속하지 않으려고 부유(浮游)하는 이미지로 형상화했습니다. 이 이미지는 오늘 읽은 요한복음 말씀과 상통합니다. 주님은 그 유명한 '고별기도'에서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한 17:15-17). 그런데 땅 위에 서 있는 이 건물을 하늘로 끌어올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건물을 매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철골 십자가입니다. 건물 위 상부에 아주 불규칙하게 얽혀 있는 철골 구조물을 보셨을 줄 압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과 가시 면류관을 상징합니다. 대학교회 건물은 가시면류관 십자가가 하늘로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 힘으로 우리를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모습이 형상화된 것입니다. 밤이 되면 여기에 밝은 빛을 비추어 가시면류관 십자가는 부활의 상징이 됩니다. 이렇게 신학적으로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대학교회는 이화동산 안에서 대강당과 더불어 이화의 기독교 정신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곳 대학교회는 교우들과 이화인들이 자신과 이화 그리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묻는 곳이고, 그 물음에 친히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이화 안의 지성소(至聖所)와 같은 곳입니다. 이 특별한 건물은 지금은 고인이 된 이화여대 미술대학의 김길홍 교수가 자신의 신앙과 예술혼을 쏟아 부은 것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편의점과 수많은 중국집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수의 교회가 있습니다. 무려 8만 개가 넘는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합니다. 그 많고 많은 교회 중에 이화여자대학교 대학교회는 어떤 존재일까요? 한국 최초의 해외선교사로 파키스탄에 파송되었던 고 전재옥 교우는 이렇게 말합니다. "대학교회는 교단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교인들의 교파 의식이 없고, 어떠한 신학 노선을 이야기해도 편견 없이 다 소화해낼 수 있으며, 여성들이 강단에 서서 설교할 수 있고, 목사가 아닌 평신도도 설교할 수 있는 열린 교회이며, 집사나 장로와 같은 조직 체계가 없이 위원회만 있는 것도 특이한 점인데, [그럼에도] 대학교회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달라지지 않는 것은 삶을 정화시키는 가르침과 배움이 행해지는 곳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실로 이화대학교회는 초교파적인 독립교회입니다. 1953년 부산 피난시절에 감리교단 소속 교회가 된 적이 있으나 1975년에 거기서 탈퇴하여 오늘까지 독립교회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많은 한국교회와 달리 대학교회는 교육과 선교 그리고 사회봉사에 전체 재정의 60% 이상을 쓰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무엇보다도 대학교회는 여성이 평등한 교회입니다. 1935년 그 시작부터 대학교회에서는 여성이 말씀을 전했고 성경공부를 인도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여성도 남성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고귀한 존재임을 자긍하고 이러한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여성 지도자 양성에 힘쓰는 이화여자대학교 울타리 안에 대학교회가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나아가 대학교회는 탈권위주의적인 평신도 공동체입니다. 우리교회에는 직분이 없고 평신도들이 일정한 임기로 봉사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담임목사도 임기가 있어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고 목회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이 나라의 그 많은 교회 가운데 대학교회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 대학교회가 일반교회와 달리 예배를 중심으로 하는 제한된 기능을 하는 특수교회라 말합니다. 무언가 결여된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대학교회는 이 땅의 교회들이 가야할 미래를 미리 보여준 하나님의 교회의 모범이고 전형(典型, archetype)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학교회는 한국교회의 미래입니다. 성장주의와 기복신앙 그리고 배타주의와 분열주의로 무너지며 스스로 개혁할 힘을 잃어버린 오늘의 한국교회가 새로 가야 할 길을 우리 대학교회는 지난 83년 동안 묵묵히 걸었습니다. 대학교회의 역사는 그래서 한국교회의 '오래된 미래'입니다. 교우님들은 그런 자부심을 가지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난 83년 동안 남다른 열정과 믿음으로 대학교회를 지켜온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있었기에 가능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창립 83주년 기념주일을 맞아 그 신앙의 선조들의 '믿음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거기에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오늘 다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역시 새로운 믿음의 발자취를 남겨야 하겠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말씀처럼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디모데전서 3:15)입니다. 이 진리의 터 위에서 날마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고 하늘의 생명을 맛보는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창립 83주년을 맞는 대학교회 위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을 주십니다. 이사야 60장 1절의 말씀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아멘. (2018.9.30.)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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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쇠퇴하고 신학생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한신대 김경재 명예교수의 신학 여정을 다룬 '한신인터뷰'가 15일 공개됐습니다. 한신인터뷰 플러스(Hanshin-In-Terview +)는 한신과 기장 각 분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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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 선에 쏠려 있는 개신교 전통에서 미(美)는 간과돼"

「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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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