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민주적 회중주의(3)

김승진 목사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사 명예교수)

편집자 주] 우리나라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충분히 민주적인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실제 교회생활에서 평등한 지위를 누리고 있는가? 본고는 이 의문과 관련하여, 어떻게 교회가 보다 민주적으로 운영되며 교회구성원들도 보다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평신도들의 적극적이고 책임적인 참여가 현실화되도록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제언하고 있다. 내용은 5회로 나누어 전재될 것이다.

IV. 침례교 신앙의 특징들과 민주적 회중주의

회중주의
(Photo : ⓒ 지유석 기자)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 직분”은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는 신자들의 섬김과 봉사를 강조하는 개념이다.

회중주의 교회행정은 침례교인들이 강조해서 믿고 있는 신앙과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침례교 신앙의 특징들로 인해 침례교인들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민주적 회중정치를 실천하는 것이다. 본장에서는 회중주의 정치와 관련이 있는 침례교 신앙의 특징들에 관하여 살펴본다.

1. 개인적인 종교와 영혼의 유능성

침례교회는 자유교회(Free Church)의 전통에 속하는 대표적인 교회이다. 여기서 "자유교회"란 먼저 세속국가나 종교기관의 권력으로부터 자유한 교회, 국가교회가 아닌 교회를 의미한다. 침례교인들은 유아세례를 관습적으로 행하고 있는 국가교회(State Church)나 시교회(City Church) 그리고 영역교회(Landeskirche)나 민족교회(Volkskirche) 등의 교회개념을 배격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신자는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자발적으로(voluntarily) 자신이 소속하고 섬길 교회를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침례교회는 자유교회 전통에 속한다.

침례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각자가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접근한다고 믿는다(individual access to God).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느 누구의 간섭이나 개입 없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만난다고 믿는다(direct access to God). 또한 예수님을 못박은 십자가가 세워진 땅은 평평했다고 생각하는데, 예수 믿은 신자는 누구나 "평등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equal access to God). 따라서 침례교인들은 "대리종교"(Proxy Religion, 대표적인 예로 유아세례, 고해성사, 세속국가나 목회자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신앙 등)를 배격한다(Charles W. Deweese, 『21세기 속의 1세기 신앙』, 김승진 역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2005], 112-20). 침례교회에서는 부모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아직 예수님을 체험적으로 만난 적이 없는 나이 어린 자녀들에게 뱁티즘을 베풀지 않는다.

침례교인들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거나 믿지 않을 능력,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긍적적이든 부정적이든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종교문제에 있어서의 영혼의 유능성"(Soul Competence in Religion)이라고 한다. 자유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품대로" 창조하신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고 믿는다. 비록 아담의 범죄로 인해 그 자유의지가 부패하기는 했지만, 성령의 감동하심과 역사하심이 있을 때 인간은 회개하고 마음문을 열어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요 주님으로 영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 영혼의 유능성은 인간이 획득해 낸 능력(a human achievement)이 아니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능력(an endowment from God)이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a gift from God)인 것이다(Ibid., 109). 1963년판 남침례교 신앙고백인 "침례교 신앙과 메시지"(Baptist Faith and Message)를 기초했던 허셀 홉스(Herschel H. Hobbs) 박사는 "침례교인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영혼의 유능성, 종교의 자유, 그리고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 직분의 원리 등을 매우 강조한다"(Herschel H. Hobbs, The Baptist Faith and Message, rev. ed. [Nashville: Convention Press, 1996], 10-14)고 진술하고 있다.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칼빈주의 5대 교리" 가운데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of Man)이 있다. 이 교리는 첫째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어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으며, 둘째로 인간에게는 그 타락으로 인하여 믿을 능력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전자에는 동의하지만 후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Fisher Humphreys, The Way We Were: How Southern Baptist Theology Has Changed and What It Means to Us All [Macon, GA: Smyth & Helwys Publishing Inc., 2002], 70-71).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죄인들을 위해 속죄와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시고 그 길로 그들을 초청하고 계신다(행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 초청에 성령의 감동하심에 힘입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회개와 믿음이요, 그 초청을 거부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불신앙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Respond), "결정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Decide), "'예' 혹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Say 'Yes' or 'No')이 "영혼의 유능성"인데, 침례교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능력과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다고 믿는다.

20세기 전반기의 남침례교 신학자인 에드가 멀린스(Edgar Y. Mullins) 박사는 "인간 영혼의 유능성"(Competency of the Human Soul)이야말로 침례교신학의 기초라고 강조하였으며, 이 교리는 "침례교인들에게 가장 특징적인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다"(Edgar. Y. Mullins, Axioms of Religion: A New Interpretation of the Baptist Faith [Philadelphia: American Baptist Publication Society, 1908], 57.)고 말하였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각 개인의 영혼이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는 자유와 능력"(Freedom and Ability of the Individual Soul to Respond to God)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Deweese, 『21세기 속의 1세기 신앙』, 111.), 침례교인들은 민주적인 회중정치를 다른 어떤 형태의 교회정치보다 선호하고 있는 것이다.

2. 신자들의 교회와 중생한 자들로 교회회원을 삼는 교회

탁월한 종교개혁 신학자요 개혁교회의 창도자인 요한 칼빈은 교회의 기초를 하나님의 선택에 두면서 교회를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들의 공동체"로 정의하고 있다(김승진, 『침례교 신앙의 관점에서 본 요한 칼빈: 그의 교회론은 신약성서적인가?』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2005], 98-102.). 이것은 예정과 선택에 근거한 일방적인 하나님의 언약(Covenant of God)에 입각한 교회개념이다. 그러나 침례교인들은 예수를 믿은 사람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분명히 했거나 하는 사람들, 즉 신자들의 공동체를 교회라고 정의한다(Believers' Church, "신자들의 교회"). 예수께서 마태복음 16장에서 처음으로 "교회"(ekklesia)라는 용어를 사용하시면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말씀하셨는데, 거의 모든 개신교회에서는 "이 반석"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진술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침례교회에서는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영아들이나 유아들에게 유아세례(Infant Baptism)를 베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영적인 출생"(Spiritual Birth through Faith)을 경험하지 않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요 주님으로 분명히 고백을 하고 그 분을 따르기로 결단한 사람에게만 침례를 베풀고("신자의 침례," Believer's Baptism), 그렇게 침례를 받은 신자들을 교회로 간주한다("신자들의 교회," Believers' Church). 따라서 침례교회는 기본적으로 "중생한 자들로 교회회원을 삼는 교회"(Regenerate Church Membership)다.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자가 예수님을 만나 치유를 받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눈을 떠서 만물을 보게 된 그를 찾아오셔서 이런 대화를 나누셨다:

(요 9:35-38)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이 연속된 대화에서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는 진술은 아직 신앙고백이 아니다. "믿으려고 합니다, 믿고 싶습니다, 믿겠습니다"는 마음의 문이 열려 있는 영적인 상태를 묘사해 주기는 하지만 아직 믿은 것이 아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내가 믿습니다, 내가 믿었습니다, 내가 믿고 있습니다"라는 진술이 참 신앙고백이다. 침례교회에서는 이처럼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는 신자(Professing Believer)에게 침례를 베풀고 그를 교회회원으로 받아들인다(Ibid., 136, 138-9).

성서적인 신자의 침례를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침례는 비가시적 내면적 영적 체험을 가시적으로 외면적으로 물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Baptism is a visible, outer, physical expression of an invisible, inner, spiritual experience)(김승진, 『영·미·한 침례교회사』, 473). "체험 없이 행하는 표현(의식)"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다. 침례(immersion)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 그리고 예수 믿은 신자와 예수님과의 연합을 가장 완벽하게 상징해 주는 성서적인 뱁티즘의 방식이다.

(롬 6:3-5)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롬 6:8-11)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골 2:11-12)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벧전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물뱁티즘 자체가 죄를 사하거나 거듭나게 하거나 구원받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회개와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거듭났고 구원받은 자가 성령뱁티즘(성령침례, 성령세례)을 받았음을 고백하는 것이 물뱁티즘 곧 침례다.

(고전 12;12-13)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우주적 교회"-필자 주)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3. 지역교회의 독립성과 자치권

침례교인들은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로 구성된 "하나의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a Spiritual Body of Christ)이라고 믿는다(김승진, 『영·미·한 침례교회사』, 69). 1000명이 모이는 교회도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이요 10명이 모이는 교회도 그러하다. 사명과 책임의 차이는 있겠지만, 교회의 본질에 있어서는 1000명 모이는 교회나 10명 모이는 교회나 각각 하나의 독립된 교회(an Independent Church)다. 신자 위에 신자 없고 신자 밑에 신자 없듯이, 교회 위에 교회 없고 교회 밑에 교회 없다.

특히 침례교인들은 교회들의 연합체나 모임을 또 다른 교회로 여기지 않는다. 교제와 협력을 위하여 지방회(Association)와 총회(Convention)가 있지만 그것들 자체가 교회는 아니다. 그것들의 월례회나 연차총회에 참석하는 자들은 지역교회의 대표자로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자격으로 참석하는 것이다. 큰 지역교회가 작은 지역교회나 농촌교회를 도울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 간의 관계는 종속적이지 않고 상호 독립적이다. 침례교 목사요 교회행정 전문가인 에드워드 히스칵스(Edward T. Hiscox)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각각의 특별하고 개별적인 교회(each particular individual church)는 모든 교회적인 권리들과 특권들과 책임들을 수행함에 있어서 실제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독립적이다(actually and absolutely independent). 다른 모든 교회들과 개인들과 사람들의 단체들도 역시 독립적이다. 그리스도만이 그들의 입법자가 되신다. (Edward T. Hiscox, Principles and Practices for Baptist Churches [Grand Rapids: Kregel, 1980], 145.)

또한 침례교인들은 각 지역교회는 자치권(자율권, Autonomy)을 갖는다고 믿는다. 지역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서 "스스로"(auto) "규범"(norm)이 된다. 각 지역교회는 "스스로 통치하는 유기체"(Self-governing Organism)이다. 지역교회 이외의 어떠한 외부의 개인이나 교회나 단체나 지방회나 총회나 심지어 시나 국가도, 지역교회의 일에 간섭하거나 개입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지역교회가 다른 교회들이나 지방회나 총회에 자문이나 조언을 구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자문이나 조언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역교회 회원들로 이루어진 사무처리회(Business Meeting)의 결정은 외부기관의 재가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결정은 그 자체로서 최종적이다. 왜냐하면 지역교회보다 더 높은 권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회중정치를 행하는 침례교회가 장로정치를 행하는 장로교회나 감독정치를 행하는 감리교회와 차별화되는 점이다.

침례교인들이 지역교회의 독립성과 자치권(자율권)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은 민주적 회중정치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신앙이다. 박영철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기적 몸으로서의 지역교회의 자율권은 회중주의 정체에 있어서 매우 결정적인 요소이다. 이 자율권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실재를 가능하게 해 주는 근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회중주의 정체와 개교회 자치권 또는 자율권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마링(Maring)과 허드슨(Hudson)은 "지역교회의 자치권은 가장 소중한 침례교 교리이다"라고 말한다. 이 교리가 주장될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목회현장에서 실체를 이루고 실현되는 것이 너무도 중요한 일이다. 지역교회는 엄연한 영적 실체로서의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것은 철저히 한 인격체로서의 존엄성과 존재의미를 가진다. (박영철, "제2장 침례교 회중주의 자율권," 『다문화 시대에 다시 보는 한국침례교회』, 침례교신학연구소 편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2009], 53.)

2017년과 2018년에 한국기독교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이슈는 서울에 소재한 모 장로교단의 대형교회(M교회)에서 행해진 담임목회직의 대물림(세습) 사건이었다. 반대자들은 1517년에는 로마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로 인해 독일에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는데, 500년 후인 2017년에는 담임목회직의 대물림(세습) 사건으로 인해 한국에서 또 다른 개혁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반대자들은 몇 년 전에 총회에서 결의된 담임목회직 세습금지법을 M교회가 명백하게 어겼다고 주장하며 아들 목사의 자진사퇴를 촉구하였다. 또한 아버지 목사가 일전에 M교회에서는 아들에게 목회직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공언했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노회와 총회 재판국이 M교회의 사주를 받아 불법적으로 목회직 세습을 가능토록 했다고 주장하였다. 그 교단의 2018년 9월 연차총회에서는 M교회는 총회법에 저촉되는 불법을 저질렀다고 결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혈육 간 담임목회직의 대물림(세습)이 문제가 되는 것은 대형 혹은 초대형교회에서 그러한 일이 벌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엄청난 부와 권력이 혈육 간에 독점적으로 전이된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임을 부인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대형교회 담임목사가 교회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담임목사 마음대로 자신의 자식이나 인척 가운데에서 후계자를 세우는 것이다. 교회의 사유화(私有化) 현상이 빚어내는 결과가 담임목회직의 대물림(세습)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필자도 담임목회직의 대물림(세습)은 가능한 한 금기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김승진, 『종교개혁가들과 개혁의 현장들: 아직도 미완성인 종교개혁』 [서울: 나침반출판사, 2015], 347).

그러나 담임목회직의 대물림(세습) 문제와 관련해서, 지역교회의 독립성과 자치권(자율권), 그리고 지역교회 자치주의를 교회행정의 기본원칙으로 삼고 있는 침례교회에서는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대로 침례교회에서는 지역교회 내의 인사문제, 예산과 결산 등 재정문제, 교회건물과 토지의 관리 및 처분, 교회의 목회나 선교정책의 수립, 교회 내부의 갈등이나 도덕적인 문제의 해결 등 교회생활의 모든 양상들에 대해서 각 지역교회는 스스로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지방회나 총회가 존재하지만 이러한 기관들은 지역교회 일에 개입하거나 간섭할 수 없다. 단지 그러한 기관들은 지역교회들 간에 상호 교제와 협력을 도모하고, 그리고 지역교회들을 섬기기 위해서 존재한다. 지방회나 총회는 지역교회 위에 군림해서 지역교회 내부의 문제에 개입하거나 간섭할 수 없다. 침례교 총회에서는 지역교회의 자치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는 결의를 하지도 않을뿐더러, 더군다나 지역교회 문제를 다룰 재판국 같은 기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장로교회에서 담임목사는 노회 소속이고 노회의 파송과 위임을 받는 것으로 아는데, 침례교회에서는 담임목사는 섬기는 지역교회의 회원이고 그 지역교회에서 선출되어 청빙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후임 목회자를 결정하거나 현 담임목사의 은퇴 후 새 담임목사를 청빙하는 것도 지역교회 회원들이 "지역교회 자치주의" 원칙에 따라 스스로 자율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지역교회에서 "담임목사청빙위원회"가 구성되어 새 담임목사를 물색할 때에 공평무사하게 공개적으로 그리고 민주적으로 청빙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 현 담임목사의 자식이나 인척도 "그가 충분한 인격과 영성과 자격을 갖춘 목회자라면" 한 사람의 후보자로서 지원을 할 자유와 권리가 없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현 담임목사의 자식이나 인척은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없고 또한 그렇게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전체 교회회원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면서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그 교회의 헌장(규범, 시행세칙 등)에 정해져 있는 대로 다수결 투표로 새 담임목사를 정했다면, 그가 현 담임목사의 자식이든 인척이든 상관없이 그 결정을 하나님의 뜻, 즉 신본(神本)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Ibid., 347-8).

문제는 담임목사가 자신의 자식이나 인척을 새 담임목사로 세우기 위해서, 선출의 과정에 "비상식적으로 혹은 불법적으로" 개입하여 평신도 지도자들을 돈으로 매수한다든지, 교인들의 여론을 조작한다든지,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한다든지,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든지 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만약 이러한 비민주적이고 불공정한 작태가 벌어진다면 당연히 기독교언론과 교단신문은 그 실상을 파헤치고 비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담임목회직의 대물림(세습)에는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도 아니고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측면들을 떠나서 침례교회에서는 "지역교회 자치주의" 원칙에 입각해서,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인 지역교회의 회원들 전체가 기도하는 가운데,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끄심을 받으며,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다수결투표로, 자신들의 새 담임목사를 선출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민주적 회중주의" 행정에 의해 새 담임목사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 지역교회의 결정에 대해 그 교회 밖의 개인이나 단체나 지방회나 총회나 기독교언론이 간섭하거나 개입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 교회의 자치권(자율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Ibid., 348).

4.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 직분

"종교문제에 있어서의 영혼의 유능성"(Soul Competency in Religion)과 함께 침례교인들이 매우 강조하는 신앙은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 직분"(Priesthood of All Believers)의 원칙이다. 제사장이란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다리를 놓는 자"(bridge-builder)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제사장은 레위 혈통을 가진 자들이 맡았는데(출 40:13; 민 1:47-53),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대제사장은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서 백성의 죄를 하나님께 고하며 속죄의식을 행하였고, 동시에 백성을 향해 죄의 용서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던 순간, 성경은 "성소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마 27:51)고 기록하고 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진 것이다.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찢으셨음을 암시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 분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단번에 죄값을 모두 치르신 제사장적인 행위(priestly act)였다(Ibid., 340). 예수님은 "영원한 속죄"를 위하여 동물의 피가 아니라 죄 없는 자기의 피를 흘리신 것이다(히 9:11-12). 그 분은 스스로 제물이 되셔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셨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가 되셨다(딤전 2:5-6). 이제 예수를 믿은 신자들은 누구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담대하게 성소(Holy Place)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었다(히 10:19-20).

(히 9:11-12)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딤전 2:5-6)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히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이제 후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께 공개적으로(openly) 그리고 동등하게(equally)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H. Leon McBeth, "제3장 하나님은 영혼의 유능성과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 직분의 원리를 주셨다," Charles W. Deweese, 『21세기 속의 1세기 신앙』, 112).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제사장 직분(Priesthood)을 그리스도인들과 공유하신다. 신약성서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제사장으로 불리게 되었고(벧전 2:5, 9; 계 1:6, 5:10, 20;6),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특권뿐 아니라 섬기는 제사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지게 되었다.

(벧전 2:5, 9)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계 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계 5: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그런데 "영혼의 유능성" 개념이 개인적인 것이라면,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 직분"(Priesthood of All Believers) 개념은 기본적으로 공동체적이다. 이 개념은 "각 신자의 제사장 직분"(Priesthood of Each Believer)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다. 따라서 이 교리가 잘못 해석되거나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스스로 제사장이니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가 할 수 있다. 나는 스스로 제사장이니 내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할 수 없다"(Norman, The Baptist Way: Distinctives of A Baptist Church, 97.)는 식으로 이 교리가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 직분"이 자기중심적인 개인주의, 무책임한 이단적인 성서해석, 공동체적인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위, 신학적 무정부주의 등을 조장하는 것으로 오도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Ibid., 97-8).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 직분"을 신자 개인의 신분적인 특권을 강조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는 신자들의 섬김과 봉사를 강조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교리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고 분별하기 위해서 제사장으로서의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 직분" 원칙은 민주적 회중주의 정체와 평신도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정체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되고 실천될 수 있다. (계속)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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