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편 53:1-3, 요한1서 1:4-7, 마태복음 5:13 -
어느 목사님이 골프에 아주 깊이 빠졌습니다. 틈만 생기면 골프장에 나가 스윙 연습을 했습니다. 그런데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하고 맑아 골프 치기 딱 좋은 어느 날, 목사님은 갈등에 빠졌습니다. 일요일이었던 것입니다. '예배 인도해야 하는데 어쩌지...' 그러나 골프에 대한 욕망이 그를 압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곧 교회에 전화를 걸어 오늘 몸이 아파 못 나간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골프장으로 직행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천사가 하나님에게 달려가 보고했습니다. '하나님, 저 목사 좀 보세요. 혼 좀 내셔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시원한 필드 위에 선 목사님, 1번 홀에서 티업을 하고 볼을 향해 힘찬 스윙을 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뒤에서 바람이 불더니 그 볼이 무려 350미터나 날아가 그린 위에 떨어졌습니다. 이어 볼이 스스로 데굴데굴 구르더니 홀컵에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홀인원'이었습니다. 평생 한 번 할까 말까 한다는 그 홀인원 말입니다. 목사님은 너무도 놀라고 흥분했습니다. 지켜보던 천사도 놀라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아니 하나님, 뭔가 잘못 하신 것 같네요... 벌을 주셔야지 홀인원이 뭡니까?' 그러자 하나님은 미소를 지으시며 천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이걸 한 번 생각해보렴. 저 목사가 저걸 누구에게 자랑하겠니?' 하나님은 아주 멋진 방법으로 이 목사에게 벌을 주셨습니다. 평생 자랑하고도 남을 일이 생겼는데,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고통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지난 주중에 『종교 없는 삶』이라는 제목의 책을 보았습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필 주커만(Phil Zuckerman)이 지은 책입니다. 그는 2012년에도 국내에서 『신 없는 사회』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 때 덴마크나 스웨덴과 같은 스칸디나비아 국가에 사는 사람들을 인터뷰해 그들의 낮은 종교인구와 높은 삶의 질의 연관관계를 조명해 주목 받았습니다. 중동이나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처럼 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보다 유럽이나 북미 그리고 일본처럼 종교적 성향이 약한 나라들이 대체로 번영하고 평등하며 안전하다는, 다소 무리한 주장을 펴기도 했었습니다. 이번 신작 『종교 없는 삶』에서 주커먼은 현대에 들어 종교가 약화되는 세속화가 놀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됐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100년 전에 종교가 없다고 말한 사람은 네덜란드에서 10%, 캐나다에서 2%, 호주에서 1%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각각 40%, 30%, 20%에 이른다는 겁니다. 기독교 국가라 불렸던 미국에서도 25년 전엔 무종교인이 10% 미만이었는데 현재는 20~30%로 급증했다고 합니다.
그럼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자는 최근 미국에서 무종교인이 급증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 한국의 상황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먼저 보수적인 공화당과 복음주의 기독교 간에 밀월 관계가 만들어지자 정치적으로 진보적이거나 온건한 미국인들이 기독교로부터 소외되기 시작했습니다. '도덕적 다수'(The Moral Majority) 운동처럼 낙태 불법화, 동성애자 결혼 반대, 복지 재정 축소, 이스라엘 지원, 총기 규제 반대 등 다양한 정치적 이슈들을 기독교와 결부시키자, 이것에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이 기독교 바깥으로 밀려났다는 것입니다. 또한 종교 활동의 핵심 축이었던 여성들이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시간이 늘어나자 종교 활동을 할 여유가 없어졌고, 인터넷 발달로 종교에 의문을 제기하는 담론들이 더 쉽고 빠르게 퍼져나가 무종교인들이 서로 연대하기 시작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로 지목되었습니다. 우리나라를 보아도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퀴어 집회에 몰려가 성소수자들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난민들은 이슬람교도들이니 내 쫓으라 목소리를 높이는 기독교인들은 사회적으로 우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일부 교회가 특정 이데올로기의 마지막 요람을 자처하고, 세습으로 지탄을 받아도 '우리끼리 일이니 간섭하지 말라'며 귀를 틀어막습니다.
오늘날 유럽, 특히 서유럽의 교회를 가보면 정말로 젊은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만이 주일예배에 참석할 뿐 젊은이들을 찾아보기란 매우 힘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동안 사람들은 유럽이 '세속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속 문화 때문에 젊은이들이 교회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심도 있게 조사한 한 보고서는 우리에게 다른 시각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그 이유는 젊은이들이 그들의 부모로부터 참 신앙을 상속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젊은이들과 심층 인터뷰를 가진 결과, 그들이 기독교인 부모에게서 상속받은 것은 (New Testament도 아니고 Old Testament도 아닌) "an empty testament," 즉 '텅 빈 약속'임이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어릴 적 부모를 따라 교회도 나가봤고 기독교적 명절에도 익숙해졌지만, 부모들의 삶과 행실 속에서 감동적으로 보고 배운 기독교적 정신은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복음의 알맹이'가 전달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이 텅텅 비어있는 유럽교회의 위기는 교회 밖 세속문화에서 온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진정한 위기는 늘 내부에서 잉태되어 자라납니다. 교회 밖의 세속화가 아니라 교회 안의 공동화(空洞化), 즉 신앙의 진공 상태 속에서 오늘날 유럽교회의 위기, 즉 신앙 상속의 위기가 자라났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의 신앙은 소박한 것이었습니다. (지명관의 『서울의 찬가, 서울의 애가』에서 인용함.) 1884년 경 주로 미국 선교사들과의 접촉으로 시작된 한국의 초기 개신교회는 특징적으로 가난한 농민들, 특히 부녀자들 사이에 전파된 종교입니다. 그들이 드리던 한 기도를 소개합니다. "돼지처럼 아래만 보고 살지 않게 도와주옵소서. 너무 부하게도 하지 마옵시고 너무 가난해서 죄짓지도 않게 해주옵소서. 이 세상을 당신보다 더 사랑하지 말게 해주옵시고 이 내 아들도 결코 하늘에 계신 아버지보다 더 사랑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이 기도는 1920년대 초 거의 무학에 가까운 한 농촌 여성이 가난에 쪼들린 삶 속에서도 매일 어린 아들과 함께 드린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어느 한 가정에서만 드리던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거의 모든 가정의 어머니들이 남몰래 드리던 기도였습니다. 바로 우리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드리던 기도였습니다. 저도 제 어머니의 어머니, 즉 외할머니를 통해 신앙을 이어받아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때보다 많은 교육을 받고 매우 유복한 환경에 살고 있는 왜 우리 '유식한'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는 걸까요?
1907년에 한국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 때는 1905년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을 자기의 보호국으로 굳히기 시작한 절망과 좌절의 시기였습니다. 당시 조선에 있던 한 선교사가 직접 체험한 1907년 대부흥운동의 실상을 들어봅시다. "회개는 결코 고백과 눈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갚아야 할 것은 갚는다는 행위가 일어나 평화가 찾아왔다. 거리 어디서나 사람들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고백하고 교인이건 아니건 관계없이 재산이나 돈을 훔쳤으면 갚아주었다. 전 거리가 동요됐다. 한 교인이 찾아와서 몇 년 전에 부정하게 번 거액의 돈을 갚고 가는 것을 보고 한 중국 상인은 크게 놀랐다. (후략)" 마치 삭개오의 회개 장면을 보는 듯합니다. 한국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용서하고 화해하는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교리의 기독교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그 엄혹한 시대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신앙의 상상력으로 흑암의 시대에 굴종하지 않고 그것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는 역사와 문명에 대한 새롭고 창조적인 상상력을 잃어버리고 방관자가 되었습니까? 언제부터 우리는 도박판과 같은 자본주의 세상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구하며 요행으로 거대한 부를 꿈꾸게 되었습니까? 언제부터 많이 배웠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다운 지성의 핵심인 자기비판의 능력, 자기초월의 능력을 상실하고 교회와 세상을 향해 침묵하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5;13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소금은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입니까? 첫째로, 소금은 몹시 가치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소금은 화폐 대신 임금으로 지불되던 귀한 물질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이처럼 세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둘째로, 소금은 방부제입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소금은 음식의 부패를 막는 방부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사회가 썩어간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제 역할을 다 못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셋째로, 소금은 상처를 치유하는 약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우리가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넷째로, 소금은 정결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소금은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그런 하얗고 고운 순수 소금이 아닙니다. 옛날 팔레스타인에서 나오던 소금은 정제가 잘 안 되어 여러 물질이 섞여 있는 검은 빛깔의 소금이었습니다. 때문에 비를 맞거나 햇빛에 노출되면 그것은 쉽게 짠맛을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소금의 질을 결정하는 기준은 잡 물질이 얼마나 적게 함유되어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정결하고 정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소금은 녹는 것입니다. 형체도 없이 녹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말씀은 이 세상 속에 형체도 없이 녹으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소금이 '내가 소금이다'라고 티를 내기 위해 녹기를 거부하면 부패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썩기를 거부하면 세상이 썩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저 거대한 바닷물을 짜게 만드는 것은 바다 속에 녹아 있는 소금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겨우 1%밖에 안 됩니다. 육지 위의 고인 물은 금방 썩습니다. 바닷물도 일종의 지구 위의 거대한 고인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썩지 않는 이유는 그 안에 있는 1% 밖에 안 되는 소금 때문입니다. 한국에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현재 40%에 육박합니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썩을 대로 썩었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심한 부패의 냄새가 납니다. 1%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반증이 아니겠습니까?
얼마 전 <높은뜻선교회> 대표인 김동호 목사가 페이스 북에 "플라스틱 목사를 조심하자"는 제목의 글을 올려서 큰 공감을 얻기도 했습니다. 읽어보니 의미가 있는 글이었습니다. 이 글은 성직자와 평신도를 포함해 일부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플라스틱에 비유해 꼬집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스스로 썩는 고통을 감내하며 하나님께 나아갔는데, 지금의 한국교회는 권력과 권위를 내려놓지 못하고 썩지 않으려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문을 읽어보겠습니다. "플라스틱 목사를 조심하자. 1. 인간이 만든 획기적인 발명품 중의 하나는 플라스틱이다. 얼마나 우리의 삶을 편하게 해주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플라스틱이 지금 지구를 위협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2. 세계적으로 유명한 커피숍부터 플라스틱 빨대 대신 종이 빨대를 쓰겠다고 선언하였다. 구멍가게 중의 구멍가게이지만 우리 막내아들 빈티지 샾에도 플라스틱 봉투[는] 없다. 3. 플라스틱과 종이 차이가 뭘까? 4. 썩음과 썩지 않음. 종이는 썩는데 플라스틱은 썩지 않는다는 것. 5. 우리 한국 교회의 문제는 뭘까? 목사, 장로, 권사, 안수 집사와 같은 사람들이 점점 플라스틱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특히 우리 같은 목사. 원로, 공로, 명예, 은퇴, 세습 목사가 완전 플라스틱이다. 썩질 않는다. 썩을 줄을 모른다. 6. 플라스틱 목사, 장로, 권사, 집사 하지 말고 그냥 종이 목사, 장로, 권사, 집사하자. 썩어 없어지는 사람이 되자. 40년을 광야에서 충성한 후에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고 홀로 느보산에 올라 거기서 썩어 죽은 모세 같은 목사, 장로, 권사, 집사하자. 7. 예수님은 누구든지 당신을 좇아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고 하셨다. 자기부인과 십자가는 썩음을 의미한다. 썩음이 자기부인이다. 썩어야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8. 플라스틱 목사를 조심하자."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기준입니다. 참 그리스도인과 겉모습만의 그리스도인을 가르는 기준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처럼 세상의 소금이 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렬한 신자라 하더라도,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조금만치도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껍데기 그리스도인에 불과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 출석자들'(church-goers)이 스스로를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요일마다 교회에 다닌다고 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황금빛 성경책을 들고 다닌다고, 또 유명한 목사의 설교를 애청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의 사람'은 아닙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경건히 QT를 한다고 해서, 또 앞장서서 교회 봉사를 한다고 해서 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들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알곡과 가라지를 가르는 참 기준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기준은 예수님의 이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이것이 기준입니다. 참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처럼 형체도 없이 녹아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부패를 막는 존재가 아니라면 참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를 닮으며 살아야 합니다. 소금처럼 녹아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우리는 냉혹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처세술을 동원하고 두 겹 세 겹 자기방어의 울타리를 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 가닥의 술수도, 자기방어도 없이 올곧고 정직하게 사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큰 두려움이나 큰 불안을 느끼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장차 핍박을 받아 공회에 잡혀가겠지만 "대답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성령께서 반박할 수 있는 구변과 지혜를 주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무소유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재산목록은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그가 세상에 남긴 물질적 유산은 아래 위를 통으로 만든 옷 한 벌이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무일푼으로 살았지만 지금까지의 2천 년의 역사와 오늘날 30억 인구의 마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중세의 석학 토마스 아퀴나스가 언젠가 교황 이노센트 4세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황은 교황청에 가득한 금은보화를 보여주면서 "이제 교회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하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자랑을 떨었습니다. 그러자 아퀴나스가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제 교회는 성전 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어라' 말하던 기적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교육을 받는 적이 없어도 하나님의 나라를 자신의 권위로 가르치셨습니다. 그 분에게서는 어리석음이나 아집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높은 지식을 자랑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서 우매한 편견을 발견하시고 이를 질타하셨습니다. 이런 '무학의' 예수님의 공생애는 겨우 3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짧은 삶은 인류의 지성사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그는 시 한 수도 지은 적이 없으나 단테나 밀턴과 같은 세기적인 시인들의 사상은 그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노래 한 곡 지은 적이 없으나 하이든, 헨델, 베토벤, 바흐, 멘델스존과 같은 위대한 작곡가들이 수많은 성가와 심포니 그리고 오라토리오로 그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의 장대한 국면 치고 시골 나사렛 출신의 이 목수에게서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진실성을 의심받고 있으며 이기적이라고 규탄 받고 있습니까? 아무런 자기방어도,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진 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소금과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열어 아무 형체 없이 사라지면서도 세상의 부패를 막고 구원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를 믿고 따르는 우리의 모습이 이와 같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 닮아서 소금의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이렇게 알려줍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사람과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과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과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과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과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고린도후서 6:9-10).
제가 좋아하는 글입니다. 원래 중국의 속담인데, 맨해튼의 한 초등학교 벽에 붙어있던 것이라 영어로 알고 있습니다. "I hear and I forget; I see and I remember; I do and I understand." "나는 듣고 잊어버립니다. 눈으로 보면 기억합니다. [그런데] 실천해보니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본다고 해서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사십시오. 보고 들은 대로 실천하십시오.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말씀을 멋대로 해석하게 됩니다. 자기에게 편리하게 귀에 걸고, 코에 걸어 복음을 훼손하게 됩니다. 소금의 속성과 같이, 세상 속에서 정결하게, 세상의 상처를 치유하며, 그리고 세상의 부패를 막는 존귀한 존재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다른 모든 것들과 구별하여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2018.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