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 수비리(Zubiri): 5시간 30분 (21Km)
첫날의 험난한 순례에도 불구하고 몸이 좀 가볍다. 수비리로 향하는 발걸음이 어제보단 가벼워진 기분이다. 하지만 단정 짓기 어려운 것은 몸이 건네는 말을 정확히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국에서의 긴장과 낯선 곳을 걸으며 오는 땅의 전율이 몸 안에 질서 없이 축적되는 듯하다. 완벽한 준비가 세상 어디에 있겠나, 되뇌며 계속 걸어 본다. 그렇게 정처 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 더니 어느새 마을로 안내하는 다리가 무척이나 낭만적인 수비리(zubiri)에 도착했다. 욱신거리는 어깨 때문에 산책은 잠시 접어두고 부랴부랴 숙소에 짐을 푼다.
혼자 떠난 해외여행이 처음인 나는 자유에 관한 어떤 불편을 느꼈고 그 불편을 잠재우고자 동행을 찾기 시작했다. 온전한 자유를 누리는 게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더라. 하지만 동행을 만들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다.
한국에서 산티아고로 출발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 사실을 안 것은 한 온라인 카페에서 운영하는 단톡방 초대 때문이다. 그 카페를 통해 매월 산티아고로 떠나는 이들을 위한 단톡방이 개설됐고 난 떠나기를 결정하고 나서부터 그곳에 접속해 필요한 정보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유익했던 건 비슷한 날짜에 순례를 시작하는 순례자들을 알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미 단톡방에서 눈여겨보던 또래의 친구들이 있었고 그 친구들을 수비리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미리 말하자면 이들과의 만남이 이번 순례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물론 이 인연이 오랜 동행으로 이어질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알게 된 나의 길벗이 바로 현정이, 지혜, 제영이다.
우연을 인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용기'를 필요로 했다. 철학자 조중걸은 그의 책 <러브 온톨로지>에서 사랑을 논하며 모든 것이 우연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최선이라고 말했다.
"운명은 기성품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 맞추어 나가야 할 맞춤복이다. 세계를 우연인 것으로 보느냐 필연인 것으로 보느냐하는 것은 단지 사랑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세계관을 가르는 두 시각이다. 모든 것이 우연이라면 우리에겐 최선이 남는다." (조중걸, 『러브 온톨로지』, 세종서적, 2015, p.224)
그는 사랑에 빠져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연인의 테이블에 시원한 냉수 한 그릇을 건넨다. 운명의 짝이 그저 우연히 만난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그의 이야기는 낭만적 사랑을 무한히 신뢰하는 이들에겐 그리 유쾌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만약 사랑이나 세상사가 정해진 운명대로 흐르는 게 아니라 우연히 일어난 일의 축적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몫은 무엇일까? 능동적인 태도 다시 말해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적극적인 태도만이 남지 않을까? 그렇기에 의식하며 행동할 최선의 선택은 바로 '용기'일 것이다.
산티아고로 떠나기를 결정하면서부터 나의 모든 운명은 내가 내딛는 걸음의 향방에 있다고 느꼈다. 걸어야 할 때 걷지 않으면 남는 건 아쉬움과 후회, 자기연민이었다. 나를 가두고 있는 틀을 돌파하는 방법은 한 가지였다. 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것! 물론 쉽지 않다. 어렵고 두렵다. 그렇기에 실패할 수도 있다. 분명히 여러 번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향한 작지만 위대한 내면의 요구와 마주한 이상 잠잠히 머물 수만은 없었다. 우회하는 길은 없다. 만남이든 떠남이든 이 길에선 피하지 않을 것이다.
캐 묵은 습성을 벗고자 한 걸음 더 '용기'를 내 걸어본다. 이미 수많은 순례자와 함께 했고 또 앞으로도 함께 할 하늘의 은총이 방황하는 이 가난한 영혼 가운데에도 깃들 기를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