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영원한 생명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이사야 40:6-8, 고린도전서 15:50-58, 요한복음 5: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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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우리는 태양의 주기에 따라 양력, 혹은 달의 주기에 따라 음력을 씁니다. 교회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役事)를 따라 교회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달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시작으로,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그리고 창조절로 이어져 끝납니다. 오늘은 창조절의 마지막 주일이며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 이 날은 '영원주일'로 지키려고 합니다. 이 날은 (그 해에) 세상을 떠난 성도와 가족을 추모하는 한편, 자신에게도 찾아올 죽음과 그 후에 주어질 영원한 생명을 그려보는 날입니다.

독일의 루터교회 안에 오늘을 영원주일로 지키는 전통이 있습니다.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가까이에 묘지를 조성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죽은 자의 부활이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주일에 예배를 드린 후 가까운 묘소를 찾아 추모합니다. 생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엄숙하게 예배를 드립니다. 유럽에서 영원주일의 상징은 '등불'과 '조개껍데기'입니다. 등불은 희망을 상징하고, 조개껍데기는 순례를 상징합니다. 순례와 같은 우리 인생 길을 주의 빛으로 밝힌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해인 님의 시 <재의 수요일 아침에 - 사순절> 중의 한 구절입니다. "죽어가는 이들을 가까이 지켜보면서도 / 자기의 죽음은 너무 멀리 있다고만 생각하는 / 많은 사람들 속에 나도 숨어 있습니다. // 아름다움의 발견에 차츰 무디어가는 / 내 마음을 위해서도 / 오늘은 맑게 울어야겠습니다. // 먼지 낀 마음의 유리창을 / 오랜만에 닦아내며 하늘을 바라보는 겸허한 아침 / 하늘을 자주 바라봄으로써 / 땅도 사람도 가까워질 수 있음을 / 새롭게 배웁니다." 오늘은 맑게 우는 날입니다. 사람은 익숙해지면 고마움을 모른다고 하지요. 길들여지면 고맙다는 느낌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합니다. 보석도, 친구도, 사랑도 그렇습니다. 심지어 생명도 익숙해지면 그럴까요? 오늘은 먼지 낀 우리 마음의 유리창을 깨끗이 닦아 하늘을 보며 먼저 간 우리의 사랑하는 분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중 한 사람인 칼 바르트(Karl Barth)는, "죽음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경계선을 보여주며, 죽음이라는 자리는 생명의 하나님에 대한 참된 깨달음이 주어지는 자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삶과 죽음을 이원론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바르트는 죽음이 생명의 신성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자리라고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습니다. 시간과 영원의 사이에 서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시간 속을 삽니다. 순간을 삽니다. 하지만 시간 안에 잠시 거하면서도 영원을 그리워하며 삽니다. 영원을 사모하며 순간을 삽니다. 성서는 영원(永遠)을 이야기합니다. 영생(永生)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성서가 말하는 영원은 무엇입니까? 성서가 가르치는 영생은 무엇입니까? 과연 그것은 불로초를 얻어 영생불사(永生不死)하고자 했던 진시황의 욕망과는 무엇과 다를까요?

성서가 말하는 영원은 단순한 시간의 연장이 아닙니다. 물리적 시간의 무한한 연장이 아닙니다. 성서의 영원은 한없는 오랜 세월을 뜻하는 '영겁'(永劫, eternity)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영겁에서 '겁'은 산스크리트어 '칼파'(kalpa)의 음역인 '겁파'(劫波)의 약칭으로, 본래 인도에서 1겁은 43억 2천만 년을 뜻합니다. 불교에서는 옷깃 한 번만 스쳐도 500겁의 인연이 있다고 하지요. 계산해 보았습니다. 무려 21조 6백억 년입니다. 이 영겁의 반대가 '찰나'(刹那)입니다. 찰나는 지극히 짧은 순간을 뜻하는데,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사이에 벌써 65찰나가 흐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서는 세월을 아무리 한없이 늘려놓는다고 해서 그것을 영원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서에서 영원은 시간의 무한한 확장이 아니라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난 무시간성입니다. 시편 90:4은,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후서 3:8은,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영원은 시간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시간은 영원 안에 존재합니다. 영원은 존재의 근원입니다. 시간은 영원으로부터 나와 다시 영원으로 돌아갑니다. 성서의 영원은 임시적인 존재의 끝없는 지속(duration)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속적인 선(line)이 아니라 항상적인 점(point)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순간은 영원에 잇대어 살 수가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영원한 생명인 '조에 아이오니오스'는 지금 여기 이 시간 안에서도 닿을 수 있고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생명을 가리키는 두 가지 용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비오스'(bios)이고 다른 하나는 '조에'(zoe)입니다. 비오스는 건강, 힘, 생식능력을 뜻하는 생물학적 개념입니다. 이 비오스가 바로 생물학을 뜻하는 "biology"의 "bio"의 어원입니다. '조에'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생명을 말합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참 생명' 혹은 '영생'이라고 부릅니다. 요한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한 17:3)이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예수의 말을 듣고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한 5:24)고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말씀을 '듣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이미 영원한 생명의 나라와 이어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이 시간 안에서, 이 순간 안에서 영원과 이어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서에서 영생은 육신의 죽음 이전부터에도 이미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순간을 살지만 영원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간 안에 살지만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독일의 문학가 린더의 작품 중에 『젊어지는 그물』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시간의 질과 양의 문제를 다룬 책입니다. 어떤 신비한 그물이 있는데 거기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젊어진다고 합니다. 하루는 이 소문을 듣고 나이가 많은 할머니가 찾아왔습니다. 사무원이 큰 책 한 권을 내보이며 이렇게 말합니다. "할머니, 이 책에는 할머니의 지난 90 평생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신비한 그물에 들어갔다 나오시면 앞으로 할머니는 지금까지 사신 것과 똑같은 기간을 다시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이 책에 적힌 대로 할머니가 살아오신 지난 90년을 똑같이 살아야 합니다." 할머니는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일어난 모든 일이 적혀 있는 그 책을 꼼꼼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얼마쯤 책을 탁 덮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다시 살아야 한다면 아무리 오래 살아야 무슨 의미가 있겠소, 난 젊어지는 것을 포기하겠소."

그랬습니다.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라면, 다시는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시간이라면 그 시간을 아무리 길게 늘여봐야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지옥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그것이 다시 살고 싶은 충만한 시간이라면 그것은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겨우 3년 밖에 안 되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인류의 가슴 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로 남아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양이 아니라 질이 중요합니다. 시간의 길이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짧게 살아도, 찰나를 살아도 아름답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세상을 사는 지혜>라는 제목의 성가가 있습니다. 가사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잔잔히 일깨워줍니다. "하늘을 볼 겨를도 없이 / 정신없이 세상을 살다가 / 마음의 먹먹함이 내 삶을 짓누를 때 / 그제서야 주님을 찾습니다. // 행복을 느낄 겨를도 없이 / 분주하게 세상을 살다가 / 인생의 허무함이 내 삶을 짓누를 때 / 그제서야 주님을 찾습니다. // 오늘도 여전히 주님은 그 자리에서 / 우리를 끊임없이 돌보시는데 / 부족한 내 영혼은 아직도 갈 길을 모릅니다. // 내게 믿음주소서 내 연약한 마음 돌보소서. / 한없는 주님의 사랑 알게 하소서. / 영원까지 그의 백성 지키시는 우리 하나님 / 바라보며 살게 하소서."

하나님은 영원 안에 계시며 우리를 끊임없이 돌보시는데, 시간 안에서 찰나의 행복을 탐닉하며 사는 우리들은 행복의 영원하지 않음을 느낄 때, 인생의 허무함이 내 어깨를 짓누를 때만 주님을 찾습니다. 그제서야 주님을 찾습니다. 우리의 시간에 종말이 있다는 사실을 애써 잊으며 그렇게 삽니다. 오늘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마치 죽음이 없는 것처럼 살다가 끝내 준비 없이 인생의 종말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모든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아서 반드시 시들고 말라버리고야 맙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일이요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영원의 신비를 말하는 성서는 한 개인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하나의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성서에서 죽음은, 비유하자면, 인생이라는 공책에 한 문장을 다 쓰고 문장 끝에 찍는 까맣고 동그란 마침표(period)와 같습니다. 길든 짧든 하나의 문장 끝에 놓이는 작은 점과 같습니다. 한 문장이 끝났다고 해서 전체 이야기가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마침표는 또 다른 문장의 시작을 준비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절의 표시가 아니라 연결의 표시입니다. 그것은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한 삶의 완성이요 영원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힘찬 개선가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린도전서 15:55).

성서는 오히려 "주 안에서 죽은 자는 복되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먼저 주님이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이 우리를 영원으로, 영생으로 인도하시기에 주 안에서 죽은 사람은 복되다고 말합니다. 둘째로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이 복된 이유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잠시 잠을 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죽은 자를 '잔다'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건이라고 말하시며 죽은 나사로가 "잔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잔다는 말은 잠에서 깨어 일어날 아침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의 새 아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은 이 희망의 아침을 기다리며 휴식을 취하는 것이기에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은 복되다고 성경이 말합니다. 셋째로 주안에서 죽는 사람이 복된 이유는 인생의 수고를 다 마치고 안식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영원한 생명을 '안식,' 즉 '휴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루의 일과를 땀 흘리며 열심히 살다가 피곤하여 잠에 빠져드신 적이 있는지요.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이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행복인지를 너무도 잘 압니다. 성경을 보면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깁니다. 나사로가 살았던 세상은 차별과 고통과 손가락질이 난무하던 세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모든 수고를 다 마치고 누리는 영원의 평화와 안식이기에 성경은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이 복되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람이 죽으면 '사망'(死亡)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망, 즉 죽어서 망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소천'(召天)했다고 표현합니다.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천상병 시인이 <귀천 歸天>이라는 시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소풍 왔습니다. 어릴 적 소풍 갈 때의 설렘을 기억하십니까? 못 먹어보던 김밥에 계란 두알, 그리고 사이다 한 병... 어린이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늘나라 본향집에서 살다가 그렇게 이 세상 안으로 소풍 나왔습니다.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 서로 손잡고 기슭에서 행복하게 뛰어놉니다. 하지만 구름이 손짓하면은 돌아가야 합니다. 시인의 말처럼, "새벽빛 이슬 손잡고" 하늘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보다 앞서 가신 분들도 사망한 것이 아니라 '소천'했습니다. 성경에도 예수님은 우리가 거할 거처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했습니다. 그가 예비하신 나라가 바로 우리의 영원한 집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집입니다. 하늘에 있는 집입니다. 우리보다 앞서가신 분들은 구름이 손짓하니 새벽빛 이슬 손잡고 하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품에 안기어 다시는 눈물과 고통과 질병과 슬픔이 없는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이 지금은 비록 고통스럽고 인내하기 어렵더라도 그 분들과 다시 만날 부활의 새 아침을 고대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요한계시록이 죽음으로 인한 이별의 고통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천상의 위로를 선포합니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그 때에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쏜톤 와일더라는 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삶의 나라가 있고 죽음의 나라가 있다. 두 곳을 연결하는 것은 사랑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삶과 죽음, 이곳과 저곳으로 나뉘어져 있으나 사랑이 그 두 나라를 이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면서도 사랑을 통해 영원의 편린(片鱗, 조각)을 체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요한1서 4:16)신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시간과 영원을 잇는 다리입니다. 이곳과 저곳을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다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서로 사랑하며 사십시오. 사랑을 실천하며 사십시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사랑하며 사십시오. 그 사랑의 힘으로 앞서 간 이들과 잠시 동안의 이별의 슬픔을 이기고 이 땅에서 뜨겁고 아름답게 사십시오. 죽음은 우리에게 지금 당장 사랑을 실천하며 살라고 말합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며 살 시간이 많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로마제국의 무시무시한 박해 시절,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는 고백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사자 밥이 되고 불 속에 던져지던 그 시절,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은밀히 건네던 인사말이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입니다. '당신의 죽음을 기억하시오'(Remember your death)라는 뜻입니다. 시제가 이상합니다. 죽음이란 미래의 일인데, 과거의 일처럼 '기억하라'는 말이 아닙니까. 하지만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철저히 종말론적인 신앙을 살았는지 드러내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죽음을 어떤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두려워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죽음을 똑바로 응시하여 참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렇게 살자는 힘찬 다짐이었습니다. 죽음을 통해 생명을 보고, 종말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보며, '가고 있는 시대'(age passing)가 아니라 '오고 있는 시대'(age to come)에 맞추어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이 주신 엄숙한 생명을 가치 있게 살아내자는 격려요 결단이었습니다.

언젠가 미국의 한 대형 호텔에서 큰 화재가 난 적이 있었습니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2백여 명의 투숙객들이 불에 타거나 연기에 질식해 죽기 직전에 모두 기적적으로 구조됐습니다. 이 사건이 지나고 한참 후 미국의 한 연구소가 당시 구조된 2백 여 명을 일일이 추적하여 화재 사건 이후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 대형 호텔에 투숙할 정도면 사회적으로 대단한 명망과 재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 대부분이 그 사건 이후 전혀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장애자를 돌보거나, 말기 암 환자와 함께 지내거나, 거리의 노숙자들을 돌보거나, 빈민지역에 들어가 무료로 진료를 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회봉사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화재 현장이라는 생지옥에서 이미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미 '종말'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구조된 이후의 삶은 덤으로, 그리고 선물로 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선한 이웃이 되기로 했습니다. 죽음이라는 종말 앞에서 비로소 고귀한 생명의 가치를 깨달았기에 그 전에 이기적이기만 하던 삶이 이웃을 섬기며 사랑을 실천하는 삶으로 변신한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실존적 종말을 통해 생명의 가치와 고귀함을 알았기에, 자기중심적이던 삶이 고통 받는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는 삶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런 종말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종말론(終末論)은 이런 희망과 새 삶에 대한 약속입니다. 종말신앙은 마지막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오늘 영원주일로 시작된 이 한 주간, 무엇보다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으로 삼으십시오. 먼저 돌아가신 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추모하십시오. 지금 연로하신 부모님과 어르신들을 가까이 보살펴 드리십시오. 그리고 이 주간에는 내 인생도 깊이 성찰하며 나 자신도 죽음 앞에서 결코 제외되지 않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새로 힘을 내어 사랑하며 사십시오. 우리에게는 사랑하며 살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감사하며, 서로 위로하며, 아끼고 보살피고 살아도 모자란 시간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로마서 11:36)을 기억하십시오. 그 영원과 영생에 대한 소망 속에서 흔들림 없이 더욱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십시오(고전 15:58). 그리고 새해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일부터는 대림절(待臨節)입니다. 하나님의 달력으로 새 해가 시작됩니다. 마음속에 '기다림의 초'를 준비하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의 새해는 우리를 찾아오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그 행복한 설렘에서 시작됩니다. 교우 여러분, 혹시 지금 어둠과 고난과 혼돈의 밤을 지나고 계십니까? 마음속에 '기다림의 촛불'을 켜십시오. "사람이 마음으로 작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잠언 16:9)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십니다. 영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생명과 소망을 주십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그가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아멘. (2018.11.25.)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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